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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12. 2023

바넷 뉴먼의 ‘숭고(崇高)’

<로스코 예배당> 앞에는 친구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가장 커다란 조각품 <부러진 오벨리스크(1963~1967)>>가 놓여 있다. 뉴먼은 1952년 폴록이 갑자기 구상으로 돌아가자 미국적 추상의 새로운 주자로 부상한 인물이다. 추상, 그 단순성은 0과 1의 디지털 시대에 당연히 예고되었던 미술 형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추상은 유럽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비기하학적 추상이다. 그리고 이 비기하학적 추상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잭슨 폴록의 ‘표현적 추상’과 바넷 뉴먼의 ‘색면 추상’으로 구분한다.

 

<하나임 Ⅰ(1948), 69.2x41.2cm>

작품은 뉴먼의 <하나임 Ⅰ>이다. 그는 평면의 캔버스를 색으로 가득 채웠다. 가장자리의 한계를 없애는 작업이다. 색도 두껍게 칠하지 않아 입체감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러고 나서 이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선, ‘지퍼(Zip)’를 넣었다. 일련의 줄무늬들은 종종 균일한 색면의 팽창을 강조하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런 시도는 무한, 즉 영원불멸의 ‘숭고(崇高)’를 표현한다. 뉴먼은 <인간, 영웅과 숭고(1950~1951)>라는 제목을 통해 자신의 의도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서양 미술사를 ‘미(美)와 숭고의 대립’으로 요약하면서 이런 의미를 전해주었다. 


“아름다움은 ‘형태’에서 나온다. 형태는 윤곽이고, 윤곽은 유한하다. 하지만 신성의 본질은 무한함에 있기에 아름다움에 갇힌 것은 온전한 신성일 수 없다.”


이 말은 유대의 신이 제 형상을 만드는 것(성상)을 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중권,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신성의 본질이 성상으로 인해 갇히기 때문이다. 숭고미,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정리해야 할 어휘이다. 숭고의 느낌은 “이성의 한계이자 아름다운 예술의 종말”이다. (베르너 융, <미학사 입문>) 칸트는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경험의 영역 안에서 매료하는 아름다움과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후자가 바로 이성을 넘은 ‘감성의 극단’ 숭고미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칸트의 개념을 좀 더 발전시켰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셋으로 나누고 그중 리얼리즘은 인간의 인지로 도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다고 했다. 칸트가 말한 경험의 영역 안에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이 합리성을 지향한다는 생각(계몽주의)이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들고 나온 아름다움이 숭고미다. 그리고 이 숭고미를 기존 양식으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믿은 모더니즘과 회의적이라는 판단하에 급진적인 기법만이 이를 표현할 수 있다는 본 운동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신정현,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감성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미술에서 강조되는 것은 형태보다는 색채다. 그런데 색상이 주는 감성의 문제는 생명체의 의식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식한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챌머스가 의식에서 기억을 저장하고, 자극에 반응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두뇌의 역학적 원리로 그나마 ‘쉬운 문제’로 규정했다. 이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색을 보면서 느낌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바나나를 노란색이라고 판단하기까지 별문제가 없다. 이런 판단은 기계도 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앱을 깔고 바나나 사진을 찍으면, 노란색이라 알려준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노란색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노란색 물체를 보았을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노란색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특정한 색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것이 <광학론>을 탄생케 한 뉴턴에게도 고민거리였다.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즉 이성의 범위를 벗어난 문제이며, 이에 도전할 수 있는 분야는 아직 예술이 유일하다.


리오타르는 숭고한 예술을 창조하고자 분투했던 바넷 뉴먼을 가리켜 포스트모던과 아방가르드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연유였을 것이다. 뉴먼도 로스코처럼 자기 작품에서 숭고함을 체험하는 방식을 안내했다. 가로 5.4m 세로 2.4m의 거대한 캔버스를 마주한 관객들에게 반드시 1m 정도의 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라고 이른다. (스텔라 폴은 <컬러 오브 아트>에서 45cm 거리를 제시했는데 마크 로스코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뒤로 물러서서 작품의 아름다움 따위를 감상하려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작품과 친밀하게 접촉하고, 작품에 사로잡히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이 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면, 어떤 느낌일까? 한마디로 압도당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벅찬 감정과 비슷하다. 그리고 무언(無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가 보다”라고 공감한다. 이때 뉴먼의 회화는 작품이 아니라 바로 사건, 그 자체가 된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연작 두 점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966년~1968년 사이 발표된 그의 작품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연작 두 점을 그렸다. 몬드리안은 삼원색을 엄격하게 고수하면서 더 이상 색만 의미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뉴먼은 몬드리안과 그의 동료 ‘순수주의자’라 부르며 나쁜 철학과 잘못된 논리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을 일종의 설교로 축소하거나 기껏해야 구경거리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 색들을 교훈(교조로 번역하고 싶다)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책무에서 해방코자 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그래서 제목을 도전적이고 매력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이 연작은 누군가에 의해 칼질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세 번이나 공격당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이 ‘반달리즘(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을 불러일으키는 뭔가 특별한 체험을 부여했다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제목 그림;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 Ⅳ(1969~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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