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에서 미니멀리즘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미니멀리즘은 형식의 단순, 간결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이를 추구한다. 심지어 조형물은 아무 의미가 없는 ‘사물’이 된다. 따라서 굳이 창조물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기성품(레디메이드)’으로도 가능하다. . 미국의 미니멀리즘은 팝 아트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하지만 전혀 친하지 못했다. 팝과 다르게 대중문화를 엄격히 배격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듯하다. 뒤샹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가의 역할을 극소화했다.
선구자였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는 조각이이라는 말 대신 ‘특수한 사물’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는 심지어 예술가라는 말을 거부한 채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의 경계를 실험했다. 저드의 상자는 추상과 객관성을 궁극으로 내몰고 장식 요소를 추방하여 미술을 본질로 축소하려 했다.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제목은 '무제'로 일관한다. 미니멀리즘은 최근에 관심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대중이 외면했다. 이후 대지미술이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
오늘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을 잠시 빌려온다. 그의 <Large Blue Anthropometry>는 공연이라는 형식과 파란색 물감을 도발적으로 결합했다. 작품은 어떤 무엇도 암시하지 않는다. 종이를 가로지르는 누드(인체)의 움직임만 추상화처럼 패러디했다. 그래서 ‘Anthropometry(인체 측정)’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회화의 전통적 기준, 즉 아름다움이나 서정성을 모두 포기했다. 회화가 내용에서도 무심한 ‘사물’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평가다. 형식과 내용 모두가 미니멀이다.
그는 잭슨 폴록처럼 붓을 거부했다. 대신 롤러나 ‘살아 있는 붓’ 인체에 색을 칠한 후 붓 대신 사용했다. 회화에서 나타나는 3차원 공간은 환상이라는 선언이며, 붓질은 지나치게 심리적인 행위이자 개인적인 몸짓의 증언이라는 이유에서다. 때로는 그가 직접 만든 <단조 교향곡>이 연주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없이 20분간 침묵만 이어지는 곡이었다. 감정의 개입을 배제하는 미니멀리즘의 극단이다.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목 그림; <무제의 인체측정(ANT 123, 1961)>)
“작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평면일 뿐이다. 모든 화가가 사용하는 색은 화학적 상태일 뿐이며, 특정한 사건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도구이다.”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도록 <화가들의 천국>)
이 말속의 ‘사건’이라 함은 액션 페인팅의 일환으로서 파격적인 공공 퍼포먼스를 의미한다. 따라서 클랭의 퍼포먼스를 통해 순수한 색이 사람의 육체에서 화폭으로, 화폭에서 다시 감상자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또한 그 색을 바라보는 관객은 심리적인 변화까지도 체험하게 되는데, 이때 색은 새로운 의미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 그가 직접 캔버스에 색칠을 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창조를 연출하는 지휘자 혹은 안내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클랭은 바실리 칸딘스키처럼 파란색을 무척 좋아했다. 가장 순수하고 무한하며 ‘사물의 무(無)’에 근접한 색이라 여겼다. 파랑(cyan)은 빨강(magenta), 노랑(yellow)과 함께 색의 3원색이다. 색은 평등하나 색을 결정하는 색소의 가격이 각각 다르다. 그중 클랭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은 바로 울트라마린(ultramarine) 블루였다. 깊은 물의 짙푸른 색과 벨벳 같은 질감을 특징으로 한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힌두쿠시 산매의 험준한 지형에서 나오는 청금석을 재료로 한 울트라마린은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값비싼 색이다. 그래서 중세에는 성모 마리아의 옷에나 사용했다. 1508년 알브레히트 뒤러가 프랑크푸르트의 상인 야콥 헬러에게 내민 울트라마린 1운츠(30g)의 가격은 황금 12두카텐(41g)과 맞먹었다. 무게 대비 금보다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클랭이 만든 ‘파랑’이 울트라마린을 훌륭하게 대체했다. (에바 헬러, <색의 유혹>) 울트라마린의 안료는 ‘눈부시게 밝은’ 것이지만, 오일과 혼합하면 대개 어둡고 둔탁한 색을 띤다. 클랭은 색의 마법이라고 여긴 광채를 간직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다. 마침내 파리에서 색을 취급하는 에두아르 아담과 작업하면서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다. 아담은 화학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결과, 로도파스(Rhodopas) M60A란 새로운 고착제를 얻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클랭은 이를 이용한 맞춤형 합성 안료를 IKB(International Klein Blue)라 이름하여 특허 신청을 했다. 1957년 이후로는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파란색 시기’로 진입했다. 원색이 캔버스를 완전히 덮어버리자 꿈과 공간의 경계가 없어졌다. 클랭은 자신이 영감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비슐라르의 말을 인용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음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음의 깊이와 푸른색의 깊이만 있다.”
1960년에 이르러 생산 비용이 매우 저렴하면서도 광채를 띤 IKB를 특허받았다. 이로써 중심도 없고, 위계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가 담겨 있는 그의 파랑은 마침내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했다. 이 밖에도 클랭은 다양한 재료, 혹은 방식으로 이질적인 실험을 계속했다. 화염방사기를 사용해서 ‘불’을 표현하였으며, 2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허공’에서 도약했다. 문자 그대로 작가 자신이 허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아르헨티나 출신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의 <공간 개념> 연작과 비교된다. 그는 캔버스를 찢고, 뚫고, 구멍을 내어 감상자가 우주라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을 경험하도록 했다. 반면 클랭은 비물질적인 ‘공간’에 관한 직접적인 체험이었다.
그의 <비물질적 회화 감수성을 위한 의식>은 매우 흥미롭다. 센 강변에서 순금 20g의 절반으로 만든 금종이에 불을 지른 후 강물에 던지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비물질적인 퍼포먼스가 다른 물질적 미술품처럼 만들고, 매매하고, 소유하는 과정이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화랑에서 이 ‘의식(儀式)’을 팔려고 내놓자 실제 고객이 나타났다. 구매자는 사전 동의에 따라 영수증 또한 불에 태웠다. 이로써 비가시적인 작품을 소유한 증거가 모두 사라졌다.
단순하게 보면, 이 퍼포먼스는 천박한 금전 만능주의를 우화적으로 비판하는 행위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비물질적 미술 세계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고객은 감상자이면서 참가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개념 미술의 수집은 새롭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시 피츠먼(Isi Fiszman)은 벨기에 화가 마르셀 브루데어스(Maecel Brood-thaers, 1924~1976)의 작품을 사자마자 부숴버렸다. 개념 미술 수집가는 작품을 비축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전에 피츠먼의 이런 행동에 동의한 작가는 부서진 잔해들을 다른 작품에 다시 사용했다.
반면 미니멀 아트와 개념 미술의 최다수 소장가 중 한 사람인 비우모 백작은 견해를 달리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그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끔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동의 아래 자기 집에 작가의 ‘개념’을 별도로 구현했다.
뉴욕의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는 로버트 배리(Robert Barry, 1936~)의 <닫힌 화랑(1969)>을 250달러를 주고 샀다. 물질적 실체는 없고 ‘전시 기간 중 화랑이 문을 닫는다’는 개념만 존재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부부는 ‘화랑 문을 닫는다’는 다른 화랑의 3개 고시(告示) 문장을 작가의 서명이 든 종이와 함께 액자에 보관했다. 보겔 부부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우체국 직원과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그들은 놀랍게도 솔 르윗의 작품 55점과 배리의 작품 75점을 구입했다. (토니 고드프리, <개념 미술>) 마땅한 공간이 없었던 까닭에 드로잉과 개념에 집중했으며, 작가와 쌓인 우정 덕분에 가능했다.
마침내 이들의 컬렉션은 1975년 처음으로 뉴욕 클록타워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미술에 대한 개념이 바뀌자 화랑과 수집가도 자연스럽게 변화를 이룬 결과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그 둥지인 세상이 바뀐다. 그리고 세월이 좀 더 흐른 후 사람들은 그 변화의 결과를 기적이라 부른다.
한편 클랭의 심장은 자신의 뜨거운 실험 정신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각성제를 습관적으로 복용했고, 푸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뿌리곤 했던 솔벤트 때문에 심장 기능이 나빠졌다. 결국, 1962년 발작을 일으켜 서른네 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등졌다. 그는 IKB 200여 점을 남겼는데, 미망인 로트로 클랭 모케가 사후 모든 작품에 번호를 매겼다. 이후 그의 작업은 요제프 보이스를 비롯한 현대의 행위예술, 팝아트, 미니멀리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