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는 전통적인, 즉 과거의 관행적인 미술에 대한 지난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적인 실험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전위예술(前衛藝術), 혹은 이런저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미술을 위한 미술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대중은 혼란스러웠고 지루했다. 그러자 스탠 헌트가 <뉴요커>지에서 삽화를 통해 현실을 꼬집는 상징적인 질문을 한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 비순응주의자가 되어야 하죠?(1958)>. 이것이 “인간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면, 그 출발이 바로 '포스트 모던’이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급기야 1975년에 젊은 건축가에 의해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용어가 소개되었다. 탈(脫)현대를 이름이다. 그러나 철학적 깊이가 없는 단순한 분류다. 그래서 E. H. 곰브리치는 ‘포스트 모던(pdst modern)’을 새로운 양식이라기보다 ‘변화된 분위기’라는 개념으로써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된 분위기에는 당시 대세였던 반(反)예술에 대한 저항도 포함된다. 팝 아트도 그중 하나로, 그간 지배적이었던 난해한 예술을 확 뒤집어 놓았다.
추상표현주의를 대체한 네오 다다, 그리고 네오 다다에서 파생한 팝 아트. 팝 아트는 ‘Popular Art(대중 예술)를 줄인 말이다. 1950년대 중반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양식으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무너트렸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처음 사용했을 땐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클라우스 호네프, <팝 아트>) 1960년대 뉴욕 맨해튼에서 젊은 팝 아티스트들이 이 미술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제스퍼 존스, 라우센버그가 선구자이며,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로젠퀴스트, 웨세르만, 시걸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이들은 하위문화나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타파하는 전위적(前衛的) 미술 운동을 일으켰다. 개념 미술과도 겹친다. 추상표현주의의 엄숙성에 반대하여 보도사진, 만화, 광고를 그대로 빌려와 대중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미술’, '함께 하는 미술'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반(反)예술적이며, 반 엘리트적인 반란이다. 그리고 그 특징적인 언어에는 "대중적인, 일시적인, 소모용의, 낮은 비용의, 대량 생산된, 젊은, 재치 있는, 섹시한,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큰 사업" 등을 사용한다.
재스퍼 존스의 <깃발>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자신을 제외하고 추상표현주의를 모방하지 않는 화가로 유일하게 꼽은 인물이 바로 미국 ‘팝 아트의 아버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다. 두 사람은 임시직인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함께 하면서 만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라우센버그가 정열적이고 혼란스럽다면, 재스퍼 존스는 차갑게 계산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1954년부터 기획한 그의 연작 <깃발> 중 하나이다. 1958년 뉴욕 리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성조기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다룬 과녁, 지도, 숫자, 알파벳 등과 마찬가지로 그냥 일상적 모티브일 뿐이다. 그는 양식에서 미국 현대미술의 전통이라는 ‘추상’을 승계하지 않았다. 성조기처럼 흔히 보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구상(具象)’을 선택했다.
그런데 기존의 다다이즘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교묘하다. ‘오브제’로써 성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천이 아니라 납화법(안료를 밀랍(왁스)과 섞은 것)을 사용해 질감이 풍부한 그림을 그렸다. 라우센버그가 그린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없애고 생활용품을 모아 물질을 만들어냈다면, 존스는 거꾸로 물질을 그림으로 환원했다. 회화의 본질 ‘평면성’에 충실한 시도다. 성조기 세 장을 포개어 공간의 깊이를 나타냈지만, 결국은 평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조각과 구별되는 “회화는 회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직전의 미국 현대 미술(모더니즘) 경향으로 되돌아간 듯 보인다. 하지만 회화가 주는 아름다움이나 서정성을 거부하는 미니멀리즘(개념 미술)과도 유리되었다.
그럼, 재현이면서도 전통적 의미에서 재현이 아닌 그의 회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구상과 추상, 그림과 물질, 이런 것들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되묻는 듯하다. 끝없이 편을 나누는 인간의 본성을 깨트려 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이 정체성 문제는 작품이 완성된 지 10년 후 비평가 앨런 솔로몬이 ‘그것이 깃발인가, 혹은 깃발을 재현한 것인가’를 질문했을 때 제기되었다. 존스의 흥미로운 시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브제로서 깃발인가, 그림으로써 깃발인가? 그림으로써 오브제의 역할을 대신했으니, ‘2차원적인 오브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질문에 관한 작가 자신의 답변에 따르면, 둘 모두였다. 공존이다. 그러나 뒤샹은 자신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존스를 비판했다. 자신의 시도한 반미학적 작품이 아니라 미적인, 즉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존스가 자기 미술을 위해 뒤샹을 활용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성조기는 미국에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정체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작가가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답은 둘로 나뉘었다. 대중이 쉽게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평가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그가 역설적으로 애국심 뒤에 숨어 있는 이중성을 공격했다고 간주했다. 미국과 소련의 동서 냉전, 막 끝난 한국전, 상원의원 맥카시의 마녀사냥 등이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클라우스 호네프, <팝 아트>) 여하튼 그는 논쟁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국기를 새롭게 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미국 미술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제목 그림; <깃발(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