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가 꼽은 또 한 명의 현대 미술의 개척자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그러나 워홀은 라우센버그와 그의 친구 제스퍼 존스의 작품 앞에 서기만 하면 한없이 작아졌다. 뒤샹의 그림을 흉내 냈지만,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한낱 상업 미술가였을 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주변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드디어 <캠벨 수프 깡통(1962)> 37점을 전시했다. 작품당 100달러, 고작 5점이 팔렸다. 이때 페루스 갤러리를 운영하는 어빙 블룸이 각각의 연작보다 묶음으로 그려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발상에서 탄생한 것이 32개의 캔버스(각각 50.8×40.6cm)에 합성 고분자 페인트를 사용하여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프 깡통들을 완성했다.
1962년 그해, 뉴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트딜러의 한 사람인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새로운 사실주의자들>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데 쿠닝은 캠벨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을 그린 작품에 분노했다. 그는 워홀의 면전에서 이렇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죽인 살인마야!”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많은 비평가와 기존 작가들이 팝 아트의 선구자, 특히 워홀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워홀은 예술가에 대한 기존 인식을 바꾸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상업성과 유명세라는 현대 사회의 두 가지 힘을 편견 없이 바라보았다.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위대한 사상가>)
그는 세탁소 구석에 서서 화학물질의 냄새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음미했다. 어렸을 적 버스에서 휘발유 냄새 맡기를 좋아했던 나의 경험과 비슷하다. 워홀은 공항을 사랑했고, 특히 보안 검색대를 여러 번 통과하곤 했다. 번거롭다고 생각했을 행위에서도 재미와 매력을 발견하는 낙천성이 돋보였다. 대부분 이국적인 풍경에 환호한다. 하지만 앤디 워홀은 일상 속 사물에서도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호기심만 있다면, <캠벨 수프 깡통>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유 따르는 여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요하네스 베르메르나 화려한 로코코 시대에서 평범한 정물을 캔버스에 담는 용기를 보였던 샤르댕과 같다. (제목 그림; <자화상(1986)>)
‘죽은 사람’ 연작으로 이어졌다. 워홀은 유명세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다. <마를린 먼로 이면화>는 영화 <나이아가라>의 홍보용 사진을 이용했다. 굳이 번거롭게 직접 그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25회씩 찍어낸 이미지를 각각 두 개의 패널로 나누었다. 우표처럼 생긴 먼로가 색깔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전달한다. 왼쪽이 즐거운 모습이라면, 오른쪽은 우울해 보인다. 마치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듯. 이 작품은 1980년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600만 달러에 팔렸다. 한 마디로 히트였다. 자살한 직후의 먼로를 담았 듯이 질병으로 고비를 넘긴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전성기 때 모습을, 케네디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영부인 재클린을 그렸다.
반면 무명인은 충격적인 재난과 연결하여 연작을 꾸몄다. <녹색의 불타는 자동차 Ⅰ(1963)>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그는 직업, 즉 일에 대한 가치는 동일하다는 입장이다. 가정부, 문지기, 구두 만드는 사람이 주는 가치는 화가의 그림과 교환이 가능하기에 그렇다. 단지 유명인은 잠재력이 상대적으로 클 뿐이다. 현대 사회는 소비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시대다. 심지어 대중이 동경하는 슈퍼스타마저 개성을 말살하고 한낱 소비 대상으로 전락한다. 워홀의 작품에서도 마오쩌뚱, 레닌, 엘비스 프레슬리 모두 모티브 상 차이가 없다. 유명인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는 예술과 사업을 결합했다. ‘팩토리(The Factory)’라 부르는 작업실에서 작품을 계속 찍어냈다. 그것도 조수를 시켜서. 소비사회의 특징인 ‘기계적인 방식’ 실크 스크린 기법을 처음으로 미술에 도입했다. “’원화’ 한 장이 훌륭하면, 전부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화가의 독창성보다 대중의 획일화된 감성에 영합한 작품을 생산했다. 이런 맥락에서 워홀 자신이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마를린 먼로> 연작을 통해 나타난 효과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왼편 작품은 <마를린>이고, 오른편은 <마를린 레드>이다. 먼로의 머리칼이 금발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표준형과 변형으로 구별해도 좋다. 연작은 이렇게 그녀의 피부에 입힌 색조의 이름을 따서 ‘마를린’ 뒤에 그레이, 블루, 핑크 등으로 불렀다. 사실 마릴린 먼로는 입을 반쯤 벌리며 백치미를 풍기는 섹시 스타로 자신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을 괴로워했다. 정극(正劇)에서 진지한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군인들에게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흔히 대중들이 벽에 붙여 두는 사진으로 사용되는 글래머 스타를 일컫는다)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1962년 과다 약물 복용으로 죽은 후에야 그녀의 번민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녀의 명예 회복에는 워홀의 작품이 한몫했다. 워홀은 불행한 여배우의 상징적 이미지를 과장했다. 금발 머리, 눈두덩이 화장 색, 빨간 입술을 강렬하게 처리했다. 그녀에게서 관능성을 제거하는 장치다. 그리고 여러 버전으로 대량 생산함으로써 섹시 스타라는 이미지를 중화했다. 일방적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고착한 할리우드와 같은 대중매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숨겨왔던 악의를 드러내는 효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워홀은 먼로가 갇힌 인위적인 신화 속에서 구해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쌓은 그녀의 사후 명성은 생전의 인기를 뛰어넘었다. 팝아트이기에 이룰 수 있는 힘이었다.
워홀의 여자친구가 물었다. "앤디는 뭘 가장 사랑해?" 이 질문을 받은 이후 그는 돈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의 주 관심사가 돈인데, 그 욕망을 솔직히 드러낸 거다. 교활함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미학적인 접근 방식을 표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대중은 작품이 아니라 ‘워홀’ 자체에 환호했다. 워홀도 대중을 믿었다. 이 모든 가치가 합쳐져 그가 곧 상업 브랜드가 되었다. 상업성에만 천착했다고 오해할 수 있을 때 워홀은 <브릴로 상자>를 그렸다. 합판에 실크스크린 잉크와 페인트로 똑같이 그렸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했다.
“공장에서 만든 진짜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예술과 상품을 무엇으로 구분하느냐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아서 단토는 이를 보고 ‘(기존)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으며, 워홀의 이 질문을 통해 이제 예술은 철학으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공장에서 만든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상표를 디자인한 사람이 상품을 판매하려는 의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워홀은 자신의 문화적인 메시지와 미학적 특성을 <브릴로 상자>의 이미지에 반영했다. 이 점에서 상품과는 다른 별개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으로, 곧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은 예술이 단지 아름답다거나 좋은 취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미술을 가리켜 ‘자연의 모방’ 일뿐이라며 무시했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대중에게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그 생각 깊숙한 곳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화두가 존재한다. 그리고 질문은 대중을 생각하게 만들어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어떤 힘이 되었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우리를 특별한, 그리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현대 미술은 이렇게 ‘철학’이 되었다. 그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 뉴욕 병원에서 담낭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펜실베이니아주 베델 파크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그의 세상에 던진 도전과 질문은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