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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Feb 09. 2023

구상 회화로 회귀

미국의 지방파 그랜트 우드

“인류는 2만 년 동안 나아진 게 없구나.”


1만 4천 년이 지난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피카소가 외친 말이다. 예술은 감성을 전달하여 이성을 돕는다. 그 원초적 전달에 있어서 원시라 하여 현대인보다 부족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피카소는 이때부터 강렬하고 단순한 원시의 메시지를 지향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술은 순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1950년대 후반, 새로운 구상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잭슨 폴록 사후 추상표현주의가 열렬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으며, 추상에서 구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마치 범죄처럼 느꼈을 때였다. 하지만 카메라가 등장한 이후 ‘구상에서 추상으로, 3차원에서 2차원으로’ 환원하던 미술적 경향은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 인간의 빈약한 상상력 창고에서 추상은 점차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추상표현주의 이론을 정립했던 비평가 클레먼트 그린버그에 의해 그림은 좀 더 평면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했다. 1953년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스승이자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데 쿠닝의 그림을 지우면서 당돌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이젤의 경계를 부숴버리며 ‘콤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s)’을 선보이자 젊은 작가들이 열광했다. 

이 고래 싸움 사이를 비집고 구상화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뜻밖이다. 에드워드 호퍼를 비롯한 선배 화가들이 대세를 거스르며 꿋꿋하게 맥을 이어온 덕분이다. 1970년대에는 개념 미술에 밀려 전통의 회화가 아예 사라질 위기에 빠졌으나 신표현주의의 등장으로 기사회생했다. 1980년대에는 비주류 하위문화인 그라피티(graffiti, 낙서화)가 힘을 보탰다. 장 미셀 바스티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와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그리고 이들이 요절한 후 정체불명의 영국화가 뱅크시(Banksy, 1974?~)가 활동한다. 모두 어린이가 좋아할 그림이다. 이 또한 원시 회귀 현상일까? (제목 그림; 노먼 녹웰의 <추상과 구상(혹은 감상자, 1962)>

 

미국의 지방파 그랜트 우드


토마스 벤튼, <미국의 오늘(1930~1931)> 중 한 작품

1929년 말부터 경제공황이 불어 닥쳤다. 다행히 정부는 연방 미술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미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대중의 관심은 국내로 모아졌다. 그러자 국수주의적인 경향과 수혜 의식이 배경이 되어 미술계의 흐름도 바뀌었다. 화가들은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대중의 애국적인 열정을 자아내는 작품을 양산했다. 지방파가 등장했다. 그들은 오토마티즘을 기법으로 하는 추상 미술이 유행하던 당시 미국 회화의 본질은 사실주의, 즉 구상 회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잭슨 폴락의 스승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45)이 그중 한 명이다. 밴튼은 모더니즘에 저항하여 미국의 토속적 소재를 캔버스에 담았다. 미전역의 시골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스케치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1930년부터 1931년 사이 뉴욕의 진보 성향의 대학 뉴 스쿨에 그린 벽화 <미국의 오늘> 10개 패널이 널리 알려져 있다. 권투 경기, 지하철 승객, 목사의 기도, 벤치에서 키스하는 연인, 댄서 등 대공황 직전, 1920년대 격동하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1930)>

이러한 전통은 1930년대에 앤드류 와이어스와 존 케인, 에드워드 호퍼, 벤 샨, 특히 그랜트 우드(Grant Wood, 1891~1942)에 힘입었다. 사진으로부터 출발했던 우드의 초상화는 1928년 뮌헨에서 신즉물주의를 접하고 돌아온 후 갑작스럽게 변화를 맞았다. 가장 ‘미국적인’ 그림 <아메리칸 고딕>이다.

제목은 작가가 자랐던 아이오와주의 '카펜터 고딕'으로 알려진 건축 양식에서 따왔다. 산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가는 미국의 농경사회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다. 등장인물들의 과장되게 긴 얼굴과 배경의 목조 주택 건축에서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조된다.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을 담은 에드워드 호퍼와 비교하여 그랜트 우드는 시골의 고집스럽지만 정직한 사람을 택했다. 아이오와주 농촌 마을 하얀 집 앞에 선 그림의 주인공은 부부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와 딸로 분장했다. 모델은 우드의 담당 치과의사 맥키비와 여동생 난 우드다. 사람들이 몰라보리라 예상하고 모델로 썼다고 한다.

 

청바지를 입고 삼지창 같은 갈퀴를 쥔 아버지는 꾹 다문 입과 안경 너머 눈이 완고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딸의 표정이 재밌다. 아버지에게 대놓고 얘기 못 하지만, 그녀는 농촌 생활이 답답했나 보다. 삐쭉 튀어나온 r그녀의 입이 그 사실을 일러 준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녀의 가지런히 빚은 머리채 사이에서 이탈하여 아래로 흘러내린 한 가닥 금발이 보라. 그리고 단정하게 무장한 의상 위 브로치에 새겨진 '머리를 풀어헤친' 어여쁜 님프의 얼굴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라. <아메리칸 고딕>을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젊은 여성의 본능을 고백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국가적 아이콘이 된 이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엄청난 패러디가 생겼고, 두 사람은 덩달아 유명해졌다. 난 우드는 평생 오빠의 작품 연구를 도우며 살다 91세에 죽었다. 쾌활한 성격의 매키비도 아이오와주에서 죽을 때까지 치과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림이 주는 인상처럼 모두 우직한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그림이 비난받았다고 한다. 시골 사람들을 바보처럼 풍자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서부 미국인의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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