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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Feb 11. 2023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과 소외’

20세기 초 미국 현대 미술에 ‘재떨이 파(Ashcan School)’가 등장했다. 그들은 추상 미술의 유행을 무시하고 권투 시합이나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등 주로 도시 하층민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점잖지 못한 그림’으로 여겨 재떨이에 버려야 한다는 조롱 섞인 이름이다. 그러나 스승 헨리를 통해 이 유파에 가담했으면서도 정서가 매우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인 화가가 있다. 바로 사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다.

 

그의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은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일본의 진주만 폭격 직후의 작품이다. 대도시의 고독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고독이 느껴지는 공간을 표현했다. 호퍼 자신이 당시 대세를 이루는 ‘추상 표현주의’의 물결에 밀려 화가로서 외로움을 느꼈을 때다. 그러나 ‘미국적 풍경을 담는다’는 주변의 평가에는 거부감을 표출했다. 


“난 나 자신을 그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 미국적 풍경이란 걸 왜 내가 덮어써야만 하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호퍼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고통과 불행을 느낀다”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려 했는지 모른다. 그림 속 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이례적으로 많은 수다. 그러나 삼각형 바에 막혀 있는 흰색 모자를 쓴 바텐더는 고독의 주인공이 아니다. 일과를 마치는 대로 자신을 반겨 줄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나머지 3명 중에서 언뜻 보아 가려진 술잔을 쥐고 있는 뒷모습의 사내가 제일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연인처럼 보이는 두 명도 심각하다. 손은 가까이 있으나 서로 시선을 달리 한 채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해 있다. '분리'다. 게다가 표정, 특히 사내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불안감이 감지된다.

<밤의 창문(1928)>

여인은 호퍼의 아내 조(조세핀 N. 호퍼)를 모델로 했다. 그럼, 곁에 있는 사내는 호퍼의 자화상일까? 이들의 등 뒤 창밖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도시가 있다. 그러나 피곤을 잠재우고 위로를 주지 못한다. 식당 안 환한 불빛과 대조적으로 희미한 가로등 조명이 오히려 절대 고독으로 몰고 간다. 이런 이중 광원은 <밤의 창문>에서도 발견된다. 사실 작품 속 고독은 도처에 있다. 홀로 앉는 사내의 등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곁을 나란히 한 빈 의자 위에도 내려앉았다. 호퍼는 이 작품이 밤거리를 자신이 어떻게 상상하는지 잘 보여준다며 그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제목 그림; 자동판매기 식당(1927)>


“나는 그리니치 가(街)의 모퉁이에 있는 음식점에서 이 작품에 대해 착안했다. 특별히 고독한 장소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장면을 극도로 단순화하고 식당을 확대하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에서 대도시의 고독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뉴욕시 광고 대행사에서 삽화를 그리던 호퍼는 1913년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항해(1911)>라는 작품이 250달러에 팔렸다. 그러나 또 다른 작품을 팔기까지 11년이나 걸렸다. 41세에 결혼에 이른 1924년부터 갑자기 유명해졌다. 호퍼는 전보다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 조는 남편보다 고양이와 있을 때 더 행복해 보였다. 193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야 호퍼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졌다. 그러나 검소한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연극과 영화를 감상하는 정도의 사치는 누렸다. 

<바닷가의 방(1951)>

호퍼는 특히 영화를 즐겼는데, 그 속에서도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추상표현주의에 경멸의 눈길을 보내면서 색채가 아니라 조용히 ‘햇빛’에 몰입했다. <바닷가의 방> 주인공은 열린 창을 통해 방안을 비추는 햇빛이다. 호퍼는 효과를 높이려 공간을 비워 놓고 맨바닥과 무채색 벽면을 배치했다. 빛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오면, 비로소 공간은 생명력으로 채워진다. 건넌방도 마찬가지다. 공간은 소파와 가구, 벽에 걸린 액자는 역시 빛을 위한 작은 치장일 뿐이다. 문틈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민 파란 바다가 갑자기 왜소하게 다가온다.

<빈방의 태양(1963)>

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작품 <빈방의 태양>도 맥락을 같이 한다. ‘전설의 큐레이터’ 캐서린 쿠가 ‘호퍼의 간결한 이력서’라고 여겨온 작품이다. 호퍼는 캔버스에 빈 곳을 넓게 할애하여 심리적 복선을 깔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과거 못 견디게 외로웠던 자기 경험과 마주친다. 그런데 그 감정을 가리켜 딱히 고독이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 불행까지는 아니라 해도, 쓸쓸한 그 무엇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소외가 담겨 있다. 게다가 허망해지는 포인트는 작품 속에 사람이 존재할 때 오히려 더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는 역설이다. 호퍼는 현대 도시의 구석구석에 서식하는 고독을 포착했다. 마치 추상만이 디스토피아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시위다. 그러나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은 자신은 정작 침묵에 들어갔다. 여기서 고독을 떠올리든 명상과 침묵이라 여기든, 모두 감상자의 몫이라며 발을 뺀다. 불친절하다. 그러니 고독을 벗어나려 너무 애쓰지 말라. 익숙해지는 게 좋다. 아니면, 자꾸 주변에 섭섭해지면서 자기 행복을 갉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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