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는 나비나 벌이 되어 꽃을 대했다. 그러자 꽃은 그녀에게 가깝게 그리고 큼직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확대된 꽃을 그리게 된 계기는 앙리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 전시회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꽃에서 의미를 찾고 위안을 받으면서도 정작 정물화 속 작은 꽃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녀는 작심했다. 꽃이 그녀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전하되, 아주 크게 그리기로. 그래야 놀라서 안 쳐다볼 수 없을 터였다. 마치 카메라 접사(接寫, 렌즈 초점거리의 10배보다 촬영 거리가 짧은 근접 촬영) 형태이다. 유명한 사진작가인 남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846)에게서 힌트를 얻은 기법일 수 있다.
남편은 뉴욕에서 ‘갤러리 291’을 운영하며 유럽의 근대 작품을 소개했던 당대의 실력자였다. 19세기 회화적 사진 대신 핀트를 맞추며 카메라 기능에 충실한 리얼리즘 사진을 주장했다. 1902년 ‘사진 분리파’를 창설하였으며, <샘>과 관련 뒤샹의 의도를 그의 잡지에 게재했다. 무엇보다도 1913년 2월, 뉴욕의 제69연대의 병기고에서 ‘아모리 쇼’를 기획하여 미국인에게 유럽의 현대미술을 소개했다. 세잔, 고흐와 표현주의, 야수파와 입체파의 미술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개한 획기적인 전람회였다.
조지아 오키프는 1918년부터 꽃을 그렸다. 그리고 1924년 결혼한 그해부터 거대한 규모의 꽃 그림을 시작했다. 초점을 대상에 가까이 맞추면, 먼저 형태가 단순해진다. 반면 색이 주는 감정 전달은 강력해진다. 마치 ‘추상’과 맞닿은 형국이다. 그녀의 대표작 <빨간 바탕에 한 송이 칼라>다. 백합과의 하나인 칼라는 결혼식 부케뿐 아니라, 장례식에도 많이 쓰는 꽃이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과 그 마지막을 함께 한다고나 할까? 오키프는 형태를 더욱 단순하게 하기 위해 ‘칼라’를 선택했다. 빨간 바탕에 초록색 잎, 그리고 다시 옅은 노랑이 숨어든 하얀색의 칼라를 매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하지만 꽃에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그리다 보면,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생식기가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의 남편도 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생물학적으로 꽃과 여성의 생식기는 기능을 같이 한다. 2억 5,000만 년 전 페름기 말 지구상의 생명체 약 95%가 절멸된 이후 식물은 전략을 수정했다. 약 1억 6,000만 년 전, 속씨식물이 등장하면서 꽃을 피운 후 그 씨를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꿀과 함께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하는 장치를 만들어 곤충 등 동물을 유혹했다. 동물은 꿀로 배를 채우는 대신 씨의 수정을 돕는다. 공진화(共進化)다. 이렇게 해서 속씨식물은 오늘날 전체 식물의 90%를 차지하게 되었다. 꽃에 담긴 이 깊은 생명의 신비를 서술하는 데 있어 오키프는 칼라 한 송이로 충분했다. 오히려 자부심을 느껴도 될 사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엔 자격지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는 일찌감치 추상화가 주는 상징성에 매료되었다. 아모리 쇼가 열렸던 1913년, 칸딘스키의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었다. 97세에도 이 책을 끼고 지낼 정도로 심취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했다. 광고 디자인 등 상업미술을 했고, 교직을 얻어야 했다. 이즈음 스물세 살 연상 스티글리츠를 만났다. 그녀의 목탄 드로잉 <스페셜> 연작이 인연이 되어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코르티잔’으로 불릴 법했다. 여하튼 그의 멘토링 덕분으로 그녀는 용기를 얻고, 회화에 전념했다.
아방가르드 미술을 소개하던 스티글리츠도 오키프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1921년 스티글리츠가 작품 전시회를 하는데 사진 절반이 오키프의 모습이었다. 그중 상당수가 누드였다. 그녀는 졸지에 미술가가 아니라 스티글리츠의 누드모델이자 뮤즈로 부각했다. 그녀는 ‘착한 요부(妖婦)’라는 시선이 불편했다. 차제에 동료인 마스던 하틀리(Marsden Hartley)가 출판한 수필에서 그녀의 작품을 성적인 측면에서 해석한 글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녀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다시는 세상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키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할 때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상대자 도로시 노먼은 그녀보다 18살이나 어렸다. 스티글리츠와는 마흔이 넘는 나이 차이다. 너무 심했다. 우울증 등에 시달리던 그녀는 1927년 7월과 12월 두 차례 심각한 가슴 수술을 받았다. 회복이 지체되는 가운데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뉴멕시코가 떠올랐다. 1929년부터 그녀는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소와 야생동물의 뼈, 조개껍데기, 돌멩이, 나뭇조각 등을 주워 이것들을 풍경과 병치하자 독특한 기하학적 세계를 발견했다.
<골반 Ⅳ(1944)>는 그 뼈의 구멍을 통해 하늘을 바라본 풍광이다. 마치 두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낯섦이다. 자연을 그대로 재현했음에도, 한 폭의 추상화로 나무랄 데가 없다. 비로소 오키프는 당당히 남편과 동지적 관계를 형성했다.
1946년 스티글리츠가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세상의 명망을 뒤로하고 1949년 한 줌 미련 없이 뉴멕시코에 정착했다. 뉴멕시코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탐방하면서 다양한 양식의 그림을 선보였다. 어떤 이는 그녀를 초현실주의와 연관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특정 양식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다. 드디어 오키프의 시선이 위에서 먼 아래로 향했다. 1951년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시작된 변화이다.
<드로잉 Ⅳ>를 보고, 어떤 이가 ‘하늘에서 바라본 메마른 사막을 흐르는 강’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이 답을 무척 기뻐했다. 자신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외로웠던 거다. 시력과 건강이 나빠지면서 1984년 아비키우의 큰 집을 떠나 산타페로 이사했다. 그리고 2년 후 98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유골은 그녀가 사랑한 고스트 랜치 근처에 뿌려지고, 뉴멕시코의 주도(州都) 산타페는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제목 그림; <회색 언덕(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