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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Feb 23. 2023

루시언 프로이트의 극사실주의

<패딩턴 실내(1951)>

프란시스 베이컨의 친구 루시언 프로이트(Lucian Freud, 1922~2011)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가족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1939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의 수식어는 두 가지다. ‘정신분석학의 지평을 연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의 친손자’와 ‘극사실주의 화가’다. 1951년 <패딩턴 실내>로 영국문화예술위원회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프로이트는 미술상(아트 딜러)에게 예술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갖춘 ‘꿈의 작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의 인물화를 대하면,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라는 평가(미술평론가 로버트 휴즈가 1988년 출간한 프로이트에 관한 연구서에서 언급)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역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오래 쳐다볼수록 (대상이) 점점 추상에 가까워지며, 역설적으로 점점 더 사실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사실적이면서도 묘사가 독특하고, 물감층에 상당한 깊이가 있어 평범한 사실주의 작품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사실성’이 말이 던지는 개념의 혼란 때문일 수 있다. 사실 ‘사실성’이란 의미가 모호하다.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일러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상적이다. 프로이트도 초기 16세기 플랑드르 화가와 쿠르베가 다룬 주제의 사실성에 뿌리를 두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후기 작품에서 그는 육체의 질감과 함께 모델의 내면을 따뜻한 시각으로 표출하려 했다. 매우 주관적이며 독창적인 ‘사실성’이다. 그의 누드는 너무나 대담하고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관능적인 요소가 묻힐 정도다. 또한 현미경으로 피부색의 미세한 차이와 땀구멍까지 탐색한 듯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낯설다. 할아버지 프로이트의 관찰 방법과 반대로 육체를 통해 영혼을 해석하려 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그를 표현주의자로도 분류한다.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의 말이 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겠다. (제목 그림; <자화상(2003~2004)>


“사실주의는 양식이 아니고 접근방법이고, 목표이다.”

<프란시스 베이컨(1952)>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사진보다 더 현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대상을 표현하려 했다. 그는 일부러 모델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자기 주변에 있는 인물, 즉 가족, 친지, 그리고 소개받은 이들을 캔버스에 담았다. 자전적(自傳的)이며, 가공의 인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 역시 ‘사실적’이다. 

활동 초기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를 그렸다. 베이컨과는 1950년대 그레이엄 서덜랜드를 통해 만나 친구가 되었다. 캔버스 전체를 친구의 얼굴 하나로 가득 채웠다. 강렬하다. ‘무릎이 닿을 만큼 베이컨에게 바짝 다가앉아 석 달 동안 그린’ 결과이다. 우린 흔히 얼굴이 대칭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작품 속 베이컨의 눈과 입술, 안면 근육까지 모두 비대칭적이다. 그늘 속 얼굴 오른쪽은 평범하다. 그러나 밝은 왼쪽 절반은 생기가 넘친다. 눈을 깔고 자기 생각에 빠진 친구의 불안정한 내면이 담겼다.

 

1954년 이후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일어서서 그림을 그렸고, 이후 다시는 앉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담비 털로 된 부드러운 붓을 버리고 두꺼운 돼지털 붓을 사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붓이다.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터치가 중요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질감에 자신의 감정을 강조했는데, 작품이 넓고 거칠게 보이는 이유로 작동했다. 주관적이나 근본적인 시각에서 여전히 사실적이다. 앞의 작품처럼 세부 관찰을 통해 그때그때의 혈관과 근육, 지방조직, 뼈, 그리고 피부에 비치는 붉은 피 등 모든 정보를 캔버스로 옮겼다. 그리고 평생 이런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남자의 머리, 자화상(1963)>

<남자의 머리, 자화상>을 보면, 전작과 비교할 때 선이 매우 투박해졌다. 그는 태생적으로 도전적이었다. 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실존주의의 앵그르’라 불렀지만, 단순한 재현에 저항한 것이다. 자신의 영감에 선의 움직임을 맡겼다. 예측 불가능했다는 의미다.


“사실주의는 실재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이 실재 같아 보이느냐의 문제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여왕 엘리자베스 2세(2000~2001)>의 작업 현장과 초상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그렸을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17개월 작업 끝에 내놓은 것은 의외로 가로 22㎝, 세로 15㎝ 크기의 ‘소품’이다. 국왕의 초상화는 벽면 하나를 꽉 채울 정도의 크기로 장식되는 게 상례였다. 세상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여왕의 표정에는 화폐의 초상화에서 나타났던 따뜻함이 사라졌다. 게다가 왕에게 사용되는 최고급 안료 ‘울트라 마린 블루’를 아끼려 했다는 비난까지 일었다. 

통상적 경우라면, 프로이트는 캔버스의 크기에 제한을 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직전에 기법이 바뀌었다. 1998년, 피카소의 전기작가 존 리처드슨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모델의 포즈 몇 번만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에 자신감이 생겼고, 바쁜 여왕의 일정을 고려하여 같은 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대신 초상화의 크기가 작아졌다. 마찬가지로 그는 흙을 사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듯이 금보다 비싼 안료에도 굳이 인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다만 프로이트의 제의로 이루어진 작업이기에, 작가가 판단한 안료를 선택했을 뿐이다. 기존 모델들과 여왕을 공평하게 대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군주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엘리자베스 2세를 잘 표현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완성된 초상화는 왕실에 기증했다.


<화가 엄마의 휴식(1975~1976)>과 <화가의 엄마(1984)>

그는 억지로 가감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사실적이라는 말보다 ‘정확하다’는 표현을 선호했다. 어머니 연작에 임할 때도 같은 태도가 발견된다. 197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루시는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고, 자살을 기도했다. 자식에 대한 관심도 거둬들였다. 이때 프로이트가 작업에 착수했다. 어머니에게 살아야 할 명분을 만들어 주려는 효심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무심한 태도, 즉 모자지간 연대감이 옅어지자 비로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늙어 주름지고 활기를 잃은 여인의 표정을 매우 객관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연작 초기와 후기, 모델의 변화가 흥미롭다. 1976년 작품에선 아들의 모델로서 옷을 단정히 차려입었으나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어색해한다. 1984년이 되자 어머니에게선 제법 관록이 묻어난다. 프로이트는 자기 아내들(?)과 딸을 포함하여 100여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누드모델들은 잠을 자기도 하는 등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했다. 때론 프로이트가 대화로 즐겁게 해주면서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끈질기게 관찰했다. 마치 할아버지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기 비결은 집중력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그림 한 점을 완성하는데 수개월에서 1년 반 이상이 걸렸다. 죄 없는 모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원, 노팅힐게이트>

흥미로운 것은 풍경을 대할 때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사실이다. 후기 작품 <정원, 노팅힐게이트(1997)>는 터치가 온순하다. 뒤러 이후 식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이 작품에서는 초상화에서 나타나던 거친 질감이 사라졌다. 사실주의자라는 보편적 개념에 동감케 한다.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 대신,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인간이나 동물과는 달리 정원에 있는 식물은 상대적으로 정적이다. 운동성과 감정 표현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식물의 정적(靜的) 정보를 전하기 위해 굳이 생동감 있는 동물처럼 강렬한 터치가 필요 없다. 따라서 표현에 있어서 침착성을 유지했다고 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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