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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16. 2023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플럭서스’

<워커 에번스를 모방하여(1981)>

당시 미술계는 뒤샹의 '개념 미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물며 대중은 어떠했겠는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1960년대 뛰어난 개념 미술가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조금씩 깨달음을 얻었다. 미술이 심미적인 것 외에도 다른 기능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미술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러자 작가의 역할은 작품에 희미하게 반영되거나, 작업의 주체가 아닌 작업 대상으로 바뀌었다. 작가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만드는 것이 모두 작품이 되었다.

심지어 셰리 리바인(Sherrie Levine, 1947~)은 워커 에번스((Walker Evans, 1903~1975)의 카탈로그 사진 22장을 그대로 찍어 발표했다. <워커 에번스를 모방하여>라는 제목의 차용 미술이다. 작가의 기호학과 사진에 풍부한 역사를 바탕으로 사진을 선택했기에 개념 미술이라는 주장이다. 


이해를 돕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추상 미술가 알 헬드가 “모든 개념 미술은 단지 사물을 지시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뒤샹의 <샘>이 그랬다. 뒤샹이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단지 변기를 가리켰을 뿐이니까. 

<의뢰된 그림(1969~1970)>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 1931~2020)가 헬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시하기’에 근거한 작품을 완성했다. <의뢰된 그림> 연작이다. 그는 도시를 걷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면, 친구의 손가락이 그 사물을 가리키도록(‘지시’)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시골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14명의 아마추어 화가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그림으로 완성했다. 이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누가 미술가인가? 전통적인 입장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린 14명의 화가다. 그러나 일련의 그림들은 이제 발데사리의 ‘작품’이다. (토니 고드프리, <개념 미술>) 

화가의 역할이 부인된 채 실행이 아니라 발데사리의 ‘개념’에 저작권을 부여한 것이다. 음악으로 비유하면, 연주자가 아니라 악보를 제공한 작곡자에게 저작권이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가수 조영남의 ‘대리 화가 사건’이 연상된다. 발데사리는 언어와 시각성의 문제를 탐구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는 회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주로 사진을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즈음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근대 이후’라는 시간상 배치가 아니다. 근대의 그 무엇이 종말로 가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이자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이면 무난하다.” 


‘미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되는 순간, 미술은 권위를 인정받고 권력으로 작동한다. 이런 권위에 경고음을 표현한 인물 중에는 의외로 음악가가 한 명 있다.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가 그 장본인이다. 작곡가이자 미술가이며 교수, 작가이기도 한 케이지는 선종(禪宗) 불교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삶과 다르지 않은 예술, 그러나 삶 속의 행동’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플럭서스(Fluxus) 운동과 개념이 같다. 1960년대 초 플럭서스 운동은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함께 이후 개념 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탁의 매버릭 홀에서 이제 막 명성을 얻은 존 케이지의 신곡이 연주될 예정이었다. 전위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David Tudor)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려 4분 33초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처음에 연주하는 것처럼 한 번 손을 들어 올리고, 이후 두 번 더 팔을 들어 올린 것 말고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밖으로 나갔다. 표면상 피아노 소나타 3악장으로 되어 있는 악보에는 TACIT(조용히)이라는 글만 쓰여 있고, 오선지에는 음표가 하나도 없었다. 케이지는 곡이 연주되는 동안 빨간색 안락의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유명한 <4분 33초>라는 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히피조차 분노했다. 음악계에서도 음악에 대한 도전이라며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모욕과 조롱에 있지 않았다. 연주가 없었을 뿐이지 거기엔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객석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건기침 소리, 안내 책자를 만지는 소리···. 자연과 관객들이 바로 연주자였다. 케이지는 청중에게 자연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도 이렇게 <4분 33초>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수용했다. 이후 <4분 33초>는 장소를 바꾸어 가면서 종종 연주(?)되었다. 그리고 연주되는 곡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음악을 선사한다.


존 케이지는 1950년대 초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대학에서 개념미술을 근간으로 하는 ‘해프닝’이란 행위예술 집단에 속했다. 해프닝은 행위예술의 초기 형태로 예술과 삶, 행위자와 관람자의 경계가 없애고 모두가 참여자가 된다. 예술은 외연이 더욱 넓혀졌다. 그와 함께 라우센버그,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모임을 주도했다. 커닝햄도 신체의 움직임을 잠재적인 무용 동작으로 취급한 가운데 안무에 우연성을 개입시켰다. 즉 전통적인 발레처럼 무대 중앙에 무용수를 집중하지 않고 유동하는 분자처럼 무대 전체를 가로질러 움직였다. 그리고 주요 무용수와 나머지 무용단의 위계질서를 없앴다. ‘해프닝’의 대표자 격인 라우센버그는 "근친상간 격으로 배양된 그림보다는 바깥세상의 느낌이 아직 생생히 살아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유화 물감보다 거리의 오브제를 사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4분 33초>도 라우센버그의 작품과 같은 맥락에서 탄생한 퍼포먼스 아트이다. 존 케이지는 창문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내가 저 바깥의 소리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어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백남준의 <퍼포먼스(1960)>

훗날 케이지는 백남준(1932~2006)에게 영향을 미쳐 ‘비디오 아트’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케이지의 학생이었던 백남준은 독일 뒤셀도르프 캄머스필레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탁자 위로 세게 내리쳤다.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는 악기라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퍼포먼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하여(1962)>이다. 그는 이렇게 세상에 자기 이름을 드러냈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운동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플럭서스는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한 극단적인 반예술적 전위운동으로,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1931~1978)에 의해 출발했다. 기존의 예술, 문화를 불신했기에 미술 이외의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드는 혼합 매체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요셉 보이스를 비롯하여 라 몬테 영, 베르톨트 브레히트, 오노 요코가 마키우나스와 함께 했다. 

그중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1935~)이 추구했던 음악이 케이지를 닮았다. 그는 케이지를 알기 전 이미 버클리 음대 대학원 학생이었던 시절에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해 시작된 12음계법을 파괴하고자 했다. <현을 위한 삼중주(1958)>가 그것이다. 


“비올라가 올림 C의 단음으로 연주를 시작하고, 51초 후에는 바이올린이 가세해 77초 동안 내림 E의 단음조로 연주하여, 마지막으로 가세한 첼로가 D 음으로 연주를 시작해 102초 동안 지속한다. 그러고 나서 첼로가 먼저 멈추고, 42초 후에 바이올린이 멈추며, 48초 후에 비올라가 멈춘다. 삼중주의 첫 부분은 이렇게 5분이 넘는 동안 세 개의 음표로만 연주된다.” 

라 몬트 영, <봅 모리스에게 헌정한 제10번 곡(1960)>

쇤베르크는 바실리 칸딘스키가 그의 혁신적인 무조(無調, 장조나 단조의 규칙이 없는) 음악에 감명받아 편지와 함께 <인상 3(1911)>을 선물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쇤베르크가 어느덧 새로운 개념 예술가 영에 의해 도전받는 기존 음악가가 되어 있었다. 이후 영은 케이지처럼 비 음악적인 소리를 작품에 포함했으며, 청중과 공연자를 뒤섞었다. 그의 <작품들(1960)>은 연주할 수 없는 곡이었다. ‘제5번 곡’은 “나비 한 마리를 공연장소에 풀어 놓으시오. (···) 나비가 날아가 버렸을 때 곡이 아마도 끝나게 될 것이오”라는 지시문으로 되어 있다.

1960년 <봅 모리스에게 헌정한 제10번 곡>은 단순히 “직선을 긋고 그것을 따라가시오”라고 지시한다. 플럭서스의 전형적인 악보였다. 백남준은 이 퍼포먼스에서 토마토 주스와 잉크가 뒤섞인 통 속에 손과 머리와 넥타이를 담갔다가 바닥에 펼쳐 놓은 긴 종이 위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영은 백남준과 오노 요코 등의 퍼포먼스에서 나타나는 파괴적인 경향에 불만을 품고 그룹을 탈퇴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늘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라우센버그의 <첫 번째 그림(1961)>

개념 미술에서 미술과 음악 등 장르의 벽은 사라졌다. 라우센버그가 1960년대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저드슨 교회에서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한 ‘저드슨 댄스 시어터’에 참여했다. 이번에도 <4분 33초>의 데이빗 튜더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라우센버그는 반대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캔버스에 부착한 마이크 장치를 통해 붓 놀리는 소리, 문지르고 지우는 소리 등을 배합했다. <첫 번째 그림(1961)>이 그것이다. 무대에서 처음으로 그린 작품이란 의미로, 미술 작품에 내재한 시간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당신의 직관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겠는가? 터너의 그림에서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를 연상하고, 샤르댕의 정물화에서 빵 냄새를 맡는다면, 왜 소리라고 안 들리겠는가? 믿음만 존재한다면, 그의 그림에서 얼마든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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