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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11. 2023

새로운 차원의 서술, 피카소와 양자역학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

현대 미술의 출발점을 알린 작품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여인들>이다. 20세기 통틀어 가장 큰 찬사와 악평이 교차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집에서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1899)>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세잔의 다시선(多視線)과 사물의 본질 문제를 자기 독창성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이 볼 수 없는 방향까지 포함한 형태의 본질을 대형(243.9x233.7cm) 캔버스 평면에 펼쳐 놓은 것이다. 차원 하나를 더한 큐비즘(cubism, 입체주의)이다. 이로써 500여 년을 이어오던 원근법과 해부학을 마감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존 관습에 혁명적으로 맞섰다. 

아비뇽은 피카소가 어린 시절을 보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번화가 이름이다. 선원을 상대하는 밤의 여인이 즐비한 거리다. 붉고 파란 커튼을 배경으로 발가벗은 여인들이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팔꿈치를 위로 올려 젖가슴을 내보이며 손님을 유혹하거나,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있다. 왼편 세 여인의 누드에서는 세잔의 <대수욕도> 경향이, 오른편 두 여인의 모습에선 입체주의의 전형이 드러난다. 아프리카 가면에서 모티브를 얻어 원시를 상징하는 여인을 들쭉날쭉 평면으로 분할했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 피카소는 당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1916년까지 작업실 한구석에 있다가 개인 수집가 손에 넘어갔으며, 1925년에야 <초현실주의 혁명> 도판에 실렸다. (제목 그림; 피카소의 <우는 여인(1937)>)



피카소가 미술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을 때 물리학에서도 상대성이론과 함께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자 이하의 미시 세계에서 작동하는 양자역학이다. 1900년 베를린대학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흑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양자 가설을 제시했다. 양자(量子)란 에너지가 수돗물처럼 연속적으로 방출되거나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가설에 기초한 모든 이론이 양자 이론이며, 여기에 통합되지 않는 것이 고전이론이다.

1911년,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가 최소 입자인 원자의 내부 구조를 밝혀냈다. 원자는 중심엔 양전하(+)를 띤 핵이 있고, 그 주위로 음전하(-)를 띤 전자가 궤도 운동을 한다. 그런데 전자가 묘했다. 회전을 계속하면서도 에너지를 상실하지 않는다. 1913년,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전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불연속적인 특정한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새로운 원자 모형에 따르면, 양파 껍질과 같은 각 궤도가 고유의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전자는 바깥 궤도에서 안쪽 궤도로 점프(양자 도약)할 때 빛의 입자(광자)를 방출한다. 

상보성 원리를 나타낸 닐스 보어의 <태극 문양(1947)>

1927년 10월, 제5회 솔베이 회의가 ‘전자와 광자’를 주제로 브뤼셀에서 개최되었다. 초청받은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된다. 회의에서는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는 양자물리학의 두 가지 주류 이론이 발표되었다. 먼저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다. 입자의 위치를 알면 정확한 속도를 모르고, 속도를 알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전자의 최초 위치를 관측하려면, 빛을 전자와 충돌시켜야 하는데 이때 빛의 에너지가 전자의 속도를 교란함으로써 나타나는 불확정성이다. 초기 조건을 안다면, 입자의 운동 방향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역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보어 ‘상보성 원리’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 겉으로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 하나에 속한다는 개념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이 입자임에도 기묘하게 파동처럼 행동한다(양자 중첩)는 의미로 사용했다. 둘 중 하나이기를 고집하는 인간 앞에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닌, 혹은 입자이면서 파동인 모호한 존재’가 등장했다. 


다행히 극미 입자들의 행동 양식이 모두 같았다. 1925년 하이젠베르크가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의 도움을 받아 행렬역학을 통해 양자의 행동을 예측했다. 이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제시했다. 전자는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구름의 형태로 골고루 퍼져 있다. 따라서 파동의 크기(밀도)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다. 이로써 양자역학은 상반된 전제를 갖고 같은 결론에 이르는 두 가지 이론을 가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에너지 덩어리, 즉 광양자(혹은 광자) 실험으로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뒷받침한 바 있다. 처음엔 과학을 확률로 접근하는 양자역학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확률파동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확정성 원리 대신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는 쪽으로 논거를 바꾸었다. 그리고 ‘귀신이 곡할’ 논리를 과학이라 감싸는 ‘코펜하겐 해석’을 싸잡아 비난했다. 어떻게 하든 반대 논리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그의 거부감은 종종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출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파울 에렌페스트는 반(半)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난 자네가 부끄러워. 새로운 양자론에 대해 예전에 자네의 상대성이론 반대론자들처럼 반박하고 있네.”


아인슈타인은 어느덧 기성세대로 변해 있었다. 그는 거시적 관점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서술을 고집했다. 하지만 어쩌랴! 미시 세계는 그를 외면하고 있는데. 아인슈타인도 자기가 ‘늙은 바보’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위대한 과학자의 말년 모습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1931년 9월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를 다시 한번 노벨상에 추천했다. 추천서에 “양자이론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궁극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는 문장을 포함했다. 물론 불완전하다는 점은 양보하지 않았다. 

한편 입자성을 주장하는 자기 견해와 달리 “모든 물질은 입자와 파동(물질파)의 이중성을 갔는다"고 주장하는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를 격려했다. 선배인 플랑크가 상대성이론의 연구를 만류하면서 들려주었던 말, “하지만 계속하게! 자네가 가는 길이 옳으니 말일세”를 반복하면서. 1929년 드 브로이는 물질파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슈뢰딩거에게 영감을 주어 앞서 설명한 파동 방정식이 탄생했고, 그 역시 193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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