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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22. 2024

산티아고와 와인 이야기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 전경

국토 길이 4,270km, 칠레공화국을 대할 때 흔히 나타나는 인식의 오류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질이 4,400km로 조금 더 길다. 칠레는 태평양 해안 가까이 험준한 안데스산맥이 가로막아 국토의 평균 너비가 177km에 불과한 데서 오는 착시 효과라 할 수 있다. 

긴 국토는 북부의 사막 아타카마로부터 지중해성 기후 그리고 남부의 빙하 및 피오르(U자 곡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좁고 긴 형태의 만) 등 최소 7개 기후대를 포함한다. 하지만 칠레가 처음부터 이렇게 길고 큰 영토를 지녔던 나라는 아니다.


아르마스 광장 풍경 모음
1866년 조선이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침몰시켰다. 그러자 미국은 1871년 군함 5척과 1,200여 명의 병력을 보내 강화도를 침공했다. 신미양요라 한다. 이때 조선은 결사 항전하여 이들을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어릴 때 국사 교과서에서 마치 미국과 전면전에서 조선이 승리한 것처럼 배운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끼리 하는 얘기다. 당시 미군 정보 당국에서는 ‘이참에 추가 병력을 보내 조선 본토를 점령할 것이냐?’를 두고 정보판단을 했다. 결론은 "이쯤서 멈추자"였다. “산세가 조잡하고, 인심이 사나워” 실익이 없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남미 대륙에서 조선과 비슷한 형편에 처했던 국가가 칠레다. 칠레는 자원이 척박해도 매우 야무진 나라다. 15세기 잉카 제국에 대항하여 ‘남아메리카의 아파치’ 마푸체족이 치열한 전투 끝에 마울레강을 중심으로 남북 경계를 이뤘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스페인에 정복당하지 않고 원주민 공동체로 성장했다.

 

1541년 발디비아가 산티아고 건설 당시 건립에 착수한 대성당

한편 스페인은 1540년대 후반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1541년 산티아고를 건설한 후 페루 부왕령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당장 쓸만한 자원도 없는 차제, 사막과 지형이 험난한 칠레를 더 이상 공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1553년에는 토키 라우타로(Toqui Lautaro)가 이끄는 마푸체(Mapuche)족이 반란을 일으켜 발디비아를 생포, 살해했다. 서기 600년 이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오던 마푸체족은 체격이 컸으며 타 원주민보다 상대적으로 전염병에도 강했다. 매우 전투적이었던 그들은 19세기 후반까지 스페인은 물론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했다. 


누예바크 거리 공사 현장 / 지진이 빈번한 칠레에서 기술력을 상징하는 남미 최고층 빌딩(64층, 300m) '코네타네라 센터'

칠레는 독립 초기 현재 중부 지역에 고만고만한 면적의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초석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페루 및 볼리비아 연합군과의 태평양 전쟁(1879~84)에서 승리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북쪽으로 거의 1/3 수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볼리비아로부터 뺏은 북부 아타카마 사막 지역의 안토파가스타주에서 현재 비료와 화약에 사용되는 주요 광물인 초석과 함께 세계 구리 시장의 1/3 이상을 생산한다. 


광장 인근 칠레 국립대학교,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으며 그중 법학과 의학 분야가 뛰어나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30년에 걸쳐 마푸체족의 영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여 1881년에 완전히 굴복시켰다. 이때 카웨스카르, 오나 족 등 원주민까지 무력으로 토벌하여 파타고니아 지역과 섬들을 병합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칠레는 섬이 약 7,000개로 필리핀 다음으로 많다. 따라서 200해리 영해 적용 시 모아이로 잘 알려진 이스터섬 멀리까지 경계를 확장하고, 남극의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칠레 독립 정부 역시 또 다른 압제자였을 뿐이다.


칠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에서 선물한 '성모 마리아상'(산크리스토발 언덕 정상)


분지 형태로 공기 오염이 심한 산티아고 관광은 산크리스토발 언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듯 시내를 살폈다. 칠레 전체 인구의 1/3인 600만 명이 거주하는 산티아고는 동북쪽과 서남쪽 구역간 빈부 차이가 뚜렷하다. 남미에서 우루과이와 함께 선진국 수준에 가장 근접한 국가임에도 고물가와 함께 그들의 또 다른 고민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남쪽 빈촌(왼편)과 동북쪽 부촌 모습 대비

푸니쿨라에서 내려 행정기관이 밀집한 구시가지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s) 주변을 관광했다. '무장'이라는 뜻의 동일한 광장 이름은 페루 쿠스코에서도 만나게 된다. 스페인이 이곳에 무기를 쌓아 놓고 유사시를 대비했던 곳이란 의미다. 칠레의 정치,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해온 광장에는 현재와 과거, 원주민과 스페인인의 통합을 강조하는 조형물들이 사이좋게 들어서 있다.


정복자 발디비아 기마상과 그를 죽인 마푸체족 지도자 라우타로의 조형물
광장 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흉상, 그는 피노체트 쿠데타에 대항하여 마지막 연설 후 권총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기념비와 산티아고의 기초를 닦은 스페인 발디비아 기마상, 그리고 그를 죽인 라우타로의 형상이 상존한다. 라우타로는 마푸체족뿐만 아니라 모든 칠레 사람에게 용맹한 지도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추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스페인군으로부터 가족이 죽임을 당한 후 포로로 잡혀 왔다. 

그는 와신상담, 복수를 벼르며 발디비아의 마부에서 시작하여 발디비아의 최측근으로 성장했다. 스페인군의 전략전술을 익히고, 물자를 빼돌린 후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마푸체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투카펠 전쟁에서 마침내 발디비아를 죽였다. 하지만 자신도 스물세 살 아까운 나이에 마타퀴토 전쟁에서 삶을 마감했다.


모레노 대통령 궁 정문과 후문
대통령 궁 지하상가가 낯설다

과거 조폐국이었던 모레노 대통령 궁 지하에 상가를 조성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1990년까지 17년간 독재정치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대통령궁 지하에서만 공식적으로 3,000여 구 시신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통령 궁의 이미지를 바꾸고 국민과의 간극을 좁히고자 경호 문제를 무릅쓰고 상가로 개방했다. 


2004년 4월 1일, 대한민국과 칠레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대한민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이때 칠레의 수입품 중 가장 잘 알려진 품목이 바로 값싼 와인이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상류층에겐 와인이 고향의 향수를 음미할 수 있게 해주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아귀르가 처음 들여온 파이스(Pais) 품종을 중심으로 내수 시장에서 소비되는 정도였다. 19세기 중반, 필록세라(phylloxera, 포도뿌리혹벌레)라는 진드기가 유럽의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전환점을 맞았다. 


프랑스 와인 업자들이 포도나무가 멀쩡했던 칠레로 넘어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독재자 피노체트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와 산업 체계를 정립했다. 이에 힘입어 '남미의 보르도'로 불릴 만큼 칠레의 와인은 질과 양에 있어서 위상이 높아졌다.

칠레에는 다양한 기후를 품은 포도밭이 900km에 걸쳐 펼쳐진다. 특히 중부지방 위도 32~36도 사이 산티아고 부근에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이곳은 지중해성 온화한 기후를 보이면서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여 포도의 안정된 숙성을 돕는다. 

더불어 안데스산맥이 큰 역할을 한다. 험한 지형은 외부의 병충해를 차단하는 방벽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훔볼트(Humbolt)의 한기를 붙잡아 습기 없는 선선한 바람으로 곰팡이를 차단하고 포도를 서서히 익힌다. 더불어 물이 적은 남미에서도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이용한 관개 농법을 가능케 한다. 


와이너리 '콘챠 이 토로' 정문과 내부 입구
와이너리 내 본채와 연못

와인의 역사 이야기에 지나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한 듯하다. 얼른 ‘콘챠 이 토로(Concha y Toro) 와이너리로 공간 이동을 하자. 와이너리는 칠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산티아고 시내에서 45분 거리에 위치했다. 1883년 스페인 귀족의 궁을 개조한 곳으로, 미국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에 비해 압도적으로 규모가 컸다. 본채는 지진 때문에 장식물을 배제한 채 단순한 양식으로 지었다. 하지만 그 앞 프랑스풍 정원 주변은 나무 수집가의 취향을 반영하여 진귀한 풍경을 창출한다.


'카시에로 델 디아블로' 입구와 동굴 지하 저장고

백 년 전통을 이어오는 ‘악마의 와인 저장고(카시에로 델 디아블로)’가 압권이다. 스페인군이 만든 지하 도주로를 활용한 저장고인데, 보관 중이던 최상급 와인이 도둑맞는 것을 보고 악마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후 도둑이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저장고의 불을 끄고 그 벽을 화면으로 삼아 와이너리의 짧은 역사물 한 편을 감상했다. 이색적이었지만, 콘텐츠는 조악했다. 대한민국 업체에 맡겼으면,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일행 모두 와이너리 측으로부터 시음했던 와인 잔을 선물 받았다. 식사 후 그곳 대형 매장에서 큰애에게 줄 가성비 높은 ‘EPU’ 한 병을 별도로 구매했다.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결재 대기 중인데, 막상 계산대 앞에 서자 카드가 먹히지 않는다. 계산원이 이리저리 방법을 동원했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잠시 당황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효녀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아들에게 줄 아버지 선물을 여동생 카드로 계산했으니, 아무리 부녀 사이지만 경우가 아닌 듯했다. 미안한 마음에서 딸내미에게 카톡으로 양해를 구했다. 답이 왔다. "여비도 못 드렸는데, 기회에 아빠 사시고 싶은 것도 맘껏 사세요." 기특한 녀석,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효녀가 틀림없다.

 

와이너리 정원을 꾸민 아라우까니아(왼편)와 꽃사과나무

한편 칠레에는 대한민국 소주와 같은 증류주 '피스코(Pisco)'가 있다. 남아도는 포도로 만들었으니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750ml 기준, 우리나라 돈 1만 원 정도의 가격이다.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는 서민의 술이다. 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38도에서 48도 사이로, 독한 편이다. 따라서 이곳 젊은이 사이에서는 레몬과 라임을 섞은 칵테일 '피스코 샤워'와 콜라와 섞은 '피스콜라'가 유행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브랜디 맛을 느끼려고 만들었다. 따라서 부왕령의 근거지였던 페루에도 당연히 같은 술이 존재한다. 오히려 페루의 항구도시 피스코에서 최초 생산되었기에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두 나라가 서로 '원조'를 다투는 형국이다. 이런 틈새에서도 칠레는 자국의 피스코가 와인 오크통을 활용하기에 맛이 상대적으로 부드럽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현지 가이드 루나 씨는 "마시는 것은 몰라도 사 가지는 말라"라고 권한다. 페루 입국 시 세관원이 발견하면, 압류당한다고 주의를 준다.

 

원조 문제와 관련 나에게도 판단이 있다. 그러나 함부로 단정할 사안이 아니다. 두 나라 관계자가 마주 앉아 피스코 한 잔 나누면서 해결될 만큼 가볍지도 않다. 태평양 전쟁으로 사이가 갈라진 두 국가 간 반목이 상당히 깊어 이 상황이 지속될 듯하다. 애주가가 아닌 입장에서 굳이 피스코를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 칠레 관광은 여기까지다. 둘러본 곳도 별로 없어 술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그 배경에 칠레의 기후와 역사적 특수성이 조금 채워져서 다행이다. 이제 칠레를 끝으로 남미의 유럽 이민 국가 여행을 모두 마치고, 원주민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볼리비아와 페루 관광만 남았다. 가자! 남미 '원조'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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