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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29. 2024

라파스에서 빚어진 문화 충돌

시내 풍경과 아니마스 계곡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시내 전경

칠레를 떠나면서 겪지 않았으면 좋을 경험을 했다. 여행객에게는 그 나라 출입국 공무원들로부터 받은 인상이 중요하다. 그들은 처음 혹은 마지막으로 대하는 그곳 국민대표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공항은 세계 여러 곳으로 가는 인파로 매우 북적였다. 입국 때와 달리 긴장감 없이 출국대 앞에 섰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직원이 내게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었다. 

볼리비아를 생략하고 그냥 "라파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 알아듣질 못한다. 여권에 탑승권을 함께 제출했는데.... 같은 질문에 두 번 더 대답했지만, 직원의 태도가 한결같다. 순간, 내가 그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의심했다. 허를 찔린 듯 당황스럽고, 뒤에 선 긴 줄이 신경 쓰였다. 이때 마침 출국대에서 조금 떨어진 뒷줄에서 "라파스"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하시는 일행 한 분이 교정해 준 대답이었다. 

그러자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고 통과시켜 준다. 그런데 그에게서 "아!" 하며 뒤늦게 내 답변을 이해했다는 표정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건 뭐지?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잖아"라는 생각에 미쳤다. 칠레와 볼리비아는 그야말로 상극이다. 아무래도 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이자 부국인 칠레인의 오만함이 볼리비아로 향하는 나의 여정에 딴죽을 걸었다고 규정했다. 공항 관계자의 덕목 '친절'이 사라지자, 칠레 전체에 대한 호감 역시 흐려졌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은 역으로도 적용 가능하다. 


시내 원경과 시장 그리고 케이블카

남미 최빈곤국 중 하나 볼리비아는 1879년부터 1883년까지 페루와 연합하여 칠레와 전쟁을 치렀다. 남미의 태평양 전쟁이다. 문제는 태평양 연안의 안토파가스타주에서 발견된 초석 개발에 칠레를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볼리비아 정부가 칠레에 25년간 무관세 혜택을 제공했으나 1878년 재정 형편이 악화되자, 계약을 어기고 칠레 기업에 수출세를 부과하고, 거부하는 이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그간 투자 및 개발을 전담해 왔던 칠레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칠레가 이에 강력하게 맞섰고, 볼리비아는 비밀동맹을 체결한 페루와 함께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당초 예상과 달리 칠레가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칠레에 빼앗긴 채 내륙국으로 전락한 볼리비아는 와신상담, 티티카카 호수에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호수에 해군이라? 현재 볼리비아 정세를 알려주는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약 3시간 비행 후 4,05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공항에서 내려, 해발 3,800m에 위치한 행정수도 라파즈, 아니 라파스에 들어섰다. 연민을 품고 도착한 이곳은 이전 남미 국가와 매우 다른, 생경한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 300만 주민의 집들이 고지대 꼭대기까지 빽빽하고 빈틈없이 들어섰다. 둘, 원주민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띌 뿐만 아니라 그들 상당수가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닌다. 볼리비아의 원주민 비중이 55%로, 남미 국가 중 제일 높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전통의상 포베라를 입고 봄빈을 쓴 여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원주민 대부분이 키가 작고, 몸집이 비대하다. 기압이 낮은 고지대에서 생활하면서 나타난 신체적 특징이다. 기압이 낮으면, 산소가 희박하여 혈액이 농축되고 적혈구 수가 증가한다. 그리고 물이 섭씨 80도에서 끓기에 음식을 기름에 튀겨서 익혀 먹어야 한다. 이런 식생활이 계속되면서 드러난 신체 변화다. 나도 컵라면을 팔팔 끓는 물에 넣어 봤는데, 면이 설익어 제맛을 내지 못했다.


산프란시스코 대성당 주변 풍경

출국 전 가장 우려했던 고산증 증세가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진다.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하며 이층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 투어에 나섰다. 도로가 좁아 버스가 가로수 나뭇가지에 부딪친다. 그러나 운전사는 익숙한 듯 괘념치 않고 이리저리 차를 몰고 손님들을 내리고 태우기를 반복했다. 


제일 먼저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산프란시스코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에선 선함이 묻어 나온다.


마녀 시장

이어 맞은편 한 블록 떨어진 마녀시장을 둘러보았다. 파는 재료들이 기괴하고 음침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사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사들이 길흉을 점치기 위한 재료들을 판매했었다. 원색으로 수놓은 시장 모습은 오히려 시내에서 가장 화려함을 뽐낸다. 관광지로 자리 잡으면서 여행자들을 위한 토산품이 많이 진열되었다. 나는 모가지가 삐쭉한 야마(라마) 인형을 샀다.


케이블카, 고지대 환경을 고려할 때 적절한 교통수단일 수 있겠다

라파스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운행하는 케이블카다. 신박하다. 무려 10개 노선으로 구성된 대중교통수단이다. 환승역에서 한 번 갈아탄 후 고지대를 넘어 반대편으로 건너왔다. 그곳 정류장에선 유리창에 글을 잔뜩 붙인 밴을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버스를 대체한 이곳 대중교통수단이다.


창문에 행선지를 써서 붙인 밴과 정류장 풍경

고산증은 갑자기 심해지나 보다. 방금 전까지도 유쾌했던 일행 한 분이 케이블카에서 내릴 때쯤 구토를 했다. 단순한 멀미인 줄 알았는데, 계속 어지럽고 고통스러워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도와드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냥 쩔쩔매기만 했다. 결국, 그분은 이튿날 볼리비아 여행의 백미인 소금 호수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평생을 두고 안타까워할 일이 고산증 때문에 생겼다.


방향을 바꿔 촬영한 하엔 거리

스페인 전통 양식이 그대로 보존된 하엔 거리(Jaen Street)를 지났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골목이다. 하지만 100m 정도 초입의 짧고 좁은, 그러나 이 예쁜 길은 과거 처형장이었던 무리요 광장으로 향한다. 스페인 식민시대에 붙잡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길을 지나 유명을 달리했다. 거리 이름 '하엔'과 광장 이름 '무리요'가 함께 독립운동에 몸 바친 사이다.


마마니 마마니 갤러리아와 또 다른 건물 내부 모습

역사의 한이 서린 이곳엔 작은 박물관과 함께 볼리비아 국민화가 로베르토 마마니 마마니의 갤러리가 위치한다. 2015년 한-볼리비아 수교 50주년 기념, 그리고 2017년 <어머니 지구 파차마마의 색과 안데스 세계관 전>을 통해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 20~30여 점이 소개된 바 있다. 

안데스 문화의 토속적인 요소를 잘 드러낸 작품들로, 강렬하고 생동감 있는 색채가 독창적이다. 이 골목에서 그의 갤러리는 씻김굿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기념으로 비싸지 않은 그의 직물 판화 한 점을 샀다.


의회 건물과 원형 시계
대통령 궁 전면과 한여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는 남반구의 이색적인 모습

무리요 광장 의회 건물 중앙 상단에 시계가 있는데, 볼리비아인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커다란 원형 시계의 숫자 방향이 거꾸로 새겨졌다. 기존 관행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향한다는 알레고리(우의)를 지녔다. “그래도 시간이 맞아야 할 것 아니냐?”는 일행 한 분의 지적이 있었지만, 이에 무심한 태도조차 오히려 서양 문명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긴 시간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개념도 아니고, 그래도 하루 두 번은 시계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가? ㅎㅎ 


아니마스 계곡.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 기괴한 소리가 난다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정권(2006~2019)이 들어서면서부터 전통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외부 관광객이 낯선 이곳 풍경을 대면하는 순간, 흥미롭다기보다는 먼저 문화적 당혹감에 봉착한다. 


계곡과 낡은 부락의 공존

관광산업 전반에 임하는 태도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노출한다. 관광지임에도 관련 정비에 무관심하다. 뾰족한 기암괴석이 장관인 아니마스 계곡이 그랬다. 버스가 입구로 진입하자, 주민이 임의로 돈을 받은 후 막대 차단기를 올려준다. 초입은 불쾌한 냄새로 진동했다. 부락민들이 계곡 안 낡은 거주지에서 가축을 키우면서 발생하는 분뇨 때문이다. 그리고 산 위 좁은 평지에는 억척스럽게 구황작물 감자 밭을 빠짐없이 조성해 놓았다.


계곡 위에서 감상한 전통 춤과 그 아래 지게차, 매우 상징적이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유명한 관광지 티티카카 호수 개발과 관련해서도 페루와 정책이 맞선다. 페루는 관광객을 유인하는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페루의 상업성을 비난하며, 인간과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환경 보호라는 생각이다. 파차마마 신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개조하는 대신,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발아래 축구장, 고산지대에서 벌어지는 홈경기 절대 강자 볼리비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 낄리낄리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빈부 격차가 적어 상대적 박탈감은 덜한 볼리비아. 칠레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심지어 파라과이에까지 영토를 뜯겼지만, 여전히 프랑스보다 넓고 한반도 5배 규모의 109만㎢의 영토를 갖고 있는 볼리비아. 

잠재력이 여전하다는 의미이며, 설익은 연민은 자칫 볼리비아인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래도 일행을 대신하여 더운 여름 날씨에 탈을 쓰고 고생한 공연단에게 팁을 준 분에게 "감사하다"라고 인사했다. 이후 나도 약간의 돈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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