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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y 13. 2024

생각이 많아졌던 볼리비아 여행

라파스 시내 풍경 두 컷

"없는 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존심"이라 했다. 하지만 볼리비아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이와 차원을 달리한다. 이곳은 이웃 나라보다도 남미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남달랐다. 그래서인지 1960~70년대 가난한 대한민국과 비슷한 외관을 지녔음에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구걸하거나 조악한 기념품을 강매하는 모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내내 소매치기 걱정 없이 시내 관광 등이 자유로웠다. 공권력이 빈약함에도 치안이 안정적인 이유 역시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볼리비아에서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현장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유니 시내 풍경

역사적 배경부터가 그랬다. '높은 페루' 볼리비아의 국명은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따왔다. 볼리비아는 1809년 라파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부왕(총독)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후 1825년 공화국을 세우기까지 16년간 전쟁을 벌였다. 에콰도르 키토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빨리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시몬 볼리바르를 모르고는 중남미 근현대사를 논할 수 없다. 에스파냐 바스크 가문 출신 '크리올(Criole, 스페인계 백인 후손)'인 그는 베네수엘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편 사망 후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하자 흑인 여종 이폴리타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절대권력의 한계를 절감했으며,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819년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그리고 높고 낮은 페루를 모두 독립시키자, 북부 해방 전선의 영웅에서 남미의 국부로 떠올랐다. 그러나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묶는 ‘그란(대) 콜롬비아공화국’이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로써 미국과 유럽의 간섭을 차단하고 중남미 대륙의 패권을 통합하겠다는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이후 볼리바르는 대통령직을 의회에 반납하고, 거액의 연금 지급 제안도 거절했다. 그리고 빈곤 속에서 살다가 1830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달의 계곡'에서 팁을 받은 악사가 답례로 음악 대신 독수리 자세를 취했다

아르헨티나 의사였던 체 게바라도 이곳에서 죽었다. 쿠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 이어 볼리비아 혁명에 가담했다. 독립 이후 볼리비아에는 185년간 200여 차례 정변이 일어났다. 민간 정부의 통치 기간이 40여 년에 불과하고, 나머지 전체가 군사정권 기간이었다. 체 게바라는 1964년 쿠데타로 등장한 바리엔토스 군사독재와 싸웠다. 그러나 볼리비아 민중은 그를 외부인으로 대했다. 마치 러시아 혁명 당시 유대인 트로츠키처럼. 1967년 결국, 그는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산 크리스토발 성당

볼리비아에서 현실과 이상 간 괴리는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현장은 뜻밖에도 우유니 호수 관광을 마치고 이튿날 들른 해발 3,775m 산크리스토발(San Cristobal) 마을 성당에서 확인했다. 일본이 이곳에서 세계 세 번째로 커다란 은 광산을 개발하면서 조성된 200 가구 정도의 포토시주 내 마을이다. <위키백과>에서 지명으로 산크리스토발을 검색하면, 도미니크,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에 밀려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한편 지금의 광산 개발권은 독일(혹은 미국) 기업에 넘어갔다고 한다.


라구나 빈토와 홍학(플라밍고)

우유니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된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라구나 빈토로 향하고 있었다. 호수와 서식하는 플라밍고 모두 붉게 물든 아름다운 호수다. 그러나 일행 중 상당수가 고산증과 피곤이 누적되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에서 4시간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그것도 쾌적한 버스가 없어 소금 사막 관광에 이용했던 지프로 이동했으니 즐거워야 할 여행이 짜증스러워졌다.

 

산크리스토발 마을

잠시 쉬어 갈 겸 휴게소처럼 들른 산크리스토발 마을에서 볼거리라곤 달랑 성당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문이 닫혀 18세기 금박 제단화와 종교화로 가득한 내부를 둘러보지 못했다. 외양은 처음 16세기 르네상스 후기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본채와 두 개의 종루 모두 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든 작은 규모의 성당이다. 당연히 수준이 높아진 우리 일행의 눈에 찰리 만무했다.

다만 광산 가까이 있다가 옮긴 성당의 현재 위치가 원래 잉카 시대 당시 제단이어서 그랬을까? 이전 시 인신 공양 문제로 1년간 공사가 지체되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현지인들은 쉬쉬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인신 공양 의식이 치러진 것으로 짐작한다.


페루 오얀타이탐보 지붕 위 소와 성수 형상, 그리고 집안에 모셔둔 조상의 해골. 그들은 복을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신앙한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Pachamama)는 잉카 토템문명에서 제물을 바치고 섬기는 신이다. 제국 왕족의 최고신은 태양신 ’인티’였지만,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농민들은 안데스산맥을 품어주는 파차마마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땅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여긴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성모 마리아를 자애로운 파차마마와 연결하여 수용할 뿐이다. 자연보호도 여신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려 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대륙의 절반을 지배했던 잉카 제국은 지금 사라졌다. 그러나 남미 원주민 대부분은 파차마마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

인신 공양은 정부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난 부락 공동체의 권위가 작동한 듯싶다.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제삼자 입장에서 그들의 토템 신앙을 일방적으로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인신 공양은 분명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서 벗어난다. 요즘도 간간이 뉴스에서 인신 공양 문제가 등장한다고 하니 볼리비아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해묵은 과제라 할 수 있겠다. 


지나는 길에 들른 전망대와 록 밸리

해발 4,170m 전망대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기암괴석 지대 ‘록 밸리’에서 잠시 내렸다. 라파스 시내 '달의 계곡'보다는 감상 포인트가 훨씬 많은 곳이다. 달의 계곡은 닐 암스트롱이 달을 다녀와 골프를 치다가 "달의 표면을 닮았다"라고 하여 뜬 곳이다. 그러나 달 표면을 체험하지 못한 외부 관광객 입장에서는 이곳이 왜 관광지가 되어야 하는지 뜨악할 뿐이다. 그만큼 시내 가까이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유적지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닐 암스트롱이 운동한 골프장과 '달의 계곡'. 사진에 속지 마시라

하지만 록 밸리의 햇볕은 뜨거웠고, 여유를 지닌 채 둘러볼 만한 그늘은 없었다. 버스는 채근하는 우리를 부지런히 라구나 빈토까지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미 풍경에 관심을 잃은 일행은 잠시 관심을 두는 듯하더니 금세 귀가를 보챘다. 


라구나 빈토 풍경 하나 더
라구나 카탈과 야마 떼

결국, 라구나 카탈(검은 호수)을 제외하고 모든 일정을 생략한 채 우유니 숙소로 되돌아왔다. 모두 소금 사막에서 1~2시간 거리에 있었다면, 꽤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패키지 관광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높은 사막 지형이면서 상호 멀리 떨어졌고, 운송수단도 쾌적하지 않아 제대로 대접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 일행은 브라질을 출발점으로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안락한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다. 최초 거친 남미 여행을 계획할 때 다졌을 각오가 상당히 바스러졌으리라. 여행은 즐거워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인지는 각자 개인의 몫이다. 이래저래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하는 볼리비아 여행이었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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