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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y 20. 2024

페루 쿠스코에서 잉카 멸망을 되짚어 본다




수목한계선이 선명한 사진 한 컷

구름 사이사이로 내려보는 잉카 제국의 수도, 태양신 인티와 탯줄로 연결된 '우주의 배꼽' 페루 쿠스코의 풍경이 생경했다. '수목성장한계선'이라는 개념도 하늘 위에서 벌거벗은 민둥산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실감했다. 산림 지역과 고산 툰드라 지역을 가르는 수목한계선, 그렇다고 그 위로 아예 나무가 없는 곳이 아니다. 다만 키 큰 수목 대신 키가 작은 나무만 있을 뿐이다. 대지의 신 푸차마마의 가슴골 사이로 드러난 황토색 강이 마치 시골길 비포장도로처럼 꼬불꼬불하다. 그러나 회색이 섞인 초록 안으로 물든 붉은색 지붕의 촌락과 옹기종기 모인 밭이 어째 낯익고 정겹다. 

갑자기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고도를 낮춘다. 그러자 허를 찌르듯 험준한 산이 정체를 드러내고, 도시가 얼굴을 불쑥 내민다. '공항이 지척인가 보다'라고 느낄 사이도 없이 가파르게 기체의 바퀴가 활주로에 부딪힌다. 이런 급착륙은 ‘낮은' 페루지만, 쿠스코가 6,700km 길이의 안데스산맥 중앙 해발 4,000m 고지에 위치한 까닭이리라. 


볼리비아 라파스를 출발한 일행은 신도시 리마를 경유, 이곳에 도착했다. 페루의 수도 리마는 스페인의 침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고산증을 피하고자 건설했다. 리마는 태평양 해안을 연해 건설했기에 평균 고도 154m로 낮은 편이며 적도 근처지만, 훔볼트 한류로 인해 연평균 기온이 섭씨 20도 정도로 쾌적하다. 현재 인구 1,300만 명 정도가 모여 산다.


퓨마의 얼굴에 해당하는 '삭사이와만',
수레도 없이 250톤이나 되는 돌(오른편)을 날랐다. 석조 기술과 함께 당시 고단한 노동 현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532년 피사로가 잉카 제국에 발을 디뎠다. 코르테스가 2년 전 아즈테카 제국을 점령한 것에 고무된 그는 휘하에 군사 185명, 대포 1대와 말 30여 마리로 원정대를 꾸렸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속속 보고를 접했다. 황제는 스페인의 적은 병력 규모에 위기감을 못 느낀 듯하다. 대신 “꼬리가 길고 쇠를 빨아먹는 짐승(말)과 천둥 번개 치는 무기(총)”에 호기심을 가졌다. 험준한 이곳도 이집트처럼 주요 동력은 덩치가 작은 나귀였다.

잉카는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북서 아르헨티나, 북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 남부를 아우르는 방대한 제국이었다. 최초 5만 명의 잉카 병력을 본 피사로는 정면 대결을 피하기로 작정했다. 정중하게 머물 곳을 요청했고, 황제는 삼면이 닫힌 공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큰 빚을 지면서까지 이곳으로 온 피사로였다. 그의 의중에는 애초부터 안정적인 정착엔 관심이 없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인에게 밝혔던 것처럼 피사로 역시 이미 "금으로만 나을 수 있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차례 공격으로 끝장을 보려고 매복 작전을 선택했다.

11월 16일, 회담 요청을 받아들인 황제가 해발 2,750m 안데스 고원 카하마르카(Cajamarca) 광장에 나타났다. 먼저 신부가 갑자기 성경책을 내밀며 황제에게 개종을 권유했다. 의미를 모르는 황제는 뿌리쳤고, 성경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신부가 외쳤다. 


“이교도가 감히 우리의 성경책을 내던졌다.” 


이 말이 신호였다. 스페인 177명(혹은 168명)이 잉카 제국 신하 및 군사 1만 명을 향해 일제히 총과 대포를 쏘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두 시간 만에 잉카인 7,000명이 죽고,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혔다.


탐보마차이. 수원을 감춘 채 축조한 관개 시설로, 뛰어난 건조 기술에 감탄한다

반면 스페인 군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당시 인구 600만 명, 2년간 내란 끝에 정권을 잡은 서자 출신 아타우알파의 예하 군사력 수준은 간단치 않았다. 1만 명이 맨몸으로 저항했어도 피사로 군의 피해는 상당했을 것이다.  실제 벌어진 일일까? 현지 역사에 대해 공부가 깊은 가이드 지수일 씨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잉카 제국의 멸망 원인을 <총, 균, 쇠>라 했지만, 적어도 이 순간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일반화했다. 당시 잉카인들은 스페인 군의 벼락같은 총성을 ‘천둥·번개의 신’이 강림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땅에 바짝 엎드려 벌벌 떨기만 했다. 스페인군은 재래식 소총으로도 정조준하여 사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지 선생은 재현을 통해 당시 66명의 소총병이 낸 굉음의 세기를 산정한 결과, 150 데시벨(항공기 이륙 시 소음과 비슷) 정도였다고 알려주었다. 이 정도 크기의 소음을 들어본 경험도 없던 잉카인이, 그것도 느닷없이 들려온 엄청난 소리를 종교적 메시지로 잘못 인식하기에 충분했다는 분석이었다.

당시 중세의 유럽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지도자가 백성의 종교까지 결정했던 시대였다. 잉카 제국의 종교이자 통치 이데올로기가 일거에 무너지자, 제국의 백성들은 처음에 당황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초의 삶에는 중단이 없다. 게다가 마야, 아즈텍, 잉카 안데스 3대 문명에서 창조주가 ‘턱수염이 있는 백인의 형상(바이킹 추정 가능)’이었기에 스페인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럽게 민중 속으로 스며드는 데 한몫했다.


'미로'라는 뜻을 가진 유일한 자연석 바위 동굴 켄코(Quenco). 신에게 제물을 바친 후 미래의 길흉을 점쳤던 곳이다

감금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자신을 풀어주면 가로 3.6m, 세로 6.7m, 높이 2.7m 큰 방을 황금 보석으로 가득 채워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안데스 문명의 흔적이 담긴 예술적 위업이 담긴 금붙이를 모두 녹여 황금 6t, 은 12t의 주괴로 만들었고, 보석 60 상자를 모았다. 

그러나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이자, 피사로 군 내부의 탐욕을 부채질했다. 결국, 황제는 몸값과 상관없이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뒤늦게 잉카인들이 저항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스페인 군을 지나치게 순진하게 접근한 듯하다.


'붉은 요새' 푸카푸카라
유적지에서 본 쿠스코 시내와 식당

잉카 문명의 우수성은 남아 있는 유적지가 거의 없기에 성과 건물 벽 축조 기술을 통해 간신히 추정한다. 이때 대표적인 기술적 지표가 11각, 12각 돌이다. 벽돌은 기계적으로 네모반듯한 것이 효율적이다. 그런데 왜 커다란 돌을 수고스럽게 깎아서 많은 각도를 내어 쌓았을까? 지진이 많은 이곳의 지형적 취약성을 극복코자 발달한 기법이다. 각도가 다양할수록 그만큼 단단하게 맞물려 웬만한 진동에도 끄떡없다.

그러나 면도날조차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다듬은 벽면이 무려 12각이나 된다는 점은 매우 놀란만 한 일이다. 석회석이나 시멘트 같은 접착제 없이 비정형적인 커다란 돌을 하나하나 쌓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처음에는 "외계인이 지은 것 아니냐!"라는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외부에서 2차원적으로 보았을 때 각이 이 정도라는 뜻이다. 벽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또다시 각을 추가해야 한다. 돌 안으로도 각을 내 벽을 꿰맞추었기에 20, 30 각도가 얼마든지 나올 만하다. 이런 경이로운 축조술의 비밀과 관련해 여러 가지 추정이 나돈다. 그중 나는 이곳의 지질학적 특성, 즉 돌이 물러 복잡한 형태로 제작할 수 있었고 세월이 흘러 굳어지면서 비현실적인 다각형 축조가 가능했다는 데 한 표 던진다. 


삭사이와만 11각 돌과 유명한 로레토 길 12각 돌(오른편)

쿠스코 시내 뒤편 '잉카 최후의 요새' 삭사이와만(Saqsaywaman), '붉은 요새' 푸카푸카라(Pukapukara), 제관이 몸을 정갈하게 닦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스러운 샘물' 탐보마차이(Tambomachay) 등지에서 이런 축조술이 발견된다. 이 유적지 모두 인근에 모여 있어 탐방이 편리하다.


코리칸차 신전 위에 세운 산토 도밍고 성당 내부 촬영

정치와 경제는 문화를 떠받치는 하위체계다. 따라서 다른 침략 제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도 식민지 잉카 문화를 말살하고 그들의 문화로 대체했다. 장기적이지만, 매우 지능적인 지배 수단이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 성당 건설도 그 일환이다. 

쿠스코 광장 주변, 태양신 인티를 모시는 대신전 코리칸차 위에 세운 산토 도밍고 성당이 지었다. 그리고 비라코차 신전 위에 세운 대성당과 와이나까빡 궁전터에 세운 라콤빠니아 성당이 광장을 대표한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신앙체계를 뒤바꾸어 놓기 위함이다. 이곳엔 성당이 무려 13개가 들어섰다. 그중 상당수에서 잉카 신전 하부 구조가 그대로 노출된다. 


왼편 대성당과 라콤빠니아 성당

일제가 조선의 경복궁을 가로막고 지었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떠오른다. 독립이 아닌 해방 후 이곳은 국회의사당→정부종합청사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었다가 1996년에야 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복원됐다.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왜 빨리 철거하지 않았느냐?"라고 기성세대를 나무랄 수 있다. 아니다. 이승만 정권 때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려 했다. 그러나 철거 비용이 정부 1년 예산보다 많이 들었다.

 

오늘날 선진국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지녔던 패배 의식이 사라졌다. 당당해서 보기 좋다. 그러나 역사의식까지 사라지면, 민족적 불행은 반복될 수 있다. 일제가 북한산에 쇠못을 박아 민족정기를 끊어버리고, 조선의 궁궐을 개조하여 동물원(창경원)을 만들어 분뇨 냄새로 가득 채웠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에 정정당당하되, 역사는 뼈에 새겨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스페인의 무도함이 일제의 폭력성보다 조금 점잖았다'라는 평가는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한가한 태도이다. 


광장 내 아랍식 발코니를 가진 건물. 아래 검은색 맥도널드 상표가 이채롭다. 엄격한 문화재 관리 체계를 보여준다

실제 스페인 통치 시절 두 차례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러자 성당은 무너지거나 하중으로 인해 돌 틈 사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잉카인이 지은 벽과 기반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무력을 제외하곤 스페인의 문명이 잉카의 그것에 비해 결코 선진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문명의 기준에 획일적으로 고급이 있고, 저급이 나뉘어 있을까?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의 당위성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작위적 분류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카메라는 옆에 있는 카메라다." SD카드에 이상이 생겨 상당수는 핸드폰 카메라로 풍경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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