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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y 27. 2024

‘작은 마추픽추’ 피삭+오얀타이탐보

피삭 정상과 그곳에서 근무하는 현지 경찰관

페루의 잉카 유적지는 볼리비아에 비해 운이 좋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멀지 않은 지역에 밀집해 있다. 제일 먼저 쿠스코 북방 약 20km 지점, 우르밤바강 상류 유카이 계곡에 소재한 피삭(Pisaq)을 찾았다. ‘성스러운 계곡’의 시작점이다. 

우르밤바강은 아마존강의 상류에 위치한다. 세계에서 나일강 다음으로 긴 아마존강이라고 하면, 대부분 브라질을 떠올린다. 하지만 유역의 1/3에 해당하는 상류의 지류들은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 걸쳐 있다. 페루 남부 안데스 산의 빙하호에서 발원하며, 페루에서 아마존강 체험은 도시 이키토스가 유명하다.


알파카와 피삭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피삭 입구와 전경

피삭은 돌로 쌓은 성터로 둘러싸였다. 그 돌담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알파카 떼를 만난다. 다가가도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알파카는 양처럼 털이 복슬복슬하다. 풀어놓고 기를 정도로 온순하여 많은 관광객이 녀석들을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사진 촬영에 분주하다.


최초 남미에는 소나 말처럼 덩치 큰 동물이 없었다. 대신 이곳을 대표하는 동물로는 비쿠냐, 알파카, 과나코, 그리고 야마(라마)가 있다. 그들의 털은 모직물의 원료로 활용된다. 그중 만나기조차 어려운 야생의 비쿠냐 울이 최고급 소재다. 야생의 사나운 성격으로 인해 희소성이 있고, 덩치가 작아 한 마리당 500g도 안 되는 털을 생산한다. 반면 울이 가볍고 따뜻하며, 탄력성이 뛰어나 고가에 팔린다. 생각하는 것보다 가격 표시에 ‘0’이 하나 이상 더 붙는다. 

예전 대한항공 집안 여인이 언론을 통해 갑질을 사과할 때 입고 나온 비쿠니 털 코트가 무려 1억 원이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코트가 위화감을 주어서 그랬는지 당시 그녀의 사과는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공감받기 어려웠다. 다른 울 제품 역시 귀하다. 비쿠냐 다음으로 대접받는 것이 바로 알파카 털로 만든 원단이다.

 

지붕 보수 작업(왼편) 중인 인부의 표정이 밝다

혼자 여행 온 미안함에 아내에게 선물할 알파카 머플러 한 장을 샀다. 해외 나와 선물을 사가면 한 번도 칭찬받은 적이 없다고 툴툴거리자, 여성 일행분들은 입 모아 "그래도 사가라"라고 조언한다. "여자 마음은 여자가 잘 알겠지"라는 믿음으로 한 번 더 저질러 보았다. 다행히 귀국하여 전해 주자, 이번엔 "괜찮네"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간 내 구매 감각이 문제였나 보다.

그런데 여자들은 조금 귀하다 싶은 물건은 왜 집에만 모셔두는지 모르겠다. 사용을 많이 해야 그만큼 가치를 활용하는 것 아닐까? 알다가도 모를 것이 여자의 마음이다. 저승 갈 때 부자의 기준은 모아 둔 돈이 아니라, 쓰고 간 돈이라더라. 아내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습관처럼 무얼 그렇게 아끼려고만 하는지. 이제 자기를 위해 좀 쓰시라, 그 대신 잘 쓰면 된다. 나의 남미 여행처럼 ㅎㅎㅎ.


피삭의 계곡 아래로 층을 이루며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다랑이밭이 보인다. 이곳 5,000여 개의 계단식 밭은 과거 잉카 제국을 떠받치는 원동력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이집트의 역할처럼 원정을 위한 식량 보급기지였던 셈이다. 3,800m 경사지의 계단식 밭은 높이가 오를수록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기에 층별로 재배하는 작물이 다르다. 


모라이 전경

임업 시험장이었던 모라이(Moray)와 동일한 형태로 지어진 까닭이다. 둥근 원 형태(테라스)의 모라이는 140m 경사지에 수로를 갖추고 24개의 계단식 경작지로 구성했다. 밑바닥 원심의 지름이 45m 정도이고, 계단 너비는 4~10m, 대형 테라스 높이는 69m에 이른다. 아래층에는 옥수수, 위층에는 감자를 심었으며 새로운 작물 모종의 적응력을 실험하는 연구소 역할을 했다.


피삭의 석벽에 만든 돌계단(오른쪽)과 야생화가 동무한 모습

페루 고산지대에서는 우리 것보다 알이 훨씬 굵은 옥수수를 비롯하여 무려 400여 종의 감자와 퀴노아를 재배한다. 그중 퀴노아는 기원전 5000년부터 재배되었는데, 나트륨이 전혀 없는 슈퍼푸드로 인기가 높은 작물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4,800미터 무지개산에서도 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선인장과 야생화

돌벽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이름 모를 야생화와 선인장꽃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손님을 반긴다. 시골 소녀처럼 순박하면서도 참 예쁘게 생긴 꽃이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과 어울려 오래 머물고 싶은 충동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이곳엔 잉카의 신전, 창고, 주거지가 있다. 그래서 ‘작은 마추픽추’라고 부른다. 한가로운 마음으로 잉카인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오얀타이탐보 전경

그러나 마추픽추와 비교하기에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 성스러운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요새 형태의 거대한 석조물을 보고 바로 이것이지 싶었다.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오얀타이는 잉카 장군의 이름이고, 탐보는 숙소, 창고, 요새 등의 기능을 갖춘 역참 도시를 말한다. 


시장 위로 보이는 많은 임시 공용저장고와 산 중턱을 깎아 저장고로 가는 길
이곳에서도 일부 발견되는 불규칙 다각형 돌담(오른쪽)은 잉카 시대 손 본 흔적이다

장군은 잉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피차쿠텍 잉카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비천한 신분인 서자라는 이유로 결혼을 승낙받지 못했다. 그러자 장군이 임의로 공주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고, 이를 괘씸히 여겨 딸을 다시 찾아가려는 왕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사랑은 끝내 비련으로 막을 내렸다.


잉카 레일과 열차 내 상황극

사랑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제1의 주제다. 이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오얀타이탐보역을 출발하여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연극으로 펼쳐진다. 각 칸에 승무원인 남녀 한 쌍이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고, 흘러나오는 성우의 이야기에 맞춰 상황극을 한다. 페루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태양의 신전 정면과 측면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와 프레잉카의 유적이 혼재하는 곳이다. 쿠스코에서 북동쪽으로 97km 떨어진 해발 2,792m에 위치한다. 정글 속에 거주하는 안띠족 공격을 방어코자 만든 목적 도시다. 300 계단, 약 150m를 오르면, 6개 거석으로 만든 태양의 신전이 나온다. 6km 떨어진 곳에서 인력으로만 42톤의 돌을 끌어올려 정교하게 쌓아 놓았다.


오얀타이탐보 석조물 아래 아이와 마을과 토산품 시장

당시 왕권이 만만치 않은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거꾸로 생각하면, 스페인 침략 이전 민중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민초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지배자란 개념이 존재했을까? 더 나쁘고, 덜 나쁜 통치자만 있었을 뿐이라고 항변할지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종교가,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던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 Imagine>이 떠오른다. 지금도 영국 군가 중에는 '나는 군대 가기 싫어. I don't want to join the Army'가 존재하니, 상대적으로 영국은 트인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군대 가기 싫지만, 그 당위성을 받아들이면, 용감하게 싸우는 게 영국군이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검증되었다.


왼쪽 자연석 석조물은 프레잉카 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스페인 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했던 도시로써 전통도 지니고 있다. 피사로의 이복동생 에르난도 피사로 군대에 쫓긴 망코 잉카(Manco Inca)가 이곳으로 도망쳐 와서 작은 승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잉카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곳 오얀타이탐보를 피삭과 한데 묶자 비로소 ‘작은 마추픽추’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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