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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y 06. 2024

우유니 소금호수, 그 완벽한 데칼코마니

우유니 소금호수가 창출한 또 하나의 공간. 멀리 수평선과 산이 희미한 것이 규모의 장대함을 말해준다

잉카 제국의 일부였던 볼리비아 영토는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대부분을 포함하는 페루 부왕령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545년 4월, 해발 4,200m ‘세로리코’에서 세계 최대의 은광이 발견되면서 포토시(Potosi)를 건설했다. 라파스가 세워지기 3년 전 일이다. 임시 야영지였던 포토시는 1610년,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인구 16만여 명에 이르는 남미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이후 1780년대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41,000톤의 은을 생산하여 스페인 본토로 넘겼다.

그러나 원주민 입장에서 은광의 발견은 저주였다. 수많은 인원이 죽음만도 못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수은 아말감 제련법으로 인해 중독되어 쓰러졌다. 한 통계에 의하면, 무려 8백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가해자 스페인에도 행운으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막대한 부를 전쟁에 쏟아부었으며, 선진 금융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채 국가 부도로 유럽 삼류 국가로 주저앉았다.


왕년의 화려했던 포토시의 흔적이랄까? 인근 포토시 주(州) 우유니로 가는 길목에 ‘기차 무덤’이 있다. 1950년대부터 기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이후 운행량이 현저히 줄어들자, 볼리비아 정부가 폐열차를 사막에 버렸다.


'기차 무덤'에서 즐거운(?) 한 때

폐기차들이 시신이 즐비하게 널브러진 현장은 마치 미 서부 개척 시대로 시공간을 옮긴 듯했다.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그곳에서 일행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교 시절로 돌아가 기차 위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포즈를 취했다. 내 귀엔 "자! 떠나자.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라는 송창식의 <고래 사냥> 가사가 들린다.


소금 정제 과정 견학 후 들른 콜파니 기념품 상점. 온통 소금과 관련된 제품들이 전시되었다

호수로 가기 직전, 조그만 염전 마을 ‘콜파니’를 들렀다. 뭍에서 석탄을 캐듯 소금을 가져와 정제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곳은 소금으로 만든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연결된다. 하지만 콜파니 마을에겐 더욱 중요한 역할이 있다. 화장실이 없는 소금 사막에 가기 전에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다. 


소금이 빚은 세상

드디어 우유니 서쪽 끝 해발 3,656m에 모래 대신 소금으로 형성된 거대한 사막에 도착했다. 먼 옛날 이곳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알려주는 이곳의 수평선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총넓이 10,582㎢, 경기도와 비슷한 규모의 세계 최대 소금 사막이다. 소금의 총량은 최소 100억 톤으로 추산되며, 그 두께는 최소 1m에서 최대 120m까지 층이 다양하다. 따라서 이곳 관광은 버스가 아니라 지프로 이루어진다.

2019년에 발을 밟았던 두 번째 규모, 튀르키예의 핑크빛 투즈 괼(Tuz Golu) 소금 사막은 제주도 정도 크기다. 하지만 우유니 소금 사막이 유명해진 까닭은 규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막'이 '호수'로 바뀌는 자연의 극적인 신비를 체험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빗물이 있어야 가능한 기적이다. 


물은 지구에서 생명체 탄생을 도왔다. 또한 마술과 같은 상변화(相變化)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멀쩡했던 액체의 물이 기온이 섭씨 0도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기적처럼 고체인 얼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열을 가하면 끓기 시작하던 액체가 섭씨 100도가 되었을 때 역시 기적처럼 기체인 수증기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진다. 

오늘날 과학적 원리를 알고 보면, 별일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연철학자 탈레스의 눈에는 마냥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그래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일까?" 한 생각에 몰입하던 그는 물의 상변화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로써 그는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소금 사막과 소금 호수의 비교, 새로운 세상이다

물의 현란한 역할은 남미 관광에서도 이미 검증되었다. 브라질의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의 모레노 빙하가 그것이다. 이어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이곳에 몰리는 이유 역시 물이 연출하는 장관 때문이다. 우기에 빗물이 고이면, 발아래 새로운 차원 하나가 보태진다. 사막이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로 상변화를 하면서 신세계가 나타난다. 

이때 구현되는 데칼코마니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선 결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진귀한 전율이다. "진실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 아닐까?"라며 탈레스의 규정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기실 남미 여행을 계획했을 때 이곳 여름으로 일정을 택한 이유가 바로 우유니 소금호수에 있었다.


'다카르 랠리' 기념 조형물과 만국기

그러나 3~4명씩 나누어 지프를 타고 도착했을 때 안타깝게도 이곳은 메마른 소금 사막 그대로였다. 튀르키예 소금 사막에 남겨두었던 아쉬움과 겹쳤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어찌하랴! 눈밭처럼 펼쳐진 사막 위를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날 수밖에.


오른편 점심 준비 현장

다행히 일행은 2014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카르 랠리(매년 약 3주일간 12,000~14,000km를 달리는 장거리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렸던 곳을 중심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폭풍 같은 사진 촬영이 끝나고 현지에서 준비한 야마(라마) 고기와 라면과 김치 등이 곁들인 점심을 대접받았다. 

사막 한복판 뜨거운 햇빛을 막아줄 커다란 천막을 설치하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일일이 식사 시중을 드는 현지인들이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인천공항부터 동행한 인솔자는 "미리 다 계산했으니 팁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예전 베트남 여행에서도 들었던 말이다. 연이어 관광객을 인솔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다고 공감했다. 야마 고기는 다소 질겼으나 생각보다 맛있었다.


감동은 건기가 계속될 때를 고려한 플랜 B를 시행하던 중에 발생했다. 거대한 선인장으로 뒤덮인 물고기 섬 ‘잉카와시(잉카의 집)’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이곳은 일교차가 크고, 50m 사이로 비가 오기도 하고 햇빛이 난다더니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일행을 실은 지프는 방향을 돌려 순식간에 호수로 변한 현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리플랙션(반사). 이 역시 실제 체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척박한 볼리비아를 찾는 대다수 관광객이 이 독특한 풍광 하나를 보기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새삼 말이 필요 없었다. 너도나도 미리 준비해 간 장화를 신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멀리 급한 볼일을 보러 가는 사내들의 뒷모습도 멋지기 만하다 ㅎㅎ
현지 안내인들이 준비한 드론은 하늘을 날고

연못에 비친 제모습을 바라보며 자기애에 빠졌던 나르시스가 왜 회화의 기원이 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소금 호수 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인물화, 풍경화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이땐 원색의 복장이 제격이다. 어떤 이는 셀카로 발아래 세상에 자기 초상을 넣었고, 어떤 이는 현지 운전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동작을 취하며 별천지를 배경으로 집단 인물화를 남겼다. 마치 화가이자 모델이 되어 그렇게 나름의 이미지를 창출했다.


사진보다 실제 감동은 몇 배 더 강렬했다

나도 본능적으로 풀프레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간 무거운 짐이었던, 대단한 작품을 남기려는 듯 유난스럽게 보였던, 그리고 남미의 소매치기를 염려하여 각별히 조심스럽게 다뤘던 카메라가 그야말로 빛을 보는 순간을 맞았다. 금세 사라질 것이 염려되어 카메라 렌즈에 주변 경관을 마구마구 주워 담았다. 필름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간 습관처럼 망설였던 셔터를 아낌없이 눌러댔다. 한을 풀듯, 나중에 지우면 그만이라는 듯 숨 가쁘게 사진 촬영을 마쳤다.


해넘이, 독일 낭만주의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처럼 이원화된 구도로 자연의 '숭고'를 표현했다

현지 관광사 사장님도 큰 부담을 내려놓고 연신 벙글벙글 웃는다. 그러나 정신없이 일행과 휩쓸렸던 그는 다음날부터 평생 겪어보지 못한 기상천외의 ‘소금 알레르기’가 생겼다. 아무튼 잠시 내린 비로 이후 일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흥분한 가운데 물에 잠긴 잉카와시 섬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신천지를 즐긴 일행은 소금 호텔에 묵으면서 근처에서 저녁 일몰과 다음 날 아침 일출까지 차질 없이 맞이할 수 있었다.


해돋이와 해넘이의 색조 변화를 이젠 알 듯하다
쌀쌀한 새벽, 현지 배우의 촬영 모습(오른편)

고산증으로 내내 누워 있던 한 분과 뒤늦게 어지럼증이 심해진 일부 인원이 해넘이 구경 대신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잠을 잘 때 숨이 가빴지만, 큰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던 나는 이튿날 새벽 일정까지 모두 동참했다. 두껍게 옷을 껴입고 당도한 호수 사막의 새벽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그러나 잠시 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얻은 매력적인 일출 사진으로 그 수고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제 페루의 마추픽추만 온전히 볼 수 있다면, 이번 남미 여행은 완벽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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