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사비니의 여인들>과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1799년 6월 18일(프레리알 30일) ‘(5인 총재정부와 양원제를 기초로 한) 혁명력 3년 헌법’을 반대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주베르 장군을 끌어들여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정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대프랑스 동맹군이 맹위를 떨쳤다. '역사상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장군'이라 불리는 러시아 수보로프의 활약이 컸다. 그는 오스트리아 군과 합세하여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에서 이룬 성과를 몇 주 만에 완전히 망쳐 놓았다. 독일 지역에서는 카를 대공이 주르당을 연파했고, 나폴리를 점령한 영국은 네덜란드에서 군사 주도권을 장악했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연합 함대는 케르키라를 점령했다. 6월 말, 프랑스는 제노바와 리구리아해에 붙은 좁고 긴 땅을 제외한 이탈리아 점령지를 모두 빼앗겼다. 총재정부는 징병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대상자들이 전면 기피했다.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고, 군주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다.
반면 나폴레옹의 행운은 여전했다. 이집트 업적이 미화된 가운데 귀국을 앞둔 9월이 되자 상황이 호전됐다. 마세나가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승리했다. 스위스는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으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전략 요충지를 공략 중 갑자기 지휘관을 교체하면서 주춤하는 틈을 이용해서 거둔 승전보였다. (두 나라는 책임 문제로 서로를 거세게 비난했고, 이듬해 1월 러시아가 동맹을 이탈했다) 이어 미셸 네 장군은 라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기욤 브륀 장군은 네덜란드에서 영국-러시아 연합군에게 승리했다.
10월 9일, 나폴레옹이 프레쥐스에 상륙했고, 16일 파리에 도착했다. 이즈음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시에예스는 총제정을 폐지하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입헌적 절차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은 쿠데타였다. 최초 부베르 장군이 쿠데타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가 노비 전투에서 전사하자 시에예스는 모로에게 접근했다. 이때 모로는 '당신의 사람'이라며 나폴레옹을 추천했다. 귀국한 나폴레옹은 망설임 없이 시에예스와 손을 잡았다.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열병을 구실로 군대가 튈르리궁에 집결했다. 원로원은 양원의 의사당을 생클루 성으로 옮기기로 했고, 직전에 임명한 파리 지방군사령관 나폴레옹에게 책임을 맡겼다. 이튿날 생클루 성에서 양원을 열어 총재정을 해체하고 임시 정부를 구성해 새 헌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백인회 의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나폴레옹의 사령관 임명과 의회 이전은 위헌이며, 사퇴한 총재 대신 새로운 총재 정부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나폴레옹이 장군 여럿을 대동하고 의사당에 나타나 토론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의원들이 불법 행위라고 규탄하며 “독재자 타도!”를 외쳤다. 잠시 당황했던 나폴레옹은 의회를 지키는 근위대를 설득했다. 그들은 8월 10일 봉기 당시 스위스 근위대의 참혹한 최후를 떠올리며 겁을 먹었다. 나폴레옹 편으로 돌아선 근위대는 무력으로 의원들을 해산시켰다.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오백인회 의장인 뤼시앵 보나파르트가 발 빠르게 행동했다. 흩어진 측근 의원들을 붙잡아 와서 의사 정족수를 채웠고, 이튿날 새벽 2시쯤 양원에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총재정부를 공식적으로 청산하고 시에예스, 로제 뒤코, 나폴레옹 3명의 임시 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음모는 대중의 무관심과 군대의 결단력 덕에 성공했다.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검으로 사용하여 피라미드형 과두제를 기획했다. 하지만 "권력이야말로 나의 애인(J. 네루의 ≪세계사 편력≫)"이라고 했던 나폴레옹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12월 1일 비공식 3인 회의를 끝낸 다음 날 시에예스는 임시 통령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2월 12일에는 사실상 무제한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제1 통령으로 나폴레옹을 지명해야 했다. 10년 임기의 제1 통령이 내정과 외교·군사, 제2 통령은 법무, 제3 통령은 재정을 책임졌다. 1799년 12월 15일 혁명력 제8년 헌법에 의거 통치를 개시한 새로운 통령부는 “혁명의 애초 목적지에 도착했다”라며 ‘혁명의 완성’을 선언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1800년 2월 7일, 나폴레옹 개인의 신임을 묻는 형식으로 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재산 자격에 따라 투표권이 부여된 제한선거는 찬성 301만 1,007표, 반대 1,562표로 나폴레옹의 압도적 승리였다. 물론 조작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불확실성을 끝내고 안정을 희구했기에 일인 통치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군인 독재로 넘어갈 것을 예상했던 1792년 로베스피에르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독재권을 장악했으며, 프랑스 대혁명은 숨통이 끊어졌다.
이즈음 뤽상부르 궁전에 유폐된 화가 다비드가 복권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지내는 4년 동안 <사비니의 여인들>을 완성했다. 그림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정국의 중재자’를 자처했다는 오해를 샀다. 중앙에 흰옷을 입고 양팔을 벌려 전투를 말리는 여인이 적대관계인 사비니 타티우스의 딸이자 로마 로물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우스다. 그녀에 다비드를 대입하면, 공화정과 왕정의 중재역을 자임했다는 지적이 그럴듯했다. 소설가 스탕달은 고지식하게 "전쟁터에 발가벗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냐?"라고 조소를 보냈다. 그러나 유료 입장으로 전시한 그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비드는 그림을 그리던 중 면회를 오기 시작한 아내 마르게르트 샤를로트와 1796년에 재결합했다. 왕당파로 발이 넓었던 그녀는 마지막 5개월간 요로에 탄원서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남편이 석방되었다. 따라서 작품은 다비드가 아내에게 바치는 헌시이기도 했다. 1977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그림 속 헤르실리아의 얼굴로 우표를 발행했다. 관용과 화해의 정신은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적 메시지로 매우 유용하다는 방증이었다.
제1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대프랑스 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거부했고,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이용해 그는 국민의 적개심을 키웠다. 1800년 5월 15일, 나폴레옹 군은 해발 2,469미터 눈이 쌓인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수석 화가로 변신한 다비드가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1801)>을 통해 그의 영웅적 이미지를 부각했다.
구도를 사선으로 처리했다. 병사들이 대포를 밀고 올라가는 이곳이 가파른 협곡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 옛날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를 넘어 고대 로마를 침공했던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의 영웅적 기상과 연결했다. 왼쪽 바위에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새겨 넣은 이유다. 나폴레옹은 잘생긴 백마의 고삐를 쥐고 오른손을 뻗어 고개 넘어 목적지를 가리킨다. 붉은 망토와 말의 결기에서도 그의 진취적인 존재감이 뚜렷하다. 그러나 그림에서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은 절박감을 보여주는 그의 눈빛뿐이다.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1834)>가 오히려 고증에 충실했다. 알프스 고개는 말을 타고 넘을 수 없는 험지다.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 군은 4파운드/8파운드 포, 곡사포 각각 두 문씩을 소리 없이 끌었다. 노새가 제격이다. 암말과 숫당나귀의 종간 잡종인 노새는 인내심이 강하고 힘과 지능이 높다. 겁이 많은 말과 달리 피부도 단단하여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른다. 고대 이집트나 남미에서 절대적인 동력을 제공했던 가축이다. 그러나 다비드의 그림에서는 노새의 희생이 발견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다비드의 정치적 변절을 감싸 안은 대가로 얻은 그림이었다. 유의해야 할 점은 들라로슈의 작품도 풍자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웅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접근하려는 의도였다. (데이비드 블레이니 브라운, ≪낭만주의≫)
이후 프랑스 군은 천신만고 끝에 그해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물리쳤다. 마렝고의 승리가 없었다면 종신 통령도, 황제도 없었다. 승리는 이어졌고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와 뤼네빌 조약을, 1802년 3월 25일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혁명전쟁은 종료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혁명 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대폭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아미앵 조약 이후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영국은 몰타를 프랑스에 내줄, 프랑스는 영국 해상권을 겨냥한 전쟁을 멈출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