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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10시간전

총재정부의 혼란과 이집트 원정

앙투안 장 그로의 <야파의 역병 환자를 위문하는 보나파르트>

'평등파 음모 사건'은 혁명의 주요 가치 중 하나인 '평등'을 조직적으로 실현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1797년 2월부터 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5월 26일 주모자 바뵈프가 자살을 기도했고, 다음 날 피를 흘리며 단두대로 보내지면서 막을 내렸다. 사회는 급격하게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 의원 3분의 1을 보충하는 5월 선거에서 왕당파가 득세했다. 프랑수아 바르텔르미가 입각했고, 샤를 피슈그뢰 장군은 오백인회(하원) 의장으로서 공공연히 왕정복고를 조직해 냈다. 

바라스가 위기를 느꼈고, 이를 타개코자 육군장관 라자르 오슈 장군에 기댄 쿠데타를 기획했다. 오슈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왕실 마구간 조수로 일했으며, 병사로 입대해 방데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지휘관이었다. 혁명이 만든 진정한 군인으로, 나폴레옹조차 그를 '전쟁의 달인'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796년 아일랜드 침공 실패 후 명성에 타격을 입고 우울증을 겪던 중 스물아홉 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사라진 것이었다. 

바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 피에르 오주로에게 지휘를 맡겼다. 1797년 9월 4일, 오주로의 군대가 튈르리 궁을 포위했다.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 바라스는 의회를 겁박해 바르텔르미와 카르노의 체포 명령을 내리게 했고, 최근 선거 결과를 무효로 만들었다. 카르노는 탈출해 망명했지만, 바르텔르미와 피슈그뤼 등 63명은 ‘무혈의 단두대’라고 불린 기아나 유형에 처했다. 이듬해 선거에서는 좌파 신 자코뱅파가 대거 의회로 진출했다. 총재정부는 5월 11일(플로레알 22일)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신 자코뱅파 당선자 106명을 추방했다. 모두 대의제도의 권위를 떨어트리고 민심을 저버린 행위였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과 관련해서 몸을 사렸다. 대신 영국의 대(對) 인도 통상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택했다. 총재정부도 영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려면 이집트를 점령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총재들은 “몰타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중동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며,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고,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매년 공물을 보내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우호 관계를 확립하라”라고 지시했다. 

1798년 5월 19일, 보나파르트가 3만 8천 명을 이끌고 툴롱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과학자를 비롯 150여 명의 학술원 회원이 원정에 동참했다. 이집트의 문명화라는 사명에 충실한다는 선전용 동반이었다.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함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고 있는 사이 6월 9일에 몰타를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그곳 요하네스 기사단 내 프랑스 출신 기사 200명이 협조한 덕분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1796년 이탈리아 중서부 항구 도시 리보르노의 상실과 오슈의 아일랜드 침공 시도 이후 지중해에서 철수했는데, 나폴레옹은 그들이 다시 복귀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프랑수아 루이 조셉 와토의 <피라미드 전투(1798~99)>

하지만 넬슨은 눈에 불을 켜고 알렉산드리아를 향하는 프랑스 군을 추적했다. 다행히 경유지가 엇갈리면서 엿새 전 출발한 프랑스 함대는 7월 1일에 알렉산드리아 인근 마라부 해변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7월 10일, 드제의 선봉대가 나일강에 닿았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명목상 속령이었고,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맘루크라는 군사 엘리트들이 수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었다. 7월 21일, 나폴레옹은 맘루크 군과 전투를 앞두고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장병들의 전의를 부추겼다. (대문 그림: 장 레옹 제롬의 <스핑크스 앞에 선 보나파르트(1867~68)>)


“병사들이여, 저기 저 유적에서 4천 년의 세월이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역사적 소명 의식으로 무장한 나폴레옹 군은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했다. 7월 24일에 카이로에 입성했고, 지중해 동부 연안 레반트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8월 1일 프랑스 지중해 함대가 아부키르만에서 큰 재앙을 만났다. 넬슨의 공격을 받아 하루 만에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함정 13척 중 겨우 두 척만 살아남았고, 9천여 명이 전사했다. (조셉 커민스, ≪전쟁 연대기Ⅱ≫) 이때 몰타섬으로 도피했던 사령관 피에르 샤르 빌뇌브는 7년 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된다.

나일해전으로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군의 봉쇄는 빈틈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고립되었고, 물자 보급이 차단되어 사병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전투와 자살, 질병으로 병력이 가파르게 줄었으며, 10월 말 육군의 15퍼센트가 환자였다. 12월엔 선페스트로 인해 2천 명의 사망자를 냈다. 반면 1798년 12월 24일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튀르크 제국과 나폴리, 포르투갈도 참여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빈을 거쳐 귀국하겠노라” 장담(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했던 나폴레옹이 1799년 2월 10일 카이로를 떠나 시리아로 향했다. 아크레(Acre) 요새를 공격해 다마스쿠스군을 무찌른 다음, 에게해를 건너고 있던 영국 로도스 군과 대적하려는 의도였다. 건조한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은 겨울이라 해도 사람을 녹초로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는 살아남기 위해 끌고 갔던 노새와 낙타를 많이 죽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엘아리시 요새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거셌다. 열하루를 지체하며 3월 3일에야 야파(Jaffa, 텔아비브)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다시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도시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약속과 달리 착검을 착용해 수천 명의 포로를 죽였다. 일정 지체에 따른 초조감이 작동한 듯하나 역겨운 학살이며, 명백한 전쟁 범죄였다. 야파에서 머물던 3월 11일, 나폴레옹이 병원으로 사용되는 성 니콜라스 수도원을 찾아 병사들을 위문했다. 종군 화가 장 그로가 <야파의 역병 환자를 위문하는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장 그로의 <야파의 역병 환자를 위문하는 보나파르트(1804)>

감옥에 갇힌 스승 다비드가 <호라티우스의 맹세>에서 사용한 구성을 차용했다. 건물 밖 능선 위에는 삼색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하얀 포탄 연기가 피어오른다. 전황이 급박한데도 나폴레옹이 일부로 찾아왔다는 의미다. 전경에는 삶을 포기한 페스트 환자들이 널브러졌다. 악취가 심해 베르티에 원수가 손수건으로 코를 막는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담하게 병사의 환부에 손을 대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병사의 사기를 꼭짓점까지 끌어올리려는 제스처지만, 전염병임을 고려한다면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아 어두운 건물 내부는 물론 병사들이 마치 은혜를 입은 듯 환해졌다. 맨 오른쪽에 시력을 상실한 병사는 벽을 붙들고 기적을 간구하듯 위대한 장군에게 다가가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실제 현장과 다른 드라마틱한 묘사였다. 


나폴레옹은 아크레가 전투 없이 항복하리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저항을 받고 지체된 사이 3월 15일 시드니 스미스가 이끄는 영국 전함 티그레 함과 테세우스 함이 먼저 아크레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들은 프랑스 군으로부터 빼앗은 대포로 맹렬하게 포격했다. 63일간의 포위와 여덟 차례의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프랑스 군의 전면 공격은 결국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퇴각을 결정했다. 이때 2,300명의 부상병와 환자 중 일부를 아편으로 안락사 처리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진실을 덮고 승리를 꾸며내고자 주문한 나폴레옹의 의도가 반영된 작품이었다. 나폴레옹은 6월 14일 카이로로 물러났고, 8월 22일 클레베르에게 지휘권을 맡긴 후 프리깃함 두 척에 측근 500명을 태우고 이집트에서 탈출했다. “바지에 똥만 잔뜩 싸 놓은 채 떠났다”라며 배신감을 표명했던 클레베르는 1800년 6월 광적인 무슬림 손에 암살당했다.

작품은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1804년 12월 2일) 전 5월 18일부터 9월 18일 간 살롱 드 파리에 전시되었다.  조세핀을 통해 나폴레옹에 선을 댄 장 그로는 이 그림으로 인해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림을 본 많은 젊은이들이 “나폴레옹과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라는 각오로 전장에 임했을 것이다. 실정 모르는 프랑스 국민도 나폴레옹을 영웅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집트 원정의 성과로 1799년 7월 시리아 원정 당시 발견한 로제타석만 기억한다. 장 그로는 우울증으로 1835년 센강에 투신자살했다. 그의 주검엔 이 그림으로 인한 회한도 함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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