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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3. 2024

5인 총재정부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루이 프랑수아 르준의 <로디 전투에서 명령을 내리는 보나파르트>

1795년 10월 20일 선거에서 국민공회 의원은 379명만 재선 되었다. ‘3분의 2 법령’에 의거 나머지 121명을 억지스럽게 임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입법부가 구성되었다. 이어 500인회에서 제출한 50명의 후보자 중 원로원이 5명을 선출함으로써 10월 27일 총재정부가 출범했다. 폴 바라스, 라 루베리에르, 르 투르뇌르, 뢰벨, 그리고 극구 고사한 시에예스를 대신해 카르노가 선출되었다. 그중 바라스는 자코뱅 출신 전직 군인으로 테르미도르 반동을 꾸미고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한 인물이었다. 

총재정부는 가치가 절하된 아시냐와 조직이 무너진 군대를 물려받았다. 1796년 2월 19일, 정부는 액면가의 1퍼센트까지 떨어진 아사냐를 포기하고 새로운 지폐 ‘토지환’으로 대체했다. 인플레이션은 최고조에 달했고, 불만은 정부로 향했다. 좌파가 준동할 기회를 포착했다. 그라쿠스 바뵈프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재산의 공동체’를 제창하였다.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갖춘 최초의 공산주의 형태였다. 하지만 쿠데타로 공산주의를 현실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인 ‘평등파의 음모’는 동료의 밀고로 5월 10일 발각되었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혁명사≫) 군에 대한 정부 의존도가 높아졌다.


한편, 코르시카의 가난한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의 군 생활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소령이었던 그는 툴롱 탈환 작전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제 막 엘리트 집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즈음 테르미도르 반동이 터졌다. 자코뱅파였던 나폴레옹은 앙티브 요새에 투옥되었고, 군인으로서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무혐의로 결론 난 것은 다행이었으나 포병 병과 내 보직을 찾지 못하고 맴돌았다. 1795년 왕당파가 주도한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이 그를 도왔다. '단 한 줌의 포도탄'으로 반석 위에 올라섰다. 스물여섯 살에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국내 수비군 사령관이 되어 파리의 평온을 책임졌다. 

이즈음 프랑스는 프로이센 및 스페인과 바젤조약, 네덜란드와 헤이그조약을 맺음으로써 대프랑스 동맹에 균열을 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된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영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20만 명의 무장을 강화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군의 상태는 열악했다. 아니, 비참했다. 혁명정부의 와해, 통제 경제의 포기, 아시냐의 신용 파탄으로 군수품 제조업과 군 조달 체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징발한 물자가 정확하게 공급되지 않아서 빵이 부족했다. 병력 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1795년 3월, 서류상 110만 명이었지만 45만 4천 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0월 1일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령 벨기에를 합병하자,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는 세 방향으로 공격했다. 라인 방면 두 방향은 주르당과 모로가, 북부 이탈리아 우회 경로는 나폴레옹이 이끌었다. 이틀 전 후원자 바라스의 정부이자 여섯 살 연상인 조제핀과 결혼식을 올린 이탈리아 총사령관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11일 길을 나섰다. 그는 잘 먹지도 못하고 급여도 받지 못해 사기가 떨어진 3만 7천 명의 병력으로 니스와 제노바 사이에 있는 여섯 고개를 넘어 5만 2천 명의 오스트리아군을 쓸어버려야 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과 동맹군 피에몬테 군을 갈라놓으려 했다. 4월 12일 몬테노테 첫 전투를 시작으로 밀레시모, 데고, 몬도비에서 모두 이겼다. 


루이 프랑수아 르준 남작의 <로디 전투에서 명령을 내리는 보나파르트(1804)>

특히 로디 전투는 비싼 대가를 치른 후 힘들게 승리했다. 루이 프랑수아 르준 남작이 <로디 전투에서 명령을 내리는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르준은 프랑스에 석판 인쇄술을 도입한 화가로, 병사로 시작하여 장군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발미 전투를 비롯하여 나폴레옹과도 수많은 전투에 참전,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졌다. 

강 건너편 큰 나무 아래 흰말을 탄 나폴레옹이 손가락으로 적진을 가리킨다. 그러자 대포가 불을 뿜고, 많은 병력이 좁은 다리 위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그에겐 이 전투가 지니는 의미가 각별했다. “자신이 뛰어난 인간임을 깨달았고, 그때까지 공상적인 꿈으로만 간직해 오던 위대한 일을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야망을 품게 한 전투였다.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부대원도 일곱 차례 연승을 통해 자신들을 이끄는 장군이 승리를 부르는 자라고 믿게 되었다. 그가 ‘꼬마 부사관’이라는 애칭을 처음 얻은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5월 15일, 밀라노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겉으로는 이탈리아 통일의 사도처럼 처신했으나 뒤에서는 가혹한 금전 수탈을 저질렀다. 군대에 누적된 미지급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경화(硬貨, 구매력과 안정성이 뒷받침되는 돈) 200만 리브르를 거두어들였다. 병사들로서는 1793년 이후 처음 받아보는 현금이었다. 총재정부를 위해 강탈한 자금 역시 7월에 6천만 프랑에 이르렀다. 당초 이탈리아 원정은 부차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엄청난 전리품을 본국으로 보내자, 총재정부는 경제난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였다. 

원정에서 가장 큰 고비는 만토바 공성전이었다. 라인 방면의 프랑스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는 만토바를 배후에 둔 채 브레너 고개를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스틸리오네(8월 5일)와 바사노(9월 8일)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다고베르트 부름저 백작은 만토바 구도시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군은 주르당과 모로를 물리치고 전선을 뒤로 밀어낸 후 11월부터 이탈리아 방면으로 공세를 강화했다. 요제프 알빈치의 2만 8천 명 병력이 베로나, 다비도비치가 지휘하는 1만 8천 명이 아디제강 유역으로 각각 진출했다. 이들이 부름저 백작과 합세하면 나폴레옹으로서도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12일 베로나 외곽 칼디에로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아디제강을 건너 알빈치의 배후를 과감하게 공략하기로 했다. 11월 15~17일 사이 아르콜레에서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앙투안 장 그로, <아르콜레 다리에 선 보나파르트(1796)>

호레스 베른트와 앙투안 장 그로가 깃발을 들고 전투에 앞장선 나폴레옹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포장했다. 다비드의 제자 장 그로는 인물 동작과 투명한 색채감으로 훗날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폴레옹은 베른트의 그림(대문 그림: <아르콜레 다리에서 부대를 이끄는 나폴레옹(1826)>)에서 보이는 아르콜레 다리를 건너려다 늪에 빠져 익사할 뻔했고, 전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로디 전투의 재판이었다. 이로써 11월 말부터 오스트리아가 강화를 청하기 시작했다. 1797년 1월 14일 바르텔르미 주베르와 앙드레 마세나가 활약한 리볼리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2월 2일, 마침내 만토바가 성문을 열었다.

3월 29일에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4월 18일 개인 자격으로 레오벤 가(假) 조약을 체결하고 휴전에 들어갔다. 이후 10월 17일 총재정부가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을 마무리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라인강 좌안(左岸)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계속 보유케 되어 큰 불만이 없는 조약이었다. 정부로서는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회복하라는 훈련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지만, 전쟁에 지친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깨졌고, 영국만 남아 전쟁을 계속했다. 


총재정부는 67번의 작전, 18차례의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의 군대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군사적 성공의 요인은 크게 네 가지를 꼽는다. 포술의 발전,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의 동질성, 병사들의 우월한 사기, 전술가이자 전략가로서 나폴레옹의 재능이다. 그는 수학 능력이 탁월했고, 포술에서 유감없이 재능을 발휘했다. 게다가 부하들에게 철저한 보상과 격려의 언행으로 신망을 획득했다. 마지막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자면, 그는 운이 좋았다. 

반면 나폴레옹은 부하들의 약탈에 눈감았고, 추악하게 이탈리아 미술품까지 챙겼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혁명의 아들임을 자처했지만, 어느 전쟁에서도 약탈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폴레옹은 이제 총재정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정치권력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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