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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6. 2024

혁명정신의 급격한 소멸과 1795년 헌법

다비드의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

변호사 시절 사형제를 반대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요구한 것은 그만큼 당시 상황이 예외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더라도 공포정치가 공화국을 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파리에서만 3,000명 가까이, 전국적으로는 수십만 명이 처형당했다. 1793~1794년 대공포 정치 시기에 혐의자로 분류되어 투옥된 사람만 줄잡아 50만 명에 이르렀다. (콜린 콜스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특히 프레리알 22일 법이 제정되기 이전과 이후 45일간 처형자 수가 575명에서 1,285명으로 급증했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한 통계에 따르면 사형선고의 16퍼센트가 파리에서, 71퍼센트는 내전이 격심했던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신분 구성에서는 제3 신분이 84퍼센트를 차지했지만, 귀족은 8.5퍼센트였고 성직자는 6.5퍼센트에 불과했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혁명사≫) 특권계급은 이미 망명했고, 훨씬 몸조심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외의 결과였다.

다비드,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1788)>

처형된 인물 중에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포함되었다. 그의 죽음에는 라부아지에가 장 폴 마라의 과학 아카데미 회원 신청을 거부한 데 따른 앙갚음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1794년 그는 장인과 함께 처형되었다. 구체제에서 세금 징수 회사 페르므 제네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회사는 목표 이상의 이익을 징수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원칙 없이 대했다. 민중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분명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너무나 아까운 국가적 인재였다. 라부아지에는 남은 생을 연구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재판정에 요청했다. 그러나 판사는 딱 잘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공화국은 과학자도, 화학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의는 연기될 수 없다.”


다비드가 대혁명 1년 전에 완성한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는 마리 안이 주문했다. 다비드로부터 그림을 배운 그녀가 작품값으로 무려 7,000리브르(한화 약 10억 원)라는 거액을 지불했다. 열세 살에 라부아지에와 결혼은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니었다. 영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남편에게 화학과 수학을 배운 학구파였다. 영국 서적을 번역하여 남편의 '플로지스톤 논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화학 원론≫에 13개의 훌륭한 도판을 그려 후학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그림의 주인공은 라부아지에가 아니라 마리 안이라고 보는 게 옳다. (전창림, ≪미술관에 간 화학자≫)

한편 다비드의 아내 마르게리트 샤를로트는 왕당파였다. 그녀는 남편이 루이 16세 덕분으로 성공에 이르렀음에도 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중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그녀는 세 딸을 데리고 이혼을 선택했다. 다비드 또한 진정한 공화주의자의 심장을 지니지 않았던 듯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옥중에서 다비드에게 “당신이 독배를 들 수 있다면 나도 마시겠다”라고 했으나 (고산, ≪불편한 진실≫) 그는 로베스피에르와의 관계를 축소, 부인하며 생존을 선택했다. 이래저래 로베스피에르는 외로운 투쟁가였다. 1793년 9월 25일 국민공회에서 했던 그의 연설이 매우 인상적이다. 당시 그는 당통의 관용파에겐 급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에베르파로부터는 우유부단한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국민공회 내에서도 공안위원회에 대한 비판이 잦아들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이 우리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11개의 군대를 통솔해야 하고, 유럽 전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도처에 있는 배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야 하고, 외국 열강들의 황금에 매수된 밀사들의 활동을 좌초시켜야 하고, 불성실한 관리들을 감시하고 소추해야 하며, 가장 현명한 조치의 시행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족쇄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독재자와 싸워야 하고, 이전에는 재산을 통해 그리고 여전히 간계를 써서 거의 모든 강력한 특권적 지위를 보존하고 있는 모든 음모가에게 위압감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여러분은 행동의 통일 없이, 정부가 그 많은 장애물과 적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공안위원장으로서 그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낸 이 말은 의회에 울림을 주었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 집단 사임안을 만장일치로 철회했다. 이후 공안위원회가 의원들을 소환함에 있어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안정적이고 인기 있는 정부가 유지되었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또한 공포정치에 대해선 공안위원회 내 비요바렌과 콜로 데르부아 등이 훨씬 더 큰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들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획책자로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책임을 몽땅 전가했다. 


여하튼 로베스피에르가 토로했던 모든 고충은 이제 온전히 테르미도르파의 몫이 되었다. 베르트랑 바레르가 테르미도르 10일(7월 28일)에 공안위원회 이름으로 “권력의 원천을 되찾아 혁명정부의 힘은 백 배나 더 강해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통치의 안정성은 곧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레리알 22일 법령은 8월 1일 폐기되었다. 혁명재판소는 23일 재조직되었는데, ‘범죄 의도의 유무’를 기준으로 재판했다. 이로써 반혁명 의도가 없었다는 구실로 파리에서만 거의 500명에 이르는 혐의자들이 석방되었다. 

정치적 반동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바레르, 비요바렌, 콜로 데르부아가 공안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했고, 한 달 사이로 혁명력 2년의 정부 인사가 완전히 축출되었다. 공회 내 산악파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대신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기 위해 동맹했던 평원파가 의회를 장악했다. 전향한 공포정치가와 이탈한 산악파 인사로 충원된 평원파는 왕정복고와 민중 모두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우위를 되살리려 했다. 반혁명 혐의자의 재산을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려는 방토즈법을 폐지(8월)했다. 자코뱅 클럽을 폐쇄(11월 12일)했고, 혐의자 법과 최고 가격제를 폐지했으며, 지롱드파 의원 73명의 복권이 이루어졌다(12월). 


최고가격제를 포기하자 물가 폭등, 특히 식량과 땔감 가격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뛰었다. 그해 3월 파리에는 빵이 없었다. 마침내 1795년 4월 1일(제르미날 12일) 파리의 상퀼로트가 일어났다. 기근 구제책과 1793년 헌법 실시를 요구하며 국민공회를 점령했다. 그러나 무질서한 시위에 불과했다. 5월 20일(프레리알 1일)에는 훨씬 조직적으로 봉기했다. 3일간 시가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공회가 소집한 방위대에 의해 제압되었고, ‘마지막 산악파’ 6명과 봉기군 수백 명이 처형되었다. 최후의 민중 봉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서 상퀼로트가 몰락했다. 

반면 군대의 지지를 받게 된 부르주아 진영은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5월 31일 혁명재판소를 폐지했다. 그러나 백색 테러가 급속히 지방으로 확산하면서 이번에는 왕당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6월 24일, 루이 18세라 칭한 프로방스 백작이 베로나에서 국왕 시해파의 처형과 신분제·고등법원·교회 우위권의 재확립 등 앙시앙 레짐의 회복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반동에도 단호히 대응했다. 7월 21일 키브롱 반도에 상륙한 왕당파 군대를 섬멸하고, 영국 군복을 입고 무장한 채 잡힌 포로 748명을 반역자란 죄목으로 총살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8월 22일 국민공회는 ‘1793년 헌법’을 폐기하고 ‘공화국 제3년 헌법’을 채택했다. 새 헌법은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상원(원로원, 250명)과 하원(500인 의회)으로 이루어진 양원이 입법권을 지니는 체제였다. 재산에 기초한 제한 선거로 회귀했다. 전국적으로 직접세를 납부하는 21세 이상 남자, 즉 능동시민 약 3만 명으로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선거인 피선 자격 역시 최소 150일의 노동 임금에 해당하는 수입에 해당하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25세 이상이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왕당파의 의회 진출을 막기 위해 ‘3분의 2 법령’을 제정했다. 의석의 3분의 2는 반드시 현재의 국민공회 의원이 재선되어야 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호선 방식의 임명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당파는 선거 1주일을 앞두고 ‘3분의 2법’의 불법성과 관련 대대적인 반란(방데미에르 13일의 반란)을 조직했다. 2만여 명 이상이 국민공회의 의사당인 튈르리 궁을 포위했다. 진압에 나선 군인이 4천 명에 불과했으나 쌍방 모두 700명의 사망자를 낸 채 성공적으로 반란이 진압되었다. 이때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바라스 백작의 후원을 받는 공회 수비대 사령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대문 판화: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를 대포로 진압하는 나폴레옹(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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