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조제프 바라의 죽음>
1793년 방데 반란 당시 열세 살 조셉 바라가 경기병으로 참전했다가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라가 어린 소년임을 고려하여 ‘국왕 만세’를 부르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바라는 국왕이 아니라 ‘공화국 만세’를 외쳐 죽음을 자초했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모호하다. 어쨌든 혁명 정부에겐 어린 소년을 군인으로 받아들였고, 게다가 참전시켰다는 사실은 부담이었다. 따라서 바라의 죽음이 순수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변명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13살짜리 영웅은 프랑스에만 있다”라며 우상화를 도모했다. 마라에게 했던 것처럼 소년을 국가 영웅에 준한 장례식을 개최하고, 팡테옹에 안장하기로 했다.
다비드가 또다시 나섰다. 그는 현실성을 초월한 단색조 그림으로 <조제프 바라의 죽음>에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림 속 바라가 쓰러진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어느 황량한 지역이다. 솜털도 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혼자 벌거벗긴 모습으로 죽었다. 교묘하게 소년의 성기를 노출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에게 중성적 이미지를 유도했다. 성숙하지 않은 아이를 죽였다는 암시와 동시에 반란군이 아이를 강간 후 살해한 모습으로 비치길 노렸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죽어가는 소년의 손에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삼색 기장이 꼭 쥐여 있다. 다비드는 혁명의 목적을 위해 현장을 꾸미는 것쯤은 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화가의 창의성이며, 오히려 자신의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의 우상화 계획은 무산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체포되고, 이틀 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초의 혁명은 혁명가가 이끈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이 혁명가를 만들었다. 그중 로베스피에르는 오직 혁명을 위해 살았으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부패할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1791년 초부터 1794년 초까지 누구도 로베스피에르만큼 민중으로부터 일관되고, 깊고, 확고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진정한 근대’의 분기점인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만들어간 그는 혁명의 전범(典範)이었다. 그는 혁신적 논리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혁명을 이끌지 않았다. 용기와 정직으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모두가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의회에 대한 국왕의 거부권 부여나 수동 시민의 참정권을 제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혁명은 나무랄 것 없는 태도를 지녔던 로베스피에르마저 죽여야만 했을까?
혁명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동지와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에베르와 당통파를 제거한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점점 더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공안위원회 위원은 발족 당시 9명이었으나 그 후 18명으로까지 늘었다가 11명으로 줄었다. 다시 말해 11명의 손아귀에 혁명 정부의 독재권이 집중되었다는 의미다. 1794년 4월 16일, 경찰 업무와 혁명재판소를 지휘하던 보안위원회도 공안위원회에 종속되었고 지방 파견 위원들에 대한 감찰권도 일원화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부로부터 독재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개념과 차별성을 부여하여 ‘자유를 위한 독재’라고 했다. 그러나 독재는 독재다. 협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임에도 모든 책임이 로베스피에르 한 사람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지나치게 엄격했다. 좌우 양극단을 제거했다고 지지층만 남지 않는다. 마지막 두 명이 남아도 좌우 문제는 여전하다. 특히 당통의 관용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국민공회 내 다수 의원이 로베스피에르에게서 등을 돌렸다.
차제 프레리알 22일(6월 10일) 법을 둘러싸고 그의 독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 법은 재판에서 피고의 변호와 예비 신문을 폐지했다. 배심원의 심증만으로 유무죄를 결정할 수 있었으며, 혁명의 적에 대한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공포정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보안위원회와 사전 협의가 없었고,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았다. 국민공회 의원들 다수는 로베스피에르가 처음으로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로베스피에르가 "당파로서 산악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공안위원회를 구심점으로 단결을 강조하는 그의 의중은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에베르파를 처형함으로써 상퀼로트와의 결별을 가속화한 차제, 스스로 무장 해제를 선택한 형국이었다.
결정적으로 프레리알 24일(6월 12일), 국민공회 의원 대다수가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고발이 모호했다. 당파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음모를 비난하면서 대상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테르미도르 8일(7월 26일)까지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이때 8월 10일 봉기 코뮌의 일원으로 맹활약했으며, 공안위원회 위원인 장 니콜라 비요바렌이 반대파로 돌아섰다. 그는 로베스피에르가 독재와 함께 국민공회 법령을 위반했다고 공격했다. “침묵을 지켜 야심가가 저지른 대죄의 공범자가 되느니 차라리 나의 해골로 야심가의 옥좌를 만들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라며 기염을 토했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 혁명사≫) 결국,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8일, 국민공회 연단에 서서 마지막이 될 중대한 연설을 감행했다.
그는 정공법을 택했다. 혁명을 후퇴시키는 음모를 고발하고 부패한 의원들을 고발했다. 많은 사람을 반혁명 사기꾼으로 규정했으며, 심지어 공안위원회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보안위원회를 이 무리에 포함했다. 그는 국민공회에 존경을 맹세하면서도 ‘아주 작은 수’의 사기꾼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6주 전 자신의 독재는 끝났다. 조국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며 공안위원회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의 비난은 정곡을 찌르고 시의 적절했다. 그러나 해당 의원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를 또다시 거절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기존에 언급한 자신의 발언을 통해 대상자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양심에 찔린 많은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었다. 그들은 뭉쳤고, 로베스피에르는 의로운 한 명의 의원으로 추락했다.
테르미도르 9일(7월 27일), 공회에서 생쥐스트는 개인 연설을 통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찬사와 함께 화해를 제안하고 모든 고발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탈리앵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어 등단 비요바렌이 “로베스피에르가 의원 모두를 학살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라며, 프레리알 22일 법을 작성한 자로서 그의 책임을 물었다. 여기저기서 “독재자를 타도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사자가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탈리앵이 단도를 휘두르며 일당의 체포를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파 체포 법령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동생 오귀스트 로베스피에르가 자청하여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
물론 밤사이 코뮌이 봉기하여 감금된 인원들을 석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그토록 사랑했던 민중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던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의 입속에 권총을 넣고 발사했다. 턱이 깨진 채 로베스피에르는 열다섯 시간 정도 더 살아 있었다. 테르미도르 10일(7월 28일) 생쥐스트와 쿠통 등 21명의 처형을 지켜본 후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더러운 로베스피에르야, 단두대가 너를 부르고 있다! 다음에는 네 차례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라는 사형 전 당통의 단말마가 현실이 되었다.
참고로 작가 미상의 <로베스피에르의 처형(1794, 대문 그림)>에서 단두대에서 목일 잘린 인물은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쿠통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차에 앉아 갈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 손수건을 입에 대고 있다. 남동생 오귀스탱이 단두대로 가는 계단을 앞서 오르는데 고개를 들고 당당하다. 사흘간 모두 107명이 단두대로 끌려갔다. 반(反) 로베스피에르파로서 가장 충실하게 혁명을 지지했던 사람들, 비요바렌, 캉본 또는 바레르 모두 테르미도르 9일의 음모에 가담했던 것을 노년기에 이르러 뼈저리게 후회했다. 어리석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에게도 혁명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리라. 그러나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프랑스 혁명이 결국 좌초했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