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루데의 역사화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의 가상 만남>
1792년, 프랑스는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북부 전선에서 발랑시엔이 7월 28일 항복했다. 그리고 마인츠에서 프랑스 군대가 물러나자 대프랑스 동맹군이 알자스로 집결할 수 있었으며,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파리로 진군하려 했다. 피레네 지방에 있던 스페인 군은 프랑스령 루시용으로 진격했다. 국내에서도 보르도, 툴루즈, 브르타뉴 반란군은 굴복하지 않는 가운데 방데군이 앙제로 진군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강력한 통치가 효율적이다. 법 위에 군림한 압제적인 조직, 공안위원회가 우수한 전시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평화를 회복하기까지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공언하면서 1793년 8월 23일 전황의 요구에 따라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전 프랑스 인은 군에 복무한다. 젊은 남자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 결혼한 남자는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나른다. 여자들은 막사와 옷을 만들고 병원에서 일한다. 아이들은 리넨으로 붕대를 만들어라. 노인들은 광장에 나와 전사들의 용기를 북돋아라!"
18~25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어 1년 후 병력은 14군단, 75만 2,000명까지 늘어났다. 물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징발했다. 훗날 군사철학자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의 총동원령과 관련 '국민이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한 순간'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조셉 커민스의 ≪전쟁 연대기 프랑스사Ⅱ≫)
그러나 자코뱅 내부가 분열되자 공안위원회가 흔들렸다. 서른다섯 살 조루주 당통은 “보라, 센 강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아아, 너무 많은 피가 흐르고 있다”라며 자비와 연민을 베풀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관용파'라 불렀다. 반면 좌익 급진파는 민중의 본능에만 영합하려고 했다. 마라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크 루와 르클레의 격앙파가 선전선동을 강화했다. 격앙파(앙라제)는 ‘화난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급진주의 또는 초기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모든 식료품에 대한 최고가격제, 매점자들의 처형, 모든 반혁명 혐의자의 체포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민중의 환호를 끌어냈다. 그들은 당통 측근의 사업가 출신 의원들을 고발하고, 국민공회를 비난했으며, 8월 10일 봉기 기념일에 맞춰 대규모 민중봉기를 준비했다. 공안위원회조차 격앙파에 대해서는 무기력했다. (대문 그림: 작가 미상의 <공안위원회(1793~1794?)>, 공안위원회는 1793년 4월 7일부터 1795년 11월 4일까지 존재했다)
이즈음 로베스피에르가 중대한 결심이 선 듯했다. 보통 공안위원회의 모든 성원은 특별한 문제없이 매달 재선되었다. 그러나 7월 10일 위원장 당통을 비롯하여 캉봉, 들라크루아, 트레야르 등이 재선 되지 않았다. 반면 로베스피에르파의 보조위원 생탕드레, 쿠통, 생쥐스트 등 세 명이 정식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통파 중에서는 튀리오와 가스파랭만 선출되었다. 그나마 가스파랭이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자리를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가 채웠다. 위원장으로 추대된 그는 ‘마지못해’ 나섰다고 말했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하지만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의 수장이자 국민공회 의장이기도 했다. 향후 위원회 활동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결정한 행동으로 보였다. 당, 정, 의회를 장악한 그는 민중과의 연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심장인 민중은 아직 미성숙했기에, 산악파가 혁명의 두뇌로써 결합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통치는 현실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격앙파를 향해 "죽은 마라를 등에 업고 새로운 학살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경고했다. 덕분에 '8월 10일 봉기 기념제'가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와 병행하여 반혁명 혐의자를 수색, 체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격앙파의 반대를 억누르고, 국민공회를 해산시키려는 당통파의 술책을 좌초시켰다. 그러나 자크 르네 에베르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베르는 왕실 가족 감독 책임자가 되면서 앙투아네트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는 데 앞장섰고, <페르 뒤셴>의 발행인으로서 원색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구사하면서 민중의 감정을 파고든 인물이었다. 그는 결사 항전, 공포정치를 통한 배신자들과 혐의자들 탄압, 경제적 규제 강화와 같은 상퀼로트의 요구를 거침없이 주도했다.
에베르의 압력이 국민공회 내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정책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가 의장 임기를 마친 9월 5일 이후 에베르의 청원을 수용했다. 혁명재판소의 재조직, 혐의자 체포, 특별재판소를 포함하는 국내 혁명군대의 창설, 혁명위원회의 정화와 그 구성원들에 대한 보상, 식량에 관한 조치들을 신속하게 공표했다. 의회와 공안위원회의 동의 아래 법률적 공포정치가 출현한 것이었다.
공안위원회 역시 (반혁명 세력과 연계한) 외국인 은행가 체포안(9월 7일), 혁명군대 조직 법령(9일), 곡물의 공정가격제 재조직(11일), 3단계 무상 의무교육 법령(13일)을 통과시켰다. 이중 무상 의무교육은 가난한 민중의 계몽과 실천 역량 강화라는 목적하고 맞물린 정책이었다. 9월 17일에는 공포정치의 실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반혁명 혐의자 단속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이 법은 다양한 범주의 혐의자들을 폭넓게 정의하는 매우 위험한 법안이었다. 혐의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기에 아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어 식료품 수입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항해법(21일)과 1차 생필품과 급료에 대한 전반적인 최고가격제를 확립(29일)했다.
그러나 에베르파는 여전히 단두대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고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만이 능사가 아니고, 민주적 절차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었다. 산악파가 내세운 3대 목표가 조국 방위, 혁명 수호와 함께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이었다. 하지만 죄가 분명치 않았던 루이 16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앙투아네트와 함께 처형되었다. 또한 그들은 지롱드파 73인의 목을 요구했으나 10월 30일 자크 피레르 브리소 등 21명을 사형에 처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날마다 죄인으로 몰린 사람들이 줄지어 기요틴으로 향했다. 죄수 수송차 텀브릴(Tumbrils, 쓰레기 운반차)은 날마다 희생자들을 실어 날랐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지롱드파의 여왕' 롤랑 부인은 처형 직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유여! 그대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자행되었는가!"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 성찰≫)
이즈음 동인도회사 청산과 관련한 의원들의 독직(瀆職) 사건이 터졌다. 쥘리앵드 툴루즈, 들로네 당제, 샤보, 바지르가 왕당파 은행가 바(Barz) 남작과 결탁하여 막대한 뇌물을 받고 회사에 유리한 청산 법령을 제출했다.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 인물’ 로베스피에르는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농촌에서 휴식을 취하던 당통은 그의 친구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11월 20일(브뤼메르 30일) 급히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혁명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극좌파를 로베스피에르로부터 갈라놓으려 했다.
에베르파는 당통의 과거 수상한 행적을 문제 삼으며 맞섰다. 사실 당통은 뇌물 사건의 공범자이고 거액을 챙겨 호화 생활을 즐기는 부패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파리 꼼뮨까지≫) 자연히 혁명 과정에서 보여준 당통의 태도는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0일 봉기 당시 코뮌의 감찰관이었던 그는 궁정에 매수되었으면서도 국왕에게 어떤 중요한 양보도 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랬음에도 그는 봉기 코뮌엔 보증 수표였으며, 그의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의회에 안도감을 주었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혁명사≫)
뒤무리에의 반혁명 때도 당통은 이중성을 보이며 지롱드파의 편을 들은 바 있었다. 자청하여 뒤무리에를 만나 비밀 회담을 가졌으나 파리로 돌아온 당통은 결과를 보고하지 않고 며칠간 잠적했다. 그리고 그는 국민공회에서 뒤무리에를 혁명재판소로 소환하는 문제와 관련 '장군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가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증했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달변에 서민적인 말투와 수수한 차림새를 한 현실주의자이며, 결단을 내릴 줄 아는 동시에 술수에도 능하고, 배짱이 있으며 향락적인 기질이고, 격정적이며 모질지 못한 당통은 한동안 혁명 프랑스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공안위원회를 돕는 척하면서 뒤에서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통의 공안위원회 재진입을 계속 견제했다. 당통이 위원회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자, 로베스피에르는 더 이상 공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허약함과 무모함, 과격파와 온건파라는 두 개의 암초 사이를 항해’하기로 했다. 아니, 그 암초를 부숴 버리기로 했다.
국민공회에서 반혁명 용의자의 재산 몰수와 무상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방토즈법을 가결한 이틀 후인 1794년 3월 4일(방토즈 14일)에 마침 맞게 에베르파가 먼저 움직였다. 코르들리에 클럽에서 에베르와 카리에가 기근과 함께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관용파와 타협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봉기를 유도했다. 1개월 동안 병으로 몸져누웠던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의 주도자들을 고발하였으며, 3월 24일 외국인 첩자 몇 명과 함께 처형했다.
당통의 관용파는 이 기회에 극좌파를 몽땅 쓸어내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베스피에르의 다음 타깃이었을 뿐이다. 오랫동안 계류 중이던 동인도회사 추문과 관련 파브르 데글랑틴과 샤보에 대한 고발이 3월 16일에 가결이 되었다. 이어 3월 29일(제르미날 9일), 국민공회가 ‘부패한 우상’인 당통, 들라크루아, 데물랭, 필리포 등의 체포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