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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16. 2024

지롱드파의 몰락과 <마라의 죽음>

급진적 ‘공화국 제1년의 헌법(1793년 헌법)’ 채택

무기력한 지롱드파에겐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 전투의 패배와 뒤무리에의 배신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지롱드파는 뒤무리에의 반혁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러나 그가 자파라는 이유 하나로 뒤무리에의 죄과에 대해 책임져야 했다. 국민공회는 방데 반란이 본격화되던 3월 10일, 혁명재판소를 설치했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모든 반혁명 기도와 자유, 평등, 통일, 공화국의 불가분성에 대한 모든 가해 행위”를 심리했다. 그리고 3월 21일, 모든 코뮌에 감시위원회를 두고 외국인과 반혁명 용의자를 감시했다. 

결정적으로 뒤무리에가 적국으로 도주한 직후, 4월 6일에 국방위원회를 해산하고 공안위원회를 신설했다. 전시 임시 정부인 공안위원회의 위원 9명 중 지롱드파는 한 명도 없고, 산악파가 일곱 명(평온파 1명)이었다. 조르주 당통이 영도했으며, 위원회의 토의는 비밀이었다. 행정위원회의 행정 활동을 감시하며, 행정위원회는 공안위원회의 결정을 지체없이 집행해야 했다. 그리고 긴급할 때는 국방장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지롱드파가 산악파의 독재라고 주장할 만했다.

전반적인 정치·경제 상황도 지롱드파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벨기에는 프랑스에 빼앗겼던 땅을 탈환했고, 방데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영국 함대는 8월 27일 밤에 지중해를 통제하는 핵심 요충지인 툴롱 앞바다를 제압했다. 훗날 이곳 툴룽에서 나폴레옹 포병 소령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대서양 식민지 무역이 끊기고 보르도, 생말로, 루앙과 국제항구 르아브르 같은 항구도시 부르주아들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수입 금지는 전쟁 징발로 발생한 물자 부족을 가중시켰고,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아시냐는 계속 떨어져 마침내 액면가의 50퍼센트가 되었다. 그러자 여러 지역에서 소요 사태가 활발해졌다.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 성찰≫ 중 이희영의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혁명 산책>)


이래저래 지롱드당의 몰락은 불가피해 보였다. 반면 산악파의 공세는 맹렬했다. 마라가 지롱드파를 반역자라며 각 지방에 고발했다. 지롱드파도 이에 맞서 4월 12일 마라를 국민공회 모독죄와 살인 교사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의 열광적인 환호와 지지로 4월 24일 그는 무죄 석방됐다. 그러자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 위해를 가하려는 음모가 있다며 5월 18일 파리 코뮌의 활동을 조사할 12인 위원회를 설치했고, 위원 11명을 자파에서 뽑았다. 12인 위원회가 코뮌 지도자들을 공격, 5월 24일 산악파의 에베르를 체포했다. 이런 역공세는 리옹, 낭트, 보르도 등 많은 지방 대도시에서 지롱드파가 여전히 세력을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때 왕당파 반도들이 리옹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방데 군이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알려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파리 코뮌은 5월 29일 비밀리에 봉기위원회를 조직했다. 5월 31일부터 시작된 봉기는 6월 2일, 6만 명의 군중이 공회가 자리 잡은 튈르리 궁을 포위했다. 국민군 신임 사령관 프랑수아 앙리오가 60문의 대포를 동원했고, 로베스피에르는 22명의 지롱드 당원의 기소를 요구했다. 위세에 눌려 혼란에 빠진 의원들 앞에서 마라가 기소 의원의 명단을 천천히 낭독했다. 12인 위원회가 폐지되고, 당 간부 29명의 체포가 결의되면서 지롱드파는 실각했다. 이후 지방으로 탈출한 지롱드파 의원들은 보르도와 마르세유에서 공개적으로 반혁명 반란을 도모하면서 위협을 구체화했다. 프랑스 전체 도(道) 3분의 2에서 내전의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기에 조직적인 힘을 담보해 낼 수는 없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사실 국민공회의 존재 이유는 1971년 헌법이 야기한 문제점을 수정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에 있었다. 6월 24일, 의회는 공화정과 보통선거 그리고 국민의 반란권을 인정하는 급진적인 ‘공화국 제1년의 헌법(1793년 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헌법은 혁명의 진행과 공포정치 때문에 평화 시까지 적용이 보류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으로 인해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1793)>

전국적으로 심각한 식량 위기가 몰아닥친 7월 13일, 뜻밖에 산악파의 최고 간부 중 한 명인 장 폴 마라가 암살되었다. 지롱드파의 스물다섯 살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인의 칼에 찔렸다. 다비드는 죽기 바로 전날 마라를 만났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가 붓을 들어 <마라의 죽음>을 위로했다. 의사였던 마라의 진정한 재능은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글에 있었다. 그림 속 오른손에 쥔 깃펜이 그의 무기였다. <민중의 벗>을 발간했고, 공화국 성립 후에는 <프랑스 공화국 신문>으로 개칭하고 주필로 있었다. (J.네루, ≪세계사 편력≫) 

그는 “개혁에 대한 희망은 모두 몽상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민중의 무장봉기에 있고, 반란의 성공을 위해 독재적 사령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화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일 수 있는 인민의 적의 숫자가 1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앤드루 마, ≪세계의 역사≫) 불결하고 악취까지 풍기는 병약한 몸을 끌고 다닌 마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마라는 고독, 냉소, 잔인했다. 그러나 빈곤과 불행이 무엇인지 알았고 특히 사회혁명에 관한 이해가 지도자 중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이 선동적인 논객은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다비드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폴 자크 에메 보드리의 <마라 암살 후 샤를로테 코르데(1860)>

말이 어눌했던 다비드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은 폴 자크 에메 보드리의 <마라 암살 후 샤를로테 코르데>와 비교하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 완성한 보드리의 그림은 다비드의 그림을 당시 정황에 맞춰 사실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간결하게 처리했다. 공화국 지도와 책이 놓인 선반이 있는 벽면 전체를 짙은 색조로 덧칠해 버렸다. 그리고 빛을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게 하여 마라의 주검에 집중케 했다. 

그는 불의의 기습을 당한 사람이 아니다. 1792년 9월, 끔찍한 학살을 유도해 냈던 인물치고는 잠든 것처럼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 욕조에 기댄 채 힘을 잃은 눈과 축 늘어진 어깨 그리고 가슴의 상처로부터 하얀 천 위로 흘러내린 피, 피에타상에서 성모 마리아가 앉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흡사하다. 보통 사람을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을 예수와 희생과 비교한 것이다. 

피부병 치료를 위해 식초를 적신 머릿수건은 마치 후광처럼 빛난다. 그리고 그의 주검 주위에 남아 있는 소품들은 마라가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증언한다. 유황을 넣은 욕조 속 마라는 샤를로테가 보낸 위장 청원서를 손에 꼭 쥐고 있다.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얻을 권리를 누릴 만큼 충분히 비참합니다"라고 쓰였다. 그리고 왼손 엄지손가락이 편지 내용 중 ‘자비(Bienveillance)’를 가리킨다. 원래는 그녀가 배신자의 거짓 이름을 적은 목록이었고, '도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역시 세상에 자비를 베푸려다 희생된 순교자로 승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칼의 손잡이를 흑단 나무에서 흰색 상아로 바꾸어 놓았다. 핏빛과 더욱 선명한 대비를 원해서였다. 탁자 위 잉크병과 깃펜, 프랑스 제1공화국 지폐는 건선을 치료하면서 욕실에서 공무를 보는 습관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마지막까지 조국과 민중을 위해 일한 성자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투박한 나무 탁자 하단에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서명이 정자체로 쓰였다. 글은 모두 세 가지 버전이 있는데 모두 동지애적 고별사이자, 역사의 비석이었다. 


이렇게 최고의 선동화가 된 이 그림은 1천 부가 인쇄되어 프랑스 전역에 배포되었다. 혁명적 대의라는 십자가를 진 순교자 마라의 흉상은 전국적인 숭배 대상이 되었다. 마라의 유해는 민족적 영웅들을 위해 만든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학살의 원흉인 마라를 죽임으로써 10만 명을 구하려 했다”고 주장한 샤를로트는 혁명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3개월이나 걸려 완성된 작품은 혁명 축제에 맞춰 10월 14일 루브르 중정에서 공개되었다. 시민들은 "우리 친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다비드가 말했다. 


“나는 인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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