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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25. 2024

시민 루이의 처형과 화가 다비드

신고전주의 회화의 등장

1792년 9월 25일이 되자 지롱드파가 산악파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소위 ‘삼거두’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마라와 로베스피에르는 독재로, 당통은 수뢰 혐의로 비난했다. 10월 9일, 지롱드파의 도미니크 제제프 가라가 당통의 뒤를 이어 법무장관이 되었다. 이때 당통이 회계 보고를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20만 리브르를 유용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당통은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독재 논쟁에서는 지롱드파의 공세가 실패했다. 사람들은 독재를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혁명 자체가 불법인 차제,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느냐 여부가 더 중요했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가 논쟁을 통해 존재감을 키웠다. 그리고 무당파 의원들이 지롱드파의 지속적인 고발과 비난에 피로감을 느끼고 등을 돌렸다. 


두 파벌은 루이 16세의 재판 문제로 다시 한번 격돌했다. 지롱드파는 1791년 헌법이 국왕의 신병을 불가침이라고 선포했기에 면책특권에 해당하며, 8월 10일 이후부터 왕은 한 명의 시민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시민 루이의 처형은 프랑스를 분열시키고, 지방의 여론을 자극하며, 유럽 전체와 충돌을 야기한다고 변호했다. 그러나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11월 20일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튈르리 궁 철제 금고에서 국왕과 미라보 그리고 외국 사절 간 내통이 드러난 서류가 발견됐다. 지롱드파에서도 더 이상 재판을 늦출 명분이 사라졌다. 12월 11일 기소장을 낭독하는 것으로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어 이듬해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표결에 부쳐졌다. 모든 의원은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왕의 유·무죄를 밝히고, 그 이유까지 설명하는 지명 점호제로 진행됐다. 의원의 행동을 국민에게 숨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지만, 방청석에 앉은 국민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투표 방식이었다.


이때 투표에 참여한 의원 중 특이하게도 화가 한 명이 포함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18세기말 절대왕정에 피로를 느끼던 프랑스에서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신고전주의가 등장했다. 부분적으로는 1738년 폼페이와 인근 헤르쿨라네움의 유적 발굴에 자극을 받았다. 이후 1806년에는 토머스 엘진 경이 그리스 파르테논의 대리석 부조 등 100여 개를 런던 대영박물관에 진열(엘진 마블스)했다. 유럽에서 고고학의 열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굳혔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이성에 대한 믿음이 질서와 고귀함이라는 미덕을 창출한다는 계몽주의의 교훈을 담았다. 따라서 고대 양식의 맹목적인 모방이 아니라, 당시 영웅적 시대의 도덕 및 정치적 이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프랑스에서는 다비드가 앞장서면서 혁명의 시각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그는 살롱전에서 3번이나 연속해서 고배를 마시다가 1774년 스물여섯 살 느지막한 나이에 로마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의 기억은 모욕으로 작동하여 1793년 혁명 지지자들과 함께 왕립 회화조각아카데미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여하튼 로마상의 부상으로 5년간 로마 유학을 하면서 고전 미술에 심취했다. 폼페이 유적을 보고 그는 자신이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1779년 귀국 후 푸생의 유산을 받아들여 그리스 신화나 고전의 영웅담을 주제로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중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1783)>는 루이 16세를 감동케 했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 로마에 머물 당시 다비드의 명성을 알린 첫 번째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완성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를 기반으로 한 일화다. 기원전 669년, 로마와 알바 가(家), 두 가문이 전쟁을 벌였다. 전면전 대신 두 가문 간 세 사람의 용사가 대결했는데 그림 속 호라티우스 삼 형제는 로마 가를 대표했다. 그들은 결투에 나서기 전 로마의 왕이자 아버지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게 승리를 맹세하고 있다. 그런데 형제 중 두 명은 왼팔, 한 명은 오른팔을 뻗었고, 칼의 모양도 각각 다르다. 현실적인 사건처럼 꾸미기 위한 불일치였다. 


이 비장한 순간에 오른쪽 여성들, 사비나와 카밀라가 슬퍼하고 있다. 양가 교차 혼인을 한 그들의 숙명 때문이다. 대결은 장남 푸블리우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알바 가의 큐라티우스 삼 형제 중 약혼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자신을 원망하는 누이 카밀라마저 죽였다. 여성들의 사사로운 처지를 괘념치 않는 남성 위주의 의연한 국가관을 강조한 그림이었다. 

그림 속 ‘세 자루 칼’은 미덕과 신으로부터의 가호를 상징하며, 아울러 로마의 숭고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역사의 해석이 그러하듯 이 소재는 진영 논리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었다. 보수 진영은 작품을 주문한 왕 루이 16세에 대한 충성심으로, 5년 뒤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하게 되는 진보 진영에서는 모든 계층의 합의에 따라서 작동되는 공화정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다비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다주는 릭토르들(1789)>

이후 국왕이 의뢰한 작품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신을 가져다주는 릭토르들>도 혁명을 대변하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작품 속 주인공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정의 아버지'라 불린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비드는 명성을 얻었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우상이었던 로베스피에르, 의사 출신 마라와 더불어 자코뱅파를 이끌었다. 다비드는 1793년까지 예술위원회 위원으로서 예술계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혁명을 숭배하는 그림과 선전물 제작으로 바빴으며, 여러 혁명 축제를 조직했다. 이렇게 신고전주의 양식은 다비드와 함께 대혁명 시기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프랑스 화단을 지배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루이 16세의 유죄가 이의 없이 확정되었다. 다음에는 피고가 국민에게 상소할 권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재심 안은 426대 278로 부결되었다. 의견을 제시했던 지롱드파가 패배한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형량과 관련한 표결에서 387대 334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루이 카페는 전날 밤 앙투아네트에게 다음 날 아침 7시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1793년 1월 21일 마침내 단두대의 칼날이 루이 16세를 향해 떨어졌다. 그러자 최초 루이의 처형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던 당통이 몰려든 군중을 향해 외쳤다. 


“유럽의 국왕들은 이제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이다. 저들에게 국왕 루이의 목을 던져주자.” (J.네루, <세계사 편력>)


이지도르 스타니슬라스 헬만, <루이 16세의 처형(1794)>

판화가 이지도르 스타니슬라스 헬만이 현장을 스케치했다. 사형집행인 상송이 루이 카페의 머리를 높이 들어 관중에게 보여준다. 판화 오른쪽 루이 15세 동상이 사라지고 받침대만 남아 있는 모습이 매우 상징적이다. 혁명 전 왕립광장(루이 15세 광장)이 혁명광장으로 바뀌었음을 증언한다. (대문 그림: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루이 16세의 비극적 최후>)

이 표결에서 다비드 말고 흥미로운 또 다른 한 사람이 루이의 사형에 찬성했다. 루이 16세의 종형제인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 2세 조제프다. 그는 프랑스 왕국의 영지 5퍼센트를 차지한 강력한 영주였다. 바꾸어 말하면, 구체제(앙시앙 레짐)에서 가장 큰 수혜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왕정이 폐지되자 왕족의 칭호를 버리고 자신을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라고 불렀다. 자유주의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국왕이 죽으면 그는 방계 왕족 중 왕위 계승권 1순위로, 개인적 야심을 채우고자 혁명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아들 루이 필리프가 뒤무리에 장군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의 꿈은 아들 대에서 이루어졌다.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물러나자 도망갔던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역시 1848년 2월 혁명으로 쫓겨나 '프랑스 마지막 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돈처럼 만족을 모르는 권력을 좇는 불나비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한결같다. 무상하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막상 루이 16세가 죽자 많은 의원이 “허약하고 선량한 인간을 꼭 단두대로 끌고 가야 했느냐?”라며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전 유럽인이 경악했고,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이 깊어졌다. 이후 왕의 사형에 찬성한 의원들은 ‘시해파’라고 불렸다. 이 말은 이제 이들이 여론을 의식해서 머뭇거릴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후퇴는 그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혁명의 완성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는 길밖에 없었다. 예상을 뛰어넘어 앙투아네트까지 기소가 이루어진 것도 이러한 절박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해 10월 16일, 그녀도 남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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