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회에서 입법의회로
1791년 9월 30일, ‘헌법 제정 국민의회(제헌의회)’가 역할을 마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법률 제정을 위한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이전 제헌의회 의원은 법령에 의해 피선거권이 박탈되었기에 당선된 745명 모두 초선의원이었다. 과반수를 차지한 그룹이 없는 가운데 온건한 입헌군주제와 부르주아 지배를 바라는 우익 푀양파가 264명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다시 라파예트파와 삼두파로 갈렸다. 삼두파는 1789년 10월에 창설한 자코뱅 클럽 초기에 중심 역할을 했던 바르나브, 뒤포르, 라메트의 3명을 일컫는다.
좌파 자코뱅 클럽 소속 의원은 136명이었다. 민중이 힘을 합쳐 혁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입장이 일치했으나 이들 역시 온건파(혹은 브리소파)와 민주파로 갈렸다. 온건파는 대부분 중류 부르주아 출신으로, 훗날 지롱드파라고 불렸다. 마지막으로 345명의 부동 세력이 있었다. 혁명을 지지했지만, 뚜렷한 정치적 견해와 걸출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의원들이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 각 계파는 혁명의 종료 여부에 따른 시각 차이를 드러냈고, 이후 전쟁과 경제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좌익이 약진할 기회를 잡았다.
바렌 도주 사건과 ‘1791년 헌법’ 제정 사이에는 필니츠 선언이 있었다.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빌헬름 2세가 공동 발표했다. 혁명에 반대하면서 루이 16세 부부에게 위해가 있을 시 가만히 있지 않게다며 프랑스 왕권 수호를 위해 유럽 군주들에게 무력 사용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7년 전쟁을 치뤘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양국이 대(對) 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 정부를 압박했다. 사실 그들에겐 프랑스 국왕 부부의 안위보다도 자국에 전염병처럼 퍼질 혁명을 경계했다. 하지만 주변국의 이런 행동은 파리 시민을 자극했다. 국왕이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배신감이 커졌다. 게다가 국왕 부부와 같은 날 브뤼셀로 무사히 탈출한 왕의 동생 프로방스와 아르투아가 망명 귀족과 규합하여 또 하나의 위협으로 성장했다. 이들 형제들은 훗날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되는 인물로, 국왕 부부가 7년 동안 후사가 없었을 때 내심 후계를 꿈꾸었던 무리들이다. 그들은 국경 가까이에 있는 독일 서부 코블렌츠에서 정규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자 바렌 사건으로 왕실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한 절대다수 중도파 의원들이 좌파와 가까워졌다.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민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아시냐의 가치는 떨어졌고, 농민들은 봉건적 잔재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브리소의 말대로 모두가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페르센의 새로운 도주 계획을 거절한 루이 16세는 프랑스가 아니라 동맹군의 승리를 위해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하여 자코뱅을 제어하려 했다. 국왕은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푀양파로 하여금 선서 거부파 성직자들에 대한 처벌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케 했다. 그런 후 본인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민중의 희망을 수렴하는 양 위장했다. 자코뱅 클럽 내 다수 세력인 지롱드파도 전쟁을 지지했다. 그들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전쟁을 통해 내란을 피하면서 왕정을 무너트리려 했다. 최전선에 왕의 두 형제가 나서면, 반역자와 루이 16세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국민은 무적이 되리라”라고 선동했다.
유일하게 전쟁을 경계했던 인물이 막스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였다. 당시 많은 장교가 새 헌법과 의회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무더기로 전역하여 국외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그는 조국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전장이 형성되면, 국민을 위해 싸우지 않는 세력이 등장할 것을 염려했다. 따라서 전쟁 선포에 앞서 반혁명 세력에 집중하면서 군대의 쇄신과 무기 제작을 통해 진정한 국민군으로 거듭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당통과 에베르 등이 이에 동조했고, 이들을 일러 평화파라고 했다. 그러나 자코뱅 내 다수는 브리소를 지지했다. 당통을 비롯해 상당수 인원이 마음을 바꿔 지롱드파에 합류했다. 마침내 1792년 4월 20일 입법의회에서 열 명만 반대한 가운데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 안이 통과되었다. 혁명 전쟁(1792~1802)의 시작이었다. 앙투아네트는 사전 프랑스 군대의 군사 작전 계획을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알리려고 첩자를 보냈다.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프로이센에 대한 선전포고는 7월 8일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전 초 일선에서는 패전 소식만 거듭 전해왔다. 1만 2천 명의 장교 가운데 약 절반은 이미 망명했고, 병력도 줄어 정규군과 의용군을 합쳐 약 15만 명 정도였다. 국내 특권층은 침략군을 기다렸고, 망명자들은 적의 편에서 싸웠다. 싸워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의로 항복하거나 후퇴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초조해진 브리소는 베르뇨와 함께 왕실이 장군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1791년 8월 생도맹그에서 발생한 흑인 노예 반란의 여파로 설탕, 커피, 럼주 등 식민지산 식료품 가격이 갑작스럽게 폭등했다. 이에 따라 도매상들이 식료품 사재기를 못 하도록 공정 가격제를 요구하는 청원이 잇달았다. 하지만 의회, 특히 지롱드파는 금과옥조인 소유권 침해를 우려하여 결심하지 못했다. 1792년 1월 말 파리에서 일련의 민중 소요가 폭발했다. 다음 달에는 빵 품귀로 인한 소요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급기야 3월 3일 파리 남부의 소도시 에탕프 시장 시모노가 살해되었다. 그는 곡물 유통을 반대하는 농민들에 맞서 공정가격제 실시를 거부했다. 푀양파는 중도파와 합세하여 매우 가혹하게 소요를 탄압했다. 그런데 지롱드파가 푀양파에 동조하여 시모노의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그의 시장 깃발을 팡테옹 천장에 내걸었다. 로베스피에르 등이 크게 분노하면서 자코뱅 클럽이 분열됐다.
때맞춰 6월 13일 국왕이 브리소파 각료 롤랑, 세르방, 클라비에르 등을 파면했다. 브리소는 내부의 적을 먼저 처리해야 된다며 소요를 선동하면서 의회에서 국왕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 같은 안건을 고의적으로 상정했다. 선서 거부 신부들을 강제로 추방하자는 안건이었다. 예상대로 루이 16세는 최초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6월 20일, 국왕에게 압력을 가할 의도로 2년 전 바렌 도주 사건 발생일에 맞춰 시위를 조직했다. 1만 5천 명이 튈르리궁 입구로 몰려갔다. 그러나 국왕이 법령의 재가와 각료들의 재입각을 끝내 거부함으로써 지롱드파가 조직한 유일한 봉기는 실패했다.
한 해 전 파리 시장 선거에서 페티옹에게 패하고 국경 경비군으로 밀려났던 라파예트가 6월 28일 부대를 떠나 의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자코뱅 클럽 해산과 시위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그는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대외적 위협과 내부 갈등을 추스르고자 단결을 호소했다. 도처에서 1792년 4월에 루제 드 릴이 최초 군가로 작곡한 새로운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터져 나왔다. 며칠 사이에 1만 5천 명이 파리 시민들이 의용군을 자원했다. 파리 코뮌(시의회)과 별도로 ‘봉기(반란) 코뮌’이 창설되었다.
7월 10일 푀양파 각료들로부터 사표를 받은 의회가 다음날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라고 선언했다. 이때 재집권을 원하는 지롱드파가 다시 한번 이중성을 드러냈다. 궁정과 비밀 협상에 들어갔고, 7월 26일 브리소는 보통 선거와 국왕 폐위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로베스피에르가 반발했다. 7월 29일, “궁정과 입법의회 음모자들 간의 합작극”을 비난하면서 의회의 즉각 해산과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공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상황이 반전됐다. 7월 30일, 법령으로 수동 시민들이 국민방위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으며, 대표자를 각각 3명씩 파견한 파리 48개 구 가운데 47개 구가 국왕 폐위를 의결했다.
때맞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군 사령관이자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장군이 국경에 당도하여 발표(7월 25일)한 성명서 내용이 8월 1일 파리에 전파되었다. “루이 16세의 모든 권한을 회복시키고, 연합군에 저항하는 모든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성명서는 역효과를 내면서 1792년 8월 10일 대규모 봉기를 야기했다. 봉기는 파리 민중만이 아니라 전국 인민을 대표하는 참가자들이 모여 국민적인 성격을 갖췄다. 그래서 대혁명을 제1차 혁명, 8월 봉기를 제2차 혁명이라고 구분한다. (대문 그림: 역사화가 앙리 폴 모트, <계단에서의 교전 8월 봉기(1892)>)
봉기 초반 스위스 근위대 1,000여 명이 일제이 사격을 하며 반란군이 가져온 대포 12문을 빼앗았다. 그러나 반란군이 재차 공세를 취하자, 국왕은 발포를 중지시켰다. 양측 사망자가 1,300명에 이르렀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이때 스위스 병력 600명이 칼에 찔리고 돌과 곤봉, 총탄에 맞아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이 소름 끼치는 대학살을 목격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대위는 "어떤 전장의 살육전에서도 그와 같은 충격은 받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무기력했던 입법의회가 어쩔 수 없이 국왕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수동시민까지 참여하는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공회 소집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8월 13일 의회는 코뮌의 요구에 굴복하여 왕실 일가를 탕플 탑에 가뒀다. 이로써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완성하려 했던 사람들은 8월 19일 오스트리아로 도주한 라파예트와 함께 모두 몰락했다. 반면 로베스피에르, 당통, 장 폴 마라가 주도하는 몽테뉴파(산악파)와 수동 시민이 갑자기 정치 무대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