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폐지와 9월 학살 그리고 '최초의 승리' 발미 전투
프랑스혁명을 이해하고 쉽게 기억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복잡한 의회의 명칭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체제 변동과 연관 지어 보자. 먼저 총신분회(삼부회)에서 제3 신분이 스스로 국민대표를 표방하며 국민의회를 만들었다.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입헌군주제의 입법의회→공화정의 국민공회로 발전했다. 또한 많은 정파 및 주도 인물을 일일이 외우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대신 혁명과 반혁명 구도로 이해하자. 따라서 외국군은 프랑스 내 왕정복고를 도모하는 반혁명 세력이기에 이들과의 싸움을 ‘혁명전쟁’이라 했다.
혁명-반혁명을 가름하는 기준점은 민중을 대하는 태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민중과 함께하면 혁명, 민중과 분리되면 반혁명이다. 의회 내 다수를 차지한 지롱드파가 산악파에 의해 반혁명 세력으로 몰린 원인도 여기에 있다. 두 정치 파벌은 최초 자코뱅 클럽에 함께 속했던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클럽은 1790년 2월 ‘헌법을 위한 벗들의 모임’이라는 정식 명칭을 정했으며, 혁명이 전국 운동으로 확산한 데에는 자코뱅의 전국 연락망이 조직해 내는 여론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지롱드파는 공화정 수립을 혁명의 종착지로 여겼다. 반면, 산악파는 가난한 민중의 해방을 혁명의 완성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그중 산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을 신뢰하고, 그들이 참여할 때에만 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5년 동안 그의 이런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럼 본질적인 질문,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은 해 질 무렵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하늘을 나는 수천 마리의 새들과 같다. 여러 가지 경이로운 광경을 창출하는 새들의 비행에는 고도의 집단지성이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의외로 간단한 세 가지 규칙만 따르면 된다. ①자신 주변의 다른 구성원과 충돌을 피한다. ②주변 구성원의 비행 방향과 같은 방향을 유지한다. ③다른 새와 거리를 가깝게 유지한다. (류세평,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수학의 힘>) 민중은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빵과 자유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 민중은 특권계급 퀼로트와 반대편에 선 상퀼로트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보통선거가 시행되면서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던 수동시민 역시 민중이라 일컬을 만하다. 극좌인 장 폴 마라에겐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의미하나, 로베스피에르의 민중은 이와 결을 조금 달리한다.
로베스피에르는 1792년 6월 농지법이 공산주의 체제에서만 실현 가능하고, 그 체제는 공상적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이유는 부르주아 윤리인 소유권 침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루소의 사상에 매몰된 그가 옹호한 민중을 굳이 계급적으로 표현하자면, 제4의 신분이자 '학습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였다. 따라서 그의 민중은 가난하고 헐벗은 대중 일반을 일컬으며, 수십 년 후에나 무산자 계급을 이루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림으로 예를 들자면 귀스타브 쿠르베의 위대한 작품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돌 깨는 사람들(1849)>이 바로 그들이다.
그림은 1850년 파리 살롱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가난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라고 평가받으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쿠르베는 더하거나 빼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겼던 사실주의 화가다. 종교화나 그리라는 조롱에 “먼저 천사를 데려오라”라고 맞섰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고향 오르낭 근처 채석장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영감을 받았다.
한낮 뙤약볕 아래 한 노인과 소년이 돌을 깨고, 망태기에 실어 운반하고 있다. 햇빛을 가리려고 밀짚모자를 쓴 노인은 찢어진 조끼와 무릎을 기운 바지를 입었다.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 세우고 힘겹게 망치질하는데, 왼발 양말이 크게 구멍이 났다. 학교 갈 나이 정도의 소년도 망태기의 무게가 힘에 부친다. 왼 무릎을 구부려 망태기를 받쳐 놓은 채 잠시 숨을 몰아쉰다. 등 뒤 외줄 멜빵 아래 그의 상의가 찢어져 맨살이 보인다.
그림 오른쪽에 도시락과 숟가락이 놓인 것으로 보아 오늘 점심도 그늘 없는 이곳에서 해결할 모양이다. 작품 속 노인과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있어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무명의 노동자이며,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모습이라는 의미다. 그들에겐 혁명의 대의명분보다 빵값이 더 중요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으려면, 근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든 일도 사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 역시 밀레의 것처럼 '팔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1792년 7월 12일, 입법의회는 정규군 보충병 5만 명을 징집하고 42개의 새로운 의용군 대대를 편성하기 위해 33,600명을 소집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파리에서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는 격문이 공포되자 단 일주일 만에 1만 5천 명의 시민이 의용군으로 자원했다. 그러나 8월 봉기로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고립된 가운데 오스트리아 군이 프랑스 북동부 지역인 롱위, 베르됭을 점령했다. 8월 19일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국경을 넘었고, 10월 초 동맹군사령관 페르디난트가 파리에 입성할 기세였다.
8월 말 코뮌 당국은 3천 명의 국내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했다. 감옥에는 수감자가 넘쳐나면서 이들은 동맹군의 승리를 축하했고 파리 입성 후 보복을 벼른다는 이야기가 외부로 퍼졌다. 마라가 일선으로 출발하는 연맹병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적을 먼저 제재하지 않고는 움직이지 말라”라고 선동했다. 푸아소니에르 포부르 구 등 네 개 구에서 9월 2일부터 6일까지 투옥된 귀족과 선서 거부파 성직자 등 1,000~1,400명 정도를 약식 재판 후 처형했다. 의회와 임시 정부 모두 방조한 가운데 저질러진 이 잔인한 사건을 제1차 공포정치의 절정 ‘9월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에서 민중의 공포에 질려버린 브리소파(훗날의 지롱드파)가 보수화하면서 자코뱅 좌파인 몽테뉴파(훗날의 산악파)와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제부터는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혁명 이념의 대립이었다. 지롱드파는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 보장을 혁명 이념으로 내세웠다. 산악파는 사유권조차 없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물질적·정치적 평등을 실현코자 했다. 농지법과 징발법에서 공방이 시작되었다. 산악파는 사유 제도를 전제로 소토지라도 농민들이 소유해야 하며, 전쟁 물자에서 강제 징발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지롱드파는 이것을 공산주의적 수법이라고 비난했으나 자기모순에 봉착했다. 선전포고를 끌어낸 차제, 승리를 위해 불가피한 징발을 비난했다는 점에서 계급의식만 드러낸 모양새였다. 결국 민중과 유리됐고, 로베스피에르가 민중의 대변자로 나설 토양을 구축해 주었다.
하지만 두 파벌은 국민공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대해야만 했다. 선거에서 지방은 여전히 보수적인 경향을 노출했으나 파리는 공화주의자의 압승으로 끝났다. 남성만의 보통선거로 뽑은 749명의 의원 중 약 165명을 차지한 지롱드파가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산악파는 열세였다.
1792년 9월 20, 발미 전투에서 상퀼로트의 군대가 처음으로 유럽 최강 프로이센 군대를 물리쳤다. 통일된 제복도 없고 총도 한번 제대로 쏘지 못했던 군대가 7년 전쟁으로 훈련된 직업 군대에 성공적으로 대항한 것이다. 당시 발미 전투 현장에 있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외쳤다.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 혁명사≫)
화가이자 석판화가 호라스 베르네와 장 빅터 아담이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발미 전투를 주제로 1826년과 1837년에 각각 그림을 그렸다. 베르네는 포병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부상자가 발생한 현장을 묘사(대문 그림)했고 아담은 좀 더 전투가 진행되었을 때의 모습을 담았다. 8시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300명, 프로이센 군은 184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로이센 군은 상대적으로 손실이 적었다. 그러나 '파리로 가는 산책' 쯤으로 여겼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충격이 컸다. 열흘이 지나 후일을 기약하고 라인 강 건너로 철수했다. 따라서 발미 전투는 승리의 규모보다 적들의 파리 입성을 무산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제 공화국 군대를 거느리게 된 프랑스는 10월 8일 베르됭, 22일에는 롱위를 수복했다. 더불어 제1차 공포 정치도 종료되었다.
발미 전투를 치른 9월 20일은 혁명에서도 변곡점을 맞이한 날이었다. 그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의원들은 마침내 왕권 폐지를 의결함으로써 입헌군주파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공식적인 선언은 없었지만, 프랑스는 이제 공화국으로 새 출발했다. 제1공화정으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럼, 혁명은 이제 끝난 것일까? 지롱드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동 시민과 함께 프랑스 중앙 정치 무대의 주역이 된 산악파는 생각이 달랐다. 희생을 무릅쓰고 얻은 지금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외세 및 국내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패배는 곧 왕권의 부활이며, 과거 노예 상태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코뮌에 기반한 순수 독재제도를 원했고, 당통은 자신이 통치자가 되리라 믿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장 폴 마라는 ‘인민의 벗’을 통해 귀족과 성직자 학살을 선동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반혁명 세력을 향한 공포 정치는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방어수단이었을지 모른다. 또한 전쟁이 불리할 때 횡행했던 공포 정치가 공화국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하면 비로소 잦아드는 현상도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