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프랑스 동맹(1793~1797) 결성
루이 16세를 처형한 이후 1793년 프랑스 정치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연초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연이어 승리했다. 니스와 사부아를 정복했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국민공회는 이에 힘입어 2월 1일 영국과 홀란트(네덜란드 서부)에 선전포고했다. 이때 정치적으로 중요한 쟁점이 등장했다. 니스와 사부아가 전제 군주제를 타도하고 프랑스 공화국에 합병되기를 청원했다. 언뜻 간단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9일 공회가 “유럽의 현 정부를 무너트리려고 자유를 회복하려는 모든 인민에게 우애와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이 있었다. 전쟁 목적이 해방이지 정복에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로 인해 지롱드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합병은 ‘이전 왕정의 행동을 답습하는 것’이라는 원칙론과 ‘그럼, 누가 전쟁 비용을 부담할 것이냐?’라는 현실론이 맞섰다. 결국 공화국 정부는 니스와 사부이와 함께 1793년 3월 벨기에와 라인강 좌안의 독일마저 합병했다. '혁명의 수출'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불안정한 아시냐의 가치를 유지할 전리품을 약탈하기 위한 침공(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행위였다. 특히 신앙심이 남달랐던 벨기에에서 사정없이 교회 재산을 몰수하자 혁명은 피정복 국가의 독립을 파괴하고 부를 수탈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그간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영국 윌리엄 피트 수상이 유럽 각국을 불러들여 1793년 3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했다. 프랑스는 스위스 및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을 제외한 전 유럽 국가(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공화국 등)와 전면전에 돌입했다. 곧바로 프랑스의 기세가 꺾이면서 전선이 국내로 후퇴했다. 이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원인은 병력의 급감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배신에 있었다. 1792년 12월 일선에 배치된 군 병력 약 40만 명이 불과 석 달 후인 1793년 2월 무려 22만 8천 명으로 줄었다. 군 수뇌부의 부패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많은 의용군이 최소한의 의무만 마치면 귀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미 전투의 승리자' 뒤무리에 장군이 반혁명을 도모했다. 1792년 그는 북부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발미와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벨기에까지 침공했다. 이후 지속적인 승리의 여세를 몰아 파리에서 국민공회를 해산한 후 사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를 군주로 왕정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1793년 3월 18일 베르빈덴(오늘날 벨기에 지역)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때 그는 라파예트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코부르크와 내통한 후 병력을 이끌고 파리로 회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부대의 저항으로 실패했으며, 국민공회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고발했다. 뒤무리에는 루이 필리프와 함께 약 1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4월 2일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쳤다.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꼼뮨까지≫) 국내 잔류 중이던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즉 루이 16세의 종형제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 2세 조제프만 유탄에 맞았다. 앞서 말한 대로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했다.
한편, 전쟁이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국민공회는 2월 24일 근대사 최초로 전국 30만 명의 의용군을 모병했다. 말이 모병이지 실은 강제 동원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서부 지방에서는 증세와 사회 안전망으로써 교회의 자산이 사라진 것에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 성직자와 귀족들이 여러 도에서 오래전부터 반란을 준비해 오던 중 이 법이 스모킹 건으로 작동하면서 3월 10일부터 방데에서 반란이 시작됐다. 방데 지방은 중세부터 변함없이 브르타뉴어를 사용하는 등 프랑스 북부와는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또한 반란의 근원에는 사회, 경제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농민의 입장에서 혁명은 가치를 상실했다고 여겼다.
때맞춰 국민공회가 징집 문제와 관련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징병 방식을 명확히 하지 않고 지방 당국에 일임했기에 결국, 지방 간 경쟁에 내맡긴 셈이 되었다. (알베르 소불, ≪프랑스혁명사≫) 의용병 결정 추첨이 예정된 3월 11일에 멘에루아르주 숄레 사람들이 궐기하자 불과 10여 일 만에 서부 지역 3분지 2 이상에서 동조했다. 귀족과 민중 봉기가 결합한 반란이었다.
유산계급의 특권을 지키는 데 급급했던 지롱드파는 정복 지역을 희생시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시냐의 가치 하락이 계속되어 2월에는 명목 가치 대비 50퍼센트로 떨어졌다. 밀은 풍년이었으나 유통되지 않아 빵 가격이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내무장관이자 경제 책임자 롤랑은 곡물 조사 강행이나 징발을 위한 법 집행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봉자인 그는 소요가 곳곳에서 터졌음에도 공정가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이 그린 <앙리 드 라 로슈쟈클랭>을 보면, 반란이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지휘관은 운송업자 카텔리노였다. 이어 그림 속 주인공 라 로슈쟈클랭이 2만 명에서 4만 명으로 늘어난 병사를 이끌었다. 귀족 출신인 그는 스무 살 앳된 청년이었다. 대혁명 당시 국왕의 신변 보호를 맡았으나 튈르리 궁전 습격 사건으로 고향에 피신해 있었다. 4월 13일 주민을 이끌고 전투에 나선 그는 퐁트네 르 콩트에 입성했으며 6월에 소뮈르, 앙제를 점령했다. 오른손에 부목을 댄 그의 등 뒤에는 "국왕 만세"라고 적힌 백기가 펄럭인다. 그리고 그의 왼쪽 가슴에 단 심장과 십자가 표시는 '신은 왕이다'라고 수놓은 글씨와 함께 왕당파 휘장을 이룬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병사들을 고무했다.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라라! 하지만 내가 후퇴한다면, 나를 죽여라! 그리고 내가 죽으면, 원수를 갚아다오!”
그러나 반란군은 서전의 우세를 잃고 패주를 계속했다. 그해 10월, 라 로슈쟈클랭은 반란군 3대 총사령관으로 취임했지만 12월 전투에서 괴멸했다. 이후 게릴라전을 지휘하던 그는 이듬해 1월 28일 스물한 살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군인으로서 그의 당당했던 모습은 게랭의 그림을 통해 생명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멋진 말은 왕당파의 비타협성을 보여줄 뿐이다. 정부군 지휘관 루이 라자르 오슈가 반란군 농민에 대한 관용 정책을 추진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농민들이 이탈하기 시작한 반란군은 1795년 2월까지 계속 와해됐다. 179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평정이 선언되었다. (대문 그림: 역사화가 폴 에밀 부티니, <1793년 3월 11일 멘에루아르 주 숄레 전투를 이끄는 라 로슈쟈클랭(1899)>)
한편, 1793~1794년간 대(大) 공포정치 아래 혁명정부군의 대처는 잔인했다. 지역을 초토화했고, 전쟁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살해했다. 장 바티스티 까리에가 2,000명을 루아르 강에 익사시킨 '낭트 수장(水葬)'도 이때 저질러졌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반란으로 인한 사망자가 약 30~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방데 반란이 ‘서부 전쟁’으로까지 불리는 까닭이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혁명 기간 중 가장 처참한 살육이 이뤄진 방데 반란과 관련한 이야기는 금기시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