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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ug 28. 2024

프랑스 인권선언과 10월 봉기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흘 뒤인 1789년 7월 17일 루이 16세가 파리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것은 국왕이 폭동 주도자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혁명을 추인하는 행위였다. 왕은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 라파예트와 새로운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모장(帽章)을 받아 들었다.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흰색 양측에 파리시의 빨강과 단결의 파랑을 더한 휘장이었다. 동시에 모든 파리 사람들의 입에서는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파리에는 라파예트를 원수로 하는 국민방위대가 들어섰다. 

이 소식은 파리와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7월 16일부터 19일 사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힘을 얻어 처음에는 도시에서, 7월 말부터는 지방의 농민들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농업국이었다. 1846년 인구 조사에서도 농촌 인구가 전체의 75퍼센트를 차지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대혁명이 발생하고 68년이 지나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기 때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그런데 왜 앞당겨 이 시점에서 그림을 소개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혁명 당시 농민들의 생활 현장을 담은 그림은 없다. 당시에는 그림에도 서열이 있었다. 왕과 귀족의 구미에 맞는 역사화와 초상화만 팔렸다. 따라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화가들이 돈 많은 수집가의 취향을 거슬러가며 독창성을 발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문제는 도시 노동자에 관한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밀레는 파리의 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그림 <목욕>을 보던 남자들이 나누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신실했던 그는 ‘벗은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만 그리는 화가’라는 그들의 평가에 충격을 받고 바르비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하늘이 3분지 1, 땅이 3분지 2의 구도로, 농민이 발 붙이고 사는 대지가 강조되었다. 세 명의 가난한 농촌 여인들이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낟알을 줍는다. 이삭 줍기는 당시 농민의 팍팍한 일상이었다. 그것도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오른편 멀리서 말을 탄 마름이 이들을 감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한 무리는 추수한 밀을 마차에 가득 실어 나른다. 하지만 이들도 실속 없긴 마찬가지다. 소작농이기 때문이다. 우린 도시로 떠난 사내를 대신한 그녀들의 갈라지고 햇볕에 탄 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도 아닌 밀레가 농촌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작품임에도 “비열하게 빈곤을 가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는 오히려 밀레가 농촌의 현실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고 비판했다. (제목 그림: 레옹 레르미트의 같은 제목 <이삭 줍는 여인들(1887)>)

레옹 레르미트, <수확하는 사람들의 급여(1882)>

오히려 사실주의 화가 레르미트가 뒤늦게 그린 <수확하는 사람들의 급여>가 좀 더 현실에 근접했다. 아래위가 온통 땀에 젖은 농부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어깨에서 쉬고 있는 큰 낫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잠시 후 낫도 농부를 따라 밀밭으로 일 나가야 한다. 사내의 표정엔 옆에서 오가는 품삯 몇 푼에 만족도, 불만도 발견할 수 없다.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1930)> 속 인물과 흡사하다. 정직한 대지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고지식함이다. 그러나 며느리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건네주는 한 푼 한 푼에 매우 진지하다. 갑자기 가슴이 시려온다.


대혁명 당시 농촌 실정은 밀레나 레르미트가 담았던 풍경보다 더욱 처참했다. 농사는 수지가 안 맞았고, 경작 방법은 원시적이었으며, 수확량은 미미했다. 그리고 프랑슈콩테와 니베르네 지방에는 아직도 백만 명 가까운 농노가 존재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착취로 인한 빈곤, 기근과 생계비의 앙등, 굶주림과 비적에 대한 공포, 과장되고 모호한 소문, 봉건제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이러한 모든 것이 결합해 ‘대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성을 공격하고, 재산 관리인에게 항거했으며, 노비 문서를 불살랐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받았다고 느끼게 되면서 농민과의 사이에 적대 관계가 형성됐다. 공권력의 무력화와 모든 권위의 해체, 그리고 토지 해방에 직면한 부르주아는 스스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특권 계급과 연대를 맺었다. 부르주아의 태생적 한계였다. 부르주아 모두가 이익만을 추구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이성이 일치한다고 확신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8월 3일부터 국민의회는 서둘러 농민 문제를 토의했다. 탄압 정책이 야기할 위험을 인지한 가운데 이튿날 밤 회의에서 성직자와 귀족 대표가 신분적 특권인 봉토와 십일조를 포기하기로 선언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보 사항이 삽입되었다. 인신 부과조(賦課租)는 폐지되었으나, 토지 부과조는 돈을 주고 되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농민은 해방되었지만, 농민의 경작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본질적인 면에서 봉건 체제가 여전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8월 11일 승인된 법령은 유보 조건에도 불구하고 봉건제 폐지를 알리는 공식 선언이었다. 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8월 26일에는 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 선언)’을 채택했다. 자연권 사상과 계몽주의 사상을 담았으며,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많이 반영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법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구체제(앙시앙 레짐)가 해체되고, 왕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틀이 만들어졌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에 비해 약 1,000만 명이 늘어난 2,400만 내지 2,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인구의 증가는 소비 확대와 함께 상업을 증진한다. 반면 인플레이션을 동반한다. 그 결과 성공한 부르주아들은 귀족의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늘릴 수 있었으나 하층 농민과 도시 빈민의 삶은 여전히 척박했다. 차제, 망명자들이 부를 국외로 유출함으로써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실업자가 증가했고, 전년도 대흉작과 밀의 타작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파리의 빵값이 치솟았다. 파리 노동자의 명목 임금은 22퍼센트 올랐으나 실질 임금은 반 이하로 떨어졌고, 생활비 중 88퍼센트가 빵값으로 지출되는 형편이었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이제 누군가가 뺨을 살짝만 건드려도 가난한 백성은 울음이 터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불온한 분위기가 확산하는 가운데서도 루이 16세는 인권 선언에 대한 재가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또한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킨 후 외국 왕실과 협상을 벌이면서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여전히 국가가 그의 개인 소유라고 여긴 행위였다. 때마침 10월 1일 베르사유궁에서 뜻밖에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에게 가장 충성스럽다는 플랑드르 용병 연대를 위한 향연이 열렸다. 그런데 연회가 열리는 오페라 하우스에 삼색기 대신 왕과 왕비의 표지인 백색과 흑색 휘장이 달렸다. 

장 폴 마라 등 기회를 노리던 과격파들은 왕이 혁명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였다. “왕실이 백성을 죽일 살인자를 불러들였다”며 시민의 불만과 원망을 다시 응집했다. “빵을 달라”라고 파리 시청에 몰려들었던 7천여 명 여인들의 발걸음을 베르사유궁으로 돌려놓았다. 10월 5일 약 20킬로미터가 넘는 행진에는 라파예트의 명령을 무시한 국민방위대도 동참했다. 2만여 명으로 규모가 커진 시위대가 궁전까지 밀고 들어가 여러 명의 병사를 살해했다. 당황한 루이 16세가 인권선언을 재가하면서 왕실을 파리로 옮기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6시간에 걸쳐 파리에 도착한 왕실은 루이 14세 이후 150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튈르리 궁에 짐을 풀었다. 이때 국민의회도 함께 파리로 왔는데, 이때부터 왕과 의회는 민중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50억 리브르의 빚을 해결하기 위한 재정 문제는 10월 초부터 공론화되었다. 교회에 대한 공격은 특권 세력뿐만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한 군주제의 기초를 잠식했다. 제1신분 대표자 오툉의 주교인 탈레랑의 제안에 따라 11월 2일 교회 재산을 몰수하기로 결의했다. 국가 전체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교회의 토지와 건물은 약 30억 리브르의 가치가 있었다. 파리시와 지방자치단체는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연리 5퍼센트의 지폐 아시냐(Assignat)를 발행했다. 

헌법에 맹세한 성직자를 기념하는 1790년 접시

이어 1790년 7월 12일, 국민의회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가결했다. 약 150개의 교구를 새로 제정된 행정구역에 따라 83개의 도에 일치시키고 성직자들을 일반 공무원으로 신분을 바꾸는 법령이었다. 나아가 성직자에게 교황이 아니라 국왕과 헌법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선서를 요구했다. 네 명을 제외한 모든 주교가 선서를 거부했고, 성직자는 선서 사제와 비선서 사제로 나뉘었다. 인권 선언을 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비난한 바 있던 교황 피우스 6세가 1791년 3월 10일 종교 헌장을 비난하면서 프랑스와 외교를 단절했다. 

개혁 정책도 삐끗했다. 봉건제도 폐지로 인한 토지 공매는 부르주아의 배만 불렸다. 이를 피하고자 발행한 아시냐는 단기간 재정 확보에는 기여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여 가치가 하락했다. 차제 신심이 깊었던 루이 16세는 의회가 신앙 문제에 지나치게 간여한다며 혁명에 더 이상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신의 대리인인 국왕과 교회는 원래 한 몸이었다. 결정적으로 의회 내 세력 간 균열이 생겼으며, 왕당파의 지방 소요와 망명 귀족들에 의해 불안감 조장되었다. 이래저래 반혁명파에서는 혁명을 뒤엎을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즈음 혁명의 분기점을 이룰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 가족의 바렌 도주와 라파예트 국민방위대에 의한 샹 드 마르스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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