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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ug 21. 2024

1789년 7월 14일, 혁명의 탄생

국민의회에서 제헌의회로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에 발생했다. 민중에 의해 30미터 높이의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된 날이다. 중세 시대 요새였던 이곳은 17세기부터 국사범 감옥으로 쓰였기에 절대 왕정을 상징한다. 신고전주의 화가 장 피에르 루이-로랑 우엘이 캔버스에 현장을 담았다. <바스티유의 폭풍(1789)>이다. 역사화로선 작은 크기(38.8Ⅹ50.5센티미터)고, 유화가 아닌 수채화 작품이다. 개인 소장을 위한 그림으로 보인다.

우엘은 루이 15세 때부터 나폴레옹 제1 제정 시대까지 목도한 화가였다. 그림에는 일부 성벽이 무너진 가운데 민중이 무장했다. 실제 그들은 보훈병원 앵발리드 병기고에서 소총 2만 8,000정, 대포 5문을 약탈했다. 그리고 화약이 저장된 것으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다. 사령부 안마당으로 통하는 도개교가 내려졌고, 곧이어 포를 쏘며 상호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충돌로 수비대 측에서는 1명이 죽고 3명이 다쳤으며, 습격 가담 인원 중에는 사망자 98명, 부상자 73명이 발생했다. 반면 투옥된 죄수는 고작 잡범 7명이었다. (Wikipedia) (제목 그림: 작가 미상, <바스티유의 폭풍(1789)>)

 

군중은 개인과 다른 별도의 심리를 지녔다. 흥분한 시위대는 항복한 수비대 사령관 드 로네이와 파리 시장 플레제이유의 머리를 창끝에 꽂고 거리를 누볐다. 폭동은 3일간 거리를 휩쓸었고, 최소 백 명이 처형되었다. 유럽 전체가 경악했다. 또한 민중 역시 자신의 폭발적인 힘에 스스로 놀라워했다. 온종일 사냥하느라 고단하게 잠들었던 루이 16세는 이튿날 아침 리앙쿠르 공작에게서 바스티유 습격 사건을 전해 들었다. “반란인가?”라는 국왕의 물음에 리앙쿠르가 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이것은 혁명입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권력 구조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하는 혁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18세기에는 세 혁명이 대표적이다. 정치 혁명으로서 미국독립혁명, 경제 혁명으로서 영국 산업혁명 그리고 사회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이다. (J.네루, <세계사 편력>)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나랏빚은 무려 45억 리브르에 이르렀다. 루이 16세가 즉위한 1774년 약 15억 대비 세 배나 늘어난 수치였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루이 14세와 15세가 무려 131년을 통치했으니 빚의 책임은 온전히 전임 국왕들이 남긴 것이다. 그러나 1788년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강대한 국가였고, 인구는 유럽 총인구의 16퍼센트인 2,600만 명이었다. 반면 영국은 1,500만, 프로이센은 800만 명에 불과했다. 군사력도 미국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게다가 루이 16세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지도 않았고, 왕비 외 정부도 두지 않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프랑스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래, 부채의 근원인 미국 독립전쟁(1775~1783) 지원 당시로 돌아가 보자.

에마누엘 로이체의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1851)>. 1776년 12월 26일 새벽의 모습으로, 매우 상징적이나 이 깃발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1776년 12월, 루이 16세는 아메리카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지원병이나 몰래 함대를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본격적인 참전이었다. 7년 전쟁 때 영국에 당한 앙금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다. 은행가였던 신임 재무대신 자크 네케르가 전쟁 비용을 조달했다. 그는 추가 세수에 의존하지 않은 채 국채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전쟁과 재정 모두 순조로웠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1787년에 이르러 세수의 절반 이상을 이자 갚는 데 사용해야 했다. (로버트 B. 쥘릭, ≪세계 속의 미국≫) 네케르는 실패를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1781년 프랑스 최초로 <국가 재정에 관한 공식 문서>를 출간, 공표했다. 그러나 문서에는 5,000만 리브르의 적자를 1,000만 리브르로 거짓 기재했다. ‘예외적인(특히 전쟁으로 인한)’ 지출을 일부러 계산에 넣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시점에 거꾸로 안도감을 준 행위였다. 

구체제의 모순을 풍자한 만평(1789). 제1, 제2 신분을 제3 신분이 등골이 휘어지게 떠받들고 있다

후임 칼론이 절망했다. 그는 정공법을 택하면서 1786년 새로운 토지세를 제안했다. 하지만 거짓 재정 상태가 국민에게 각인된 차제, 정부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은 설득력을 잃었다. 왕실과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여겼다. 명사회도 개혁안에 반발하면서 칼론이 물러났다. 브리엔에 이어 다시 부임한 네케르는 자기 재산 200만 리브르를 국고에 헌납했다. 그러나 미봉책이었다. 1773년 이래 흉작이 빈번해지던 중 1785년 대한발과 1788~89년 겨울 한해(寒害)는 식량 위기를 가져왔다. 1776년과 1789년 사이 평균 물가가 65퍼센트나 뛰었다. 네케르도 혹한과 기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특권만 주장하는 2퍼센트, 약 27만 명의 성직자와 귀족들이 양보할 차례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관직과 국토의 40%를 차지하던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신분제는 영국과 달리 지나치게 강고했다.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제1신분)’, ‘싸우는 사람(귀족, 제2신분)’, ‘일하는 사람(평민, 제3신분)으로 역할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고등법원이 규정에 따른 총신분회(삼부회) 개최를 고집한 이유도 이 점에 기반했다. 


네케르는 1789년 1월 1일, 제3 신분 대표의 정원을 두 배로 늘린 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머릿수에서라도 특권계급의 우세를 무너트림으로써 국왕의 최종 결정권을 보장하려 의도였다. 하지만 표결 방식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총신분회는 루이 13세 이후 175년 동안 잠자고 있던 제도였다. 대표자 수는 성직자 291명, 귀족 270명이지만 평민은 무려 578명으로 늘어났다. 모든 신분이 절대주의에 반대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각 신분 별로 갈등이 존재했다. 제1 신분에서는 주임 사제, 제2 신분에서는 지방 귀족이 기득권층과 대립했다.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혁명 바로 전 15년 동안 대성당의 90퍼센트가 귀족 출신인 반면 교구민의 기부에 의지해야 하는 작은 교구의 사제는 주로 제3 신분 출신이었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 성찰≫ 중 이희영의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혁명 산책>) 제3신분 대표는 출신 구애 없이 선출했기에 구성층이 다양했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웅변가이자 정치사상가 미라보 백작이 출마했다. 난잡한 사생활과 과격한 언동으로 귀족 계급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 출신으로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시에예스가 동참했다. 전체적으로 제3 신분 대표들의 자질은 우수했다. 정치가보다 법률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간접 선거로, 농민과 도시 민중을 직접 대표하는 인원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비드의 제자 오귀스트 쿠데르의 <총신분회 개회식(1839)>, 귀족의 화려한 예복과 달리 제3 신분 대표들은 단 아래 검은색 정장의 검소한 차림이다

5월 5일, 개회식이 열렸다. 국왕은 중립을 자처하며 의례적인 개회사로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실망한 채 회의장을 빠져나온 제3 신분 대표는 머릿수에 의한 투표를 요구했다. 기존 신분별 투표로는 2:1 상황에 고착되어 자신들은 거수기에 그칠 노릇이었다. 6월 17일이 되자, 제3 신분 대표는 대담하게도 임의의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새로운 시대에 맞아 자신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표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국독립혁명 때 등장한 구호와 동일했다. 국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6월 23일 국왕 주재 전원회의’를 공고 후 휴회 중 국민의회가 사용하던 의사당을 폐쇄했다. 이튿날 입장하지 못한 의원들은 인근 체육실 겸 실내 테니스장 주 드 폼(Jeu de Paume)에 모여 국민의회 절대 사수를 서약했다. 로베스피에르는 45번째로 서약했다.


다비드의 미완성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1)>

다비드가 그린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왼쪽 창문으로 군중의 열기가 밀려들어 커튼이 마치 혁명 깃발처럼 펄럭인다. 중앙 단상 위에서 제3신분 의장이자 혁명 후 파리 시장이 되는 장 실뱅 바이이가 선언문을 읽자 결의에 찬 인원들이 손을 뻗어 이에 호응한다. 그런데 전경 오른쪽 하단에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인 인물이 보인다. 유일하게 선언에 반대한 조제프 마르탱 도슈다. 동료들이 “죽음!”이라고 외치며 겁박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왕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1년 넘게 스케치했던 그림은 미완성이었다. 참석 의원 다수가 그들의 옷에 물감을 칠할 틈도 없이 단두대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서약이 있은 후 2년 뒤 작품으로, 다비드는 혁명 동지 장 폴 마라 등 당시 현장에 없었던 상징적인 인물을 포함했다. 그러나 서약에 반대했던 인물 조제프 도슈가 포함되었기에 다비드의 혁명 그림 중 가장 사실적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전날 제1신분 대표들이 국민의회 합류를 의결한 가운데 6월 23일 루이 16세가 주재한 전원회의가 열렸다. 국왕은 긴장한 가운데 국민의회 의원들을 향해 서약 파기와 신분별 표결 방식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어 제3 신분 의원들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미라보가 외쳤다.


“국왕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인민의 의사로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니만큼 총검 끝으로 밀리지 않는 한 퇴장하지 않을 것이오!”


‘정직한 무능력자’ 루이 16세가 이에 분노했다. 그는 “남아 있고 싶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라”라고 했다. 제3 신분에겐 국왕이 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테니스 코트 서약 이후 왕의 종형제 오를레앙 공을 추종하는 제1, 제2신분 47명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자 국왕으로서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땐 특권계급조차 자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국민의회는 7월 7일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7월 9일 ‘헌법 제정 국민의회(제헌의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즈음 왕실이 국민의회와 파리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하려 든다는 둥 각종 흉흉한 소문이 유포되었다. 7월 11일 불에 기름 붓듯 시민의 영웅으로 부상한 네케르가 파면되고 후임으로 강경파 브르퇴유 남작이 임명되었다. 젊은 변호사 카미유 데물랭이 갑자기 의자에 올라가 “무기를 들라”며 맹렬하게 선동했다. 격앙된 파리 민중이 네케르의 흉상에 명주 베일을 씌우고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결과적으로 총신분회 개최는 프랑스 대혁명과 국민 국가의 탄생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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