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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ug 07. 2024

로코코와 마담 퐁파두르

여인이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치맛자락이 벌어져 속옷이 드러나고··· 로코코의 전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1767)>다. 이도령이 수작을 걸 때도 춘향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자고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인의 그네 타는 모습은 사내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하는 가 보다. 특히 18세기 여성들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그림을 의뢰한 생 줄리앙 남작은 "사랑스러운 여인의 다리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을 그려 달라고 했다. 요청을 받은 화가들 중 유일하게 프라고나르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림이 완성됐다. 그러나 프라고나르는 오른편 어두운 곳에서 그네를 밀고 있는 남자를 일부러 늙게 그렸다. 그녀의 아버지일 수도, 나이 차이가 나는 남편일 수도 있다. 최초 사제로 그려 달라는 요청이었지만, 세속적인 프라고나르도 차마 원하는 대로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왼편 큐피드 조각상이 이 은밀한 비밀을 지키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그러나 반전은 벗겨져 달아나는 신발, 하이힐에 있다. 숲에 있는 연인에게 “당신, 거기 있었군요”라며 던지는 은근한 유혹이다. 성 해방을 암시한다. 하이힐은 스페인의 무어인 여자들이 신었던 나막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최초에 실용적인 이유로 유행했다. 17세기 초 도로의 깊은 진흙탕을 건널 때 높은 굽이 환영받았다. 당시 유럽에서 돌을 깐 인도는 어디에도 없었고, 도시 뒷길은 쓰레기나 인분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비라도 내릴라치면, 통상적인 신발을 신고서는 그 결과가 참혹했다. 

그런데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으면 몸의 굴곡이 강조된다는 점을 곧 깨달았다. 앞으로 넘어지지 않으려면 몸을 뒤로 젖혀야 한다. 이 때문에 엉덩이와 가슴이 도드러지게 강조된다. 특히 무릎을 굽히지 않고 허리를 쭉 펴면, 불쑥 내민 앞가슴이 터질 듯 도발적이다. 전체적으로 젊고 진취적으로 보인다. 하이힐에 대한 여성의 사랑이 오늘날까지 여전한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간통과 기만에 대한 찬가인 이 작품이 로코코 사회의 풍속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실제 프랑스 혁명 때 그림은 몰수되고 소유자는 단두대에 올랐다고 한다.


모리스 캉탱의 파스텔화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1755/1756)>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그녀의 유화 초상화(제목 그림)와 비교하면, 비슷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그녀는 국왕 루이 15세의 정부였다. 매우 예뻤다. 그리고 지성적이며,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다. 1750년경부터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음에도, 사냥과 각종 사교 모임에 동반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캉탱의 초상화는 그녀의 지성미가 강조됐다. 과리니의 희곡 <충직한 양치기>,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전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볼테르의 <앙리아드>가 배경을 이룬다. 악보를 보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옷은 세련되지만, 일부러 보석 등 장신구를 생략했다. 서른네 살 그녀의 우아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다. 그녀는 독서 폭이 넓어 서가에 책이 3,500여 권이 있었다. 또한 아마추어 소극장을 운영,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거나 노래까지 했다. 그러니 캉탱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 만했다.

와토의 뒤를 이은 로코코 미술의 대표 화가 부셰 역시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향력 있던 여성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프라고나르의 그림 공부를 지도한 스승이다. 그가 그린 그림 속 퐁파두르 부인은 무심한 듯 우아하다. 오리엔트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부셰는 그녀의 희고 투명한 피부에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의상과 장식물 등을 배합함으로써 로코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그녀의 손에 쥔 책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고상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장식적이다. 부셰는 그녀의 변함없는 젊음과 관능미를 강조했다. 국왕에게 자신이 늘 젊고 미모의 여인으로 비치길 갈망하는 그녀의 심리를 간파한 결과다. 이점이 부셰가 그녀로부터 꾸준히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의 초상화 작품은 모두 12점에 불과한데, 그중 7점이 퐁파두르 부인의 것이었다.

 

퐁파두르는 평민이었던 어머니 루이즈 마들렌에 의해 훈련되었다. 아버지가 금전 사고로 몰락한 후 그녀의 어머니는 부유한 르 노르망 드 투르넴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의 돈으로 딸이 다방면에 걸쳐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고향 사투리 억양을 모두 없애고, 고급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했다. 1745년, 루이 15세는 스물네 살의 퐁파두르를 루이 드 프랑스 왕세자 결혼 축하연에서 만났다.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사람이 그녀가 인사하는 모습에 반해버렸을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유부녀였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왕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가기 위해 후작령을 구입해 작위와 함께 건네주었다. 

총명한 퐁파두르는 늘 겸손했다. 덕분에 만만치 않은 궁중 생활 속에서도 약 15년 넘게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고, 막후 실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루이 15세는 독서를 멀리했고 세상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사냥과 환락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왕은 호색한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왕을 질투하는 대신, 심지어 채홍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젊음이 시들어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인정하는 훈련된 태도일 수도 있다. 그랬던 그녀가 40대 초반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식 부인이 아닌 관계로 장례에 직접 참석할 수 없었던 국왕은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마담 퐁파두르는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경국지색이었다.

 

퐁파두르 사후에도 부셰의 명성은 여전했다. 38년 동안 쾌락만을 추구했던 루이 15세가 그가 그린 <마드무아젤 오머피(혹은 금빛 오달리스크, 1751)>를 보았다. 루이즈 오머피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부모의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카사노바의 눈에 띄어 세상에 그 미모를 알렸다. 오머피가 맨몸이 부끄러운 듯 엉덩이를 드러내고 소파에 엎드려 있다. 당시 열세 살 어린 소녀로서는 대담한 자세다. 이부자리가 어지럽혀 있고, 바닥엔 꽃 한 송이가 꺾어진 채 떨어져 있다. 향기가 날 듯 싱싱한 것이 이래저래 남성의 관음증을 유발한다. 1753년 오머피가 국왕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왕을 위한 전용 사창가 '파르 코 세르프'에서 머물며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5만 리브르를 손에 쥐고 귀족 자크 드 보프랑슈와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퐁파두르와는 대접이 달랐다. 

여하튼 부셰는 당시 귀족뿐 아니라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속물적 취향을 정확히 반영했다. 그의 회화는 가볍고, 밝고, 에로틱하며, 호화스럽다. 반면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그 자신이 이런 유행과 취향을 즐긴 결과다. 1765년 그는 궁정 수석화가, 왕립 미술 아카데미 교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비평을 망설이지 않았던 평론가 디드로가 그의 그림에 대해 말했다.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누구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런 광경을 엉터리라고 생각할 테지만, 거기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혹적인 악(惡)이기 때문이다.”


부(富)는 숙명적으로 공평해질 수가 없다. 귀족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면, 상대적으로 서민들의 등골은 휘게 마련이다. 따라서 화려함은 경박함이 되고, 잠시 유행으로 머물다 결국 종말을 맞는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퐁파두르 부인의 명성도, 로코코 미술도 모두 같은 운명이었다. 그녀가 죽자마자 사치의 대명사로 전락했듯이 부셰의 작품도 조롱을 받았다. 그가 죽은 지 10년, 새로운 양식이 프랑스를 사로잡는다. 미술을 통해 도덕적 교훈을 전달할 수 있다는 신고전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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