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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ul 31. 2024

루이 15세와 7년 전쟁

장 앙투안 와토, <제르생 화랑의 간판(1720)>

<제르생 화랑의 간판>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했다. 서른일곱 살에 요절한 장 앙투안 와토가 그렸다. 대중의 기억에는 그의 대표작이 <키테라섬으로부터의 출항(1717)>으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프랑스 회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와토는 친구 제르생의 골동품 상점 ‘오 그랑 모나르크’의 입구를 장식하기 위해 작품을 완성했다. 

중앙에 화랑 주인 제르생이 와토의 ‘페트 갈랑트(우아한 향연)’ 양식의 작품을 받쳐 들고, 손님에게 설명한다. 두 명의 미술 애호가는 그중 님프가 목욕하는 장면에 유독 집중한다. 그리고 보니 벽에 걸린 그림 대부분이 누드화다. 오른편 직원은 그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 손님을 위해 장식물을 소개하며 거울을 비춰준다. 관능적인 그림과 장식품 모두 로코코 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화랑 내 광경이다. 왼쪽 종업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 한 명이 유행이 지난 17세기 양식의 작품들을 궤짝에 넣고 있는데, 엊그제까지 황제였던 루이 14세의 초상화다. 하지만 우아한 뒤태의 여인이 계단을 오르며 힐끗 지켜볼 뿐 수집가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1715년, 서슬 시퍼렇던 루이 14세가 죽었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반겼다. 고등법원은 태양왕의 유언을 무효 처리하고, 그의 조카이자 사위인 필리프 오를레앙 단독의 섭정 시대를 열어주었다. 치세 초기 운이 따랐다. 경제가 1730년 이래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다. 평균 수명이 70년 사이에 21세에서 27세로 늘어나 노동량이 팽창함에 따라 18세기에 걸쳐 40퍼센트 이상 식량 생산이 증가했다. 덩달아 식민지 무역량도 10배나 늘었다.

그러자 그간 억눌렸던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슬그머니 고개 들었다. 귀족들은 베르사유궁을 떠나 파리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저택을 로코코 양식으로 꾸몄다. 로코코는 석굴이나 분수를 장식하는 데 쓰인 조개 장식 ‘로카이유(rocaille)’에서 비롯된 말이다. 과하게 꾸며진 장식을 의미하며, 귀족 취향이라는 고백이다. 프랑스 최초의 국제 양식 로코코는 1723년부터 1774년까지 성행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와토였으니 그의 <제르생 화랑의 간판>은 무상한 권력을 대하는 당시 상류사회에 대한 풍자가 가미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1720년은 프랑스와 영국 모두 경제적 위기를 맞은 때였다. 해외 무역회사의 주식 투기 열풍에서 비롯된 영국 남해 포말 사건과 프랑스 미시시피 회사 사건이 꼭짓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만 입헌군주제 하의 영국 휘그당은 이를 극복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말기부터 총체적 난국에 처했던 프랑스 재정은 뿌리 채 흔들렸다. 당시 프랑스 재무대신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였다. 섭정 오를레앙이 임명했다. 초기에는 그의 금융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여 국가 경제가 회생했다. 힘을 얻은 존 로는 1716년 5월 왕립은행을 건립하여 지폐를 사용했으며, 상업어음을 할인해 주었다. 지급준비금을 확보한 후 신용을 전제로 재정을 확충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왕립은행과 통합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이 1720년 여름부터 곤두박질쳤다. 천정부지까지 올랐던 회사의 시가총액이 무려 97퍼센트나 하락했다. 은행은 파산했고, 섭정은 존 로를 해임해야만 했다. 이때 은행권 소유자는 전국에서 약 100만 가족에 달했다. 그러나 거물급들은 손해를 피한 반면 힘없는 사람들은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 민심의 불만과 이탈이 심각했으며 국정 전반이 흔들렸다.


1723년 루이 15세(대문 사진)의 친정(親政)이 시작됐다. 그는 인물이 훤하고 친화력이 있어 백성들로부터 '친애왕'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천성이 게을렀다. 추기경 플뢰리에게 모든 국정을 위임한 채 호색에 몰두했다. 섭정 오를레앙 공에게서 보고 배운 영향일지 모른다. 다행히 ‘루이 15세의 황금시대(1763~1775)'는 계속되었다. ‘성안 사람’ 부르주아지 수가 1700년 70만 명에서 1789년에 이르러 23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금쪽같은 호기를 날려버린 결정적인 실책이 대외 정책에서 벌어졌다. 여론에 밀려 남의 나라 싸움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 뛰어든 것이다. 

174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죽기 직전에 왕위 계승 관련 법령을 고쳐 ‘남자 상속자가 없으면, 장녀에게 넘겨준다’는 국사 조칙이 발표되었다.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서다. 그러자 합스부르크 가문과 친족 관계에 있던 주변 제후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그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 계승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측에 슐레지엔 할양을 요구했다. 호엔촐레른가가 합스부르크가의 패권에 도전한 것이다.


아돌프 멘젤, <산수치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1852)>

슐레지엔은 철과 석탄이 풍부한 지역으로, 오스트리아 세금 수입의 22%를 책임지고 있는 요충지다. 결국,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군주로 불렸다. 독일 과학기술의 진보를 찬양한 아돌프 멘첼이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림을 남겼다. 프리드리히는 왕세자 때부터 볼테르와 40여 년 동안 철학적 교류를 할 정도로 교양이 높았던 인물로, 자신이 국민의 공복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즉위 후 그는 종교에 대한 관용과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근절했고, 프로이센을 유럽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수아 1세 때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정책을 고수했던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오스트리아 인구의 3분에 1밖에 안 되는 프로이센이 1, 2차 전쟁 모두 승리했다. 슐레지엔을 차지하게 된 이때부터 백성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프리드리히 대제’라 칭했다. 하지만 엑스 라 샤펠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은 프로이센만 만족하는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전통적 불화가 타당한 것인지, 프로이센의 팽창이 이젠 위협되지 않는지 되짚어봤다. 


문제의 제3차 슐레지엔 전쟁(1756~1763)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동맹국을 바꿔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훗날 윈스턴 처칠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일컬은 7년 전쟁이다. 유럽 대륙은 물론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의 개입설이 등장한다. 1744년 재상 플뢰리가 죽은 후 내각이 그녀의 변덕에 휘둘릴 때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퐁파두르를 ‘푸아송 양’ 또는 ‘2호 부인’으로 부르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다. 그녀의 본명은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하필이면 '앙투아네트'가 들어갔다.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당시 백성들이 헷갈려 왕비 앙투아네트에게 미움이 가중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프리드리히의 태도는 사실 여부를 차지하고 이래저래 루이 15세와 비교된다. 반면 프로이센의 적국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서신에서 그녀를 ‘아름다운 아우님’으로 불러 우의가 깊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참조)  

제3차 슐레지엔 전쟁 역시 프로이센 군이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이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고, 훗날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프로이센으로 말을 갈아탔던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르면서 대(大) 식민제국으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반면 편을 잘못 선택한 프랑스는 1763년 역사상 가혹한 조약 중 하나인 파리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패권을 상실했다. 5개 교역 지역을 제외한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부 지역, 인도, 세네갈, 그라나다 제도를 잃었다. 

그리고 이미 들어간 전비는 물론 육·해군 재건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재무대신 에티엔 드 실루에트가 새로운 과세 정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특권 계급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저항하여 결국 무산시켰다. 대혁명의 전조를 읽을 수 있는 특권층의 이기주의였다. 또한 7년 전쟁으로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프랑스는 루이 16세 때에 이르러 성마른 복수심으로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1774년이 되자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갑자기 운명했다. 태양왕 때처럼 그의 죽음 역시 애도하는 이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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