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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ul 24. 2024

초상화로 살펴본 루이 14세의 쇠락

“짐이 곧 국가이니라.” 이 말은 루이 14세가 직접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왕정의 대명사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말이다.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은 국왕에게 통치 권력을 부여했다는 논리, 즉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말이다. 따라서 왕권신수설의 정당성은 오로지 기독교의 권위로 뒷받침된다. (히라하라 스구루의 <처음 만난 철학>) 중세의 국왕은 사제의 임무를 겸했으며, 대혁명 이후 교회가 민심과 동떨어진 채 반혁명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루이 14세는 고문관 회의를 통해 나라를 다스려졌다. 그러나 결정권은 오직 국왕만이 행사했다. 그의 치세 중에 '총신분회(General Assembly, 일본식 표현 ‘삼부회’)'를 한 번도 소집하지 않았다. 대신(장관)은 주임 서기 정도로 격하되었으며, 고등법원은 본래의 법정 업무만 담당했다. 음모 사건은 극히 드물었으며, 있어도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이야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1700~1701)>

궁정화가 이야생트 리고는 빛과 어둠을 대비하는 바로크 양식으로 초상화에 신이 위임한 국왕의 위엄을 담았다. ‘대왕 루이’는 지금 힘을 상징하는 고대풍 기둥 앞에 서 있다. 기둥의 받침 부분은 저부조로 ‘정의의 알레고리’ 여인상으로 장식했다. 한 손에 저울,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었는데, 백성을 대하는 국왕의 첫 번째 덕목이 바로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의 흰 담비 털 위에 덧댄 파란색 망토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 백합 무늬가 수놓아졌다. 왕좌, 푸른 방석, 그리고 오른손에 거꾸로 쥔 ‘군주의 지휘봉’ 왕홀에도 같은 문양이 장식되었다. 왕홀 바로 아래에는 손 모양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왕의 지팡이 '정의의 손'과 왕관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 달린 금목걸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대관식용 검(일명 사를마뉴의 검), 방석 위에 놓인 ‘정의의 손’과 왕관 모두 왕의 상징물, 즉 레갈리아(Regalia)다. 

최초의 대형 초상화는 새롭게 스페인의 왕이 된 손자 펠리페 5세에게 보냈다. 이 초상화는 277x194센티미터 축소판 중 하나다. 루이가 몹시 맘에 들어해서 베르사유궁에 두려고 별도로 만들었다. 매우 사실적이다. 국왕이 이목구비를 진실되게 그린다는 조건으로 포즈를 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아 독특한 점은 흰색 공단 스타킹과 빨간 굽에 빨간 끈이 달린 구두다. 신발은 베르사유 궁전이 더러워 굽을 높였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루이의 키가 작았다. 검은 가발 역시 홍역을 앓아 빠진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얼굴은 처진 눈과 볼, 코 옆으로 뚜렷이 드러난 팔자 주름, 그리고 ‘합죽이’ 같은 다문 입술을 애써 꾸미지 않았다.

앙리 드 지세의 <아폴론으로 분장한 루이 14세(1653)>

루이 14세는 일곱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 20년 동안 매일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할 정도로 건강했다. 열다섯 살이던 1653년 <밤의 발레>에서 아폴론 신으로 분장, 직접 배우로 참여함으로써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말년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천연두, 성홍열, 홍역을 앓았고, 위장병, 치질, 만성두통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초상화에서 실크 닫집 아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이유도 통풍 발작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궁정 수석의가 매일 기록한 <건강일지>를 보면, 그 발단은 탐식과 치통이었다. 루이는 대식가였다. 끼니마다 30 접시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당연히 치아와 위장이 약해졌다. 치통과 두통을 호소하는 그에게 수석의사 다캥이 이빨을 전부 뽑아버릴 것을 권했다. 사혈(瀉血) 치료다. 마취도 없이 진행한 위험천만한 시술이었다. 아래턱에 금이 가고, 소독한답시고 뜨거운 쇠막대기로 열네 번을 지진 입천장에는 구멍이 뚫렸다. 음식물이 콧구멍으로 역류했고, 어떤 것은 며칠이 지난 뒤 콧구멍으로 튀어나왔다. 만성 염증이 생겼고, 악취가 났다. 이후 씹지도 않은 음식을 삼켰고, 장내엔 가스가 차서 늘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게다가 당시에는 목욕하면 피부병이 생기거나 전염병이 옮는다는 속설로 몸을 잘 씻지 않았던 시대였다. 악취는 지독했고, 치루까지 생겼다. 관장으로 배설을 도왔으니, 화장실이 국왕의 주된 정무 공간이 되었다. 루이의 가는 다리를 보면, 발 모양이 이상하다. 발레 동작을 취한 듯 보이지만, 통풍의 증세를 가린 것이라 한다. 실제로는 잘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하였다는 방증이다. 이런 상태로 14년을 더 살았으니, 국정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제목 그림: 이야생트 리고의 또 다른 <루이 14세의 초상화(170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모습이다)


이즈음 실권자로 부상한 인물이 맹트농 후작 부인이다. 태양왕은 결혼 전 재상 마자랭의 질녀 마리 만치니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자제하라는 마자랭의 애원에 따라 1660년에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와 정략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가 실망스러웠고,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루이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 1683년, 왕비가 죽고 3개월 만에 비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맹트농 부인이다. 그녀는 서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는데, 국왕이 그 정도로 마음을 빼앗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30여 년간 그녀는 국왕을 보필했다. 

하지만 맹트농 부인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정적인 실책이 곧바로 내치에서 저질러졌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었는데, 1685년 앙리 4세가 신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퐁텐블로 칙령을 공표했다. 그는 재위 8년 차인 1648년에 30년 전쟁을 끝내고 종교의 자유를 골자로 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끌어낸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였다.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 간 벌어진 유럽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이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인데도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고자 개신교 연합으로 참전했었다. 

칙령이 발표되자 국내외 여론이 들끓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남프랑스 세벤누 지방에서 위그노 농민들이 ‘카미자르의 대반란(1702~1710)’을 일으켰다. 게릴라전으로 27개월간 국왕군에 대항했다. 이어 수공업자와 신흥 상인이 절대다수인 위그노 30여만 명이 영국, 프로이센, 미국 등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금융에 정통한 칼뱅파인 그들의 부와 함께 경제적 전문성도 동시에 빠져나갔다. 낭트 칙령 폐지는 실로 국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 위중한 사안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루이 16세가 국가 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총신분회를 소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 때부터 누적된 결과다. 따라서 루이의 치통이 절대왕정의 기반을 흔들었다고 말하면 비약일까? 하지만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모기가 세계사를 바꾸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까닭 없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이 14세는 임종을 앞두고 다섯 살 증손자(루이 15세)를 불러 놓고 말했다.


“너는 위대한 국왕이 될 것이다. 너는 건물을 축성하는 취미, 전쟁을 좋아하는 정신 등 내 소행을 닮아서는 안 된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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