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하여 문화 대국을 도모한 바 있었다. 이때 레오나르도로부터 사들인 작품이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작품 <모나리자>다. 루이 14세 역시 문화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역사가와 함께 화가들을 데리고 싸움터를 누볐다. 그랬던 루이가 무용 아카데미보다는 1년 늦었지만, 과학 아카데미보다 4년 앞선 1662년에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바다 건너 유럽의 강국인 영국보다 무려 100년 이상 빨랐다. 영국은 1768년 조지 3세 때에 와서야 로열 아카데미가 운영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국내 미술의 선진화와 관계없이 시기에서 앞섰고 대륙이라는 지리상 조건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콜베르의 아이디어와 수석화가 르 브룅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절대 왕정을 홍보할 미술가를 양성코자 함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스승의 작업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는 유럽 회화에서 위대한 시기를 맞을 준비를 마쳤다. (제목 그림: 프랑수아 오귀스트 비야르, <살롱전에서의 오후 4시(1847)>
당시 프랑스의 미술은 전반적으로 이탈리아나 플랑드르에 뒤처져 있었다. 앙리 4세가 사망하자 왕비 마리 드 메디치가 새로 지은 뤽상부르 궁전에 연작을 기획하면서 플랑드르의 루벤스를 불러야 했을 정도였다. 국내에서는 퐁텐블로 파의 이탈리아식 기교주의가 고갈되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40년대 초반 니콜라 푸생이 귀국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루이 13세의 수석 화가로 임명된 그는 교육, 비판적 성찰, 전시와 토론 등을 통해 프랑스 미술을 견인했다.
입지가 흔들린 시몽 부에의 견제로 마음이 불편해진 푸생은 2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지도로 루이 14세의 궁정화가 샤를 르 브룅을 비롯하여 미냐르, 르 쉬외르 같은 훌륭한 제자가 탄생했다. 푸생은 바로크의 선구자 카라바조 풍의 강렬함과 소란스러움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협의의 바로크 양식을 벗어나 고전주의 미술을 지향했다. 그래서 프랑스 화가 가운데 '가장 이탈리아적'이라고 평가받았다.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문학적 판타지를 담아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의해 전해진 로마 초기의 전설을 기반으로, "로마는 언제나 로마에 정복당한 이들과 결합하고 뒤섞였다"는 로마 문명의 혼종성을 표현했다. 그가 좋아하는 '군중의 역동성'에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주의적 기법이 가미되었다. 그래서 납치라는 폭력적 배경과는 달리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차분하다. 그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준비 단계에서 밑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푸생은 그렇게 조용히 지내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과 미학을 프랑스 미술에 접목하여 이탈리아의 선진 미술과 간극을 좁혔다.
17세기 프랑스 화단은 ‘예술적 가치’ 논쟁을 벌일 정도로 발전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색채와 푸생의 선(혹은 빛)의 다툼이다. 사실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되었던 색채의 반란이라고 보아도 좋다. 르 브룅은 인물 배치, 인물 소묘와 비례, 인간 정신의 표현, 원근법과 색채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푸생처럼 엄격한 형식과 교훈적 서사가 뚜렷한 그림을 위대한 작품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아카데미의 공식 견해로 받아들여져 다음 세기까지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했다.
반면 루벤스파의 대표 주자 로제 드필은 1708년 <회화 작품들의 비교 평가표>를 출간했다. 구성, 소묘, 색채, 표현의 네 가지 항목으로 점수를 매겼으며, 총점에서 루벤스는 65점, 푸생은 53점으로 차이가 발생했다. 그의 주장은 고전주의 화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르 브룅이 죽고 난 이후 평가는 루벤스파 쪽으로 기울었다. (변종필의 <아트 비하인드>) 이 논쟁은 프랑스 회화가 한 단계 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18세기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졌다. 로코코는 프랑스에서 탄생한 최초이자 마지막 국제적 미술 사조였다.
프랑스 미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아카데미와 함께 살롱전(Le Salon)이 크게 기여했다. 예전 대한민국 국전과 같은 성격으로, 엘리트 미술가의 등용문이다. 미술 아카데미 졸업생 작품전으로 출발하여 1667년 살롱 카레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따라서 제한된 인원에게만 개방된 반(半) 공공의 성격이었다. 이후 전시회는 200년 동안 국왕의 후원 아래 개최되었다. 1673년부터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며, 최우수작을 선발하여 ‘로마상’을 수여했다. 부상(副賞)으로 5년간 로마의 분교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서 기숙하면서 무료로 연수하는 특전이 부여됐다. 1699년, 첫 번째 ‘살롱’ 형식의 전시회가 루브르 박물관 그랜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1737년부터 전시회는 살롱 카레로 이전되었는데 이때 ‘살롱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아카데미는 역사화와 장르화를 '고급 장르'로,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를 '부차적 장르'로 구별하는 서열을 형성했다. 살롱전은 기득권 세력이 화단을 장악함으로써 개성 있는 후진의 등장에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먼 훗날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논란 자체는 역설적으로 작가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여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전위예술)가 등장한다. 마치 지동설과 같다. 지동설은 갑자기 등장한 과학처럼 보이지만, 이전의 자연철학 천동설이 있었기에 싹을 틔울 수 있었다. 모든 역사의 발전이 이와 같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을 칭찬하는 이에게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넘어서는 후진이 나왔을 때 기꺼이 의자를 내주고 손뼉을 치며 반가이 맞아주어야 한다는 교훈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