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생일을 맞기도 전에 왕위에 오른 프랑스 루이 14세, 그는 ‘프롱드 난(1648~1653)’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다. 귀족들이 일으킨 마지막 내란이었다. 귀화한 이탈리아인으로,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의 과세 정책에 반발하여 그의 창문에 돌을 던짐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열두 살 어린 루이는 1650년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튈르리 궁에 감금당했던 악몽은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1661년에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스스로 재상을 겸하면서 직접 왕권을 챙겼다. 파리를 극도로 싫어했던 국왕은 수석 궁정화가 샤를 르 브룅을 비롯하여 건축가 루이 르 보와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했다.
“푸케의 보 르 비콩트 성을 뛰어넘는 궁전을 지어라.”
국왕이 언급한 니콜라 푸케는 마자랭의 신임으로 재무장관이 되었다. 장 바티스트 콜베르와 함께 자신을 보필한 인물이다. 하지만 죽은 마자랭이 축적한 재산으로 루이 14세가 예민해 있던 차제, 푸케의 화려한 궁전이 빌미가 되어 ‘비리와 반역’ 혐의로 축출당했다. 푸케는 200여 년 전 피렌체의 국부 코시모가 새 메디치 궁전을 지을 때 보였던 절제력을 배웠어야 했다. 코시모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웅장한 궁전 대신 미켈로초의 단출한 안을 채택했다. 향후 정치적 음모에 휩쓸릴 것을 염려해서였다.
한편 국왕이 부른 세 사람은 푸케의 궁전을 지었던 장본인이었다. 어두운 밤, 베르사유에서는 파리의 빛나는 불빛을 볼 수 있다. 마차로 두 시간, 걸어서 여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지근거리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정말 파리를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굳이 많은 예산을 들여 별도의 궁전을 지었을까? 이제 그의 충실한 신하가 된 콜베르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는 알고 계신다.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닐 때, 군주의 위대한 정신과 광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건축물밖에 없다는 것을.” (콜린 존스의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부친 루이 13세의 수렵 별궁인 중세식 작은 성이었던 이곳은 원래 늪지대였다. 조망도 좋지 않고 숲도, 물도, 흙도 없었다. 말라리아가 퍼졌으며, 1661년부터 1682년까지 일꾼이 엄청나게 죽었다. 하지만 국왕은 이곳에 호화로움을 넘어 장대함에 이르는 건축물을 짓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2,000명의 귀족과 18,000명이 넘는 근위대 병사와 시종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출입 인원이 빈번하고 경호가 힘들어 추문이나 좋지 않은 여론을 차단할 수 있어야 했다. 외형상 거대한 외관을 지닌 베르사유 궁은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남성적 미술’ 바로크는 종교개혁으로 땅에 떨어진 교회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선택된 양식이다. 화려함과 역동성이 강조되며, 욕망과 비정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왕권신수설에 기초하여 절대 왕권을 도모하려는 루이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진다.
국왕은 바로크 양식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고전주의의 덕목인 절제, 단순화를 지향했다. 궁은 곡선이 배제되고 직선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많은 제약이 사라지면서 내부 장식에 근대적인 취향인 로카이유 양식-로코코 양식의 게르만식 변형으로, 조개껍질에서 느낄 수 있는 곡면이나 곡선을 표현한다-이 대거 도입되었다. 궁전은 1661년에 시작되어 공사 책임자가 세 차례나 바뀌어 가며 50년 동안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1670년대부터 1680년대에 걸쳐 재정 수입의 5% 이상을 쏟아부었다. 물론 중심 테마는 태양왕의 이미지에 부응하여 ‘태양의 신 아폴론’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은 베르사유 궁전이 '자연에 대한 폭거'라고 단정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너무 강하게 표출했기 때문이다.
1682년, 마침내 루이 14세가 파리 루브르궁에서 왕조의 찬양과 미화를 위한 궁전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다. 흩어져 자기 영지 내에서 막강한 권력과 부를 구축하던 귀족들까지 모두 궁으로 불러들여 머물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의전을 중시한 극장 왕국을 완성했다. 국왕은 고문관 회의를 주재했으며, 매일 6시간씩 정무를 보았고, 사소한 국비 지출도 서류에 직접 서명했으며,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는 비망록을 비치해 두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자연스럽게 베르사유 궁전은 1789년 대혁명 때까지 앙시엥 레짐의 상징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른 유럽 군주들은 너도나도 베르사유를 모방하여 장엄한 건물을 지었다. 빈의 쉔부룬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이 대표적이다.
이 정도에서 통치력을 유지했으면, 루이는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83년 콜베르 사망을 기점으로 영토 확장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했다. 그는 스물두 살에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장인이 죽고 왕비의 이복동생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려 하자, 루이는 전처소생에게 우선권이 있다며 스페인 통치하에 있던 저지대 브라반트(현재 벨기에 중북부에서 네덜란드 남부에 이르는 지역)를 요구했다. 그러나 브라반트와 연방을 이룬 네덜란드 공화국 오렌지 공 윌리엄(빌럼 3세)의 반발로, 전쟁(1672~1678)을 벌여야 했다. 1677년에는 윌리엄이 영국 왕위계승자인 메리와 결혼함으로써 앙숙이던 영국이 네덜란드에 힘을 보탰다. 결국, 루이 14세는 이듬해 네덜란드와 네이메헌 조약에 응하면서 플랑드르 일부와 프랑슈콩테를 획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700년, 이번에는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장애로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루이 14세가 다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에 끼어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1701년 루이는 손자 앙주 공을 마드리드로 보냈다. 그가 펠리페 5세다. 하지만 크든 작든 스페인 왕가와 인연을 맺고 있던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등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일방적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는 프랑스의 처사에 반발했다. 이렇게 치세 말기에 수난을 겪던 루이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고 소모적인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지켰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펠리페 5세의 조카 루이 15세에 이르러 섭정 시대를 맞는 원인이 된다. 프랑스의 나랏빚은 1683년에서 1715년 사이에만 10배로 늘어났다.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 국가의 부채는 20억 리브르였고 이에 따른 이자만 해도 8억 리브르에 이르렀다. (<Wikipedia> 참조) 그나마 정권이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추기경이자 재상들이 구축해 놓은 강력한 왕권 체제 덕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곳이 <거울의 방(1678~1686)>이다. 르 브룅이 기획하고 쥘 아르두앵-망사르가 만들었다.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 사이 정원 쪽으로 17개의 창문이 달린 길이 73미터 갤러리에 357개의 거울이 설치됐다. 하지만 찬란한 방에는 프랑스의 영광만 머물지 않았다. 오욕의 역사 또한 교차했다. 나폴레옹 3세를 상대로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빌헬름 1세가 1871년 이곳에서 통일 독일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프랑스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과 같은 장소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려고 했다.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정원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정원 소개법>이라는 가이드북을 직접 쓸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곳이다. 직사각형의 중심부 건물을 양쪽 날개로 감싸도록 설계했다. 폭이 580미터에 이른다. 증손자 루이 15세가 자신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정원 내 트리아농 별궁을 지었다. 이후 별궁은 퐁파두르 사후 루이의 또 다른 정부 뒤바리 부인이 사용했다. 그녀는 왕세자빈 앙투아네트와 긴장 관계를 조성했다. 결국,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앙투아네트가 고집을 꺾고, 그녀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기싸움에서 승리했다. 이때 앙투아네트가 건넨 말, “오늘은 베르사유에 사람들이 많네요”는 인구에 회자되면서 유명해진다.
그러나 루이 15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마담 뒤바리가 트리아농을 떠나야만 했다. 왕위를 계승한 손자 루이 16세(루이 카페)가 왕비 앙투아네트에게 궁을 선물했다. 1770년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 예배당’에서 결혼한 앙투아네트는 이 별궁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인생을 즐겼다. 그러나 이곳에서 벌인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혁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가시밭길을 걷다가 불행한 죽음을 자초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동했다.
루이 14세가 살림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긴 지 100여 년 만인 1789년 7월 14일에 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10월 봉기가 터졌다. 민중과 국민방위대가 베르사유로 진격하여 국왕 일가를 루브르궁과 연결된 튈르리궁으로 옮겨왔다. 루이 14세가 그토록 기피했던 궁이었다. 그리고 1791년 튈르리 궁을 빠져나와 국외로 도망치려다 잡힌 루이 16세는 군중에 의해 파리로 강제 귀환했다. 이후 왕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영원히 복귀하지 못함으로써 절대주의 상징으로서 기능을 끝내게 된다. 1837년, '시민들의 왕' 루이 필립은 궁과 부속 건물 모두 국립미술관으로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