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영 Jun 26. 2024

앙투아네트와 목걸이 사건

왕비의 전속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르 브룅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1783)>. 왕비와 동갑인 르 브룅은 실력과 미모를 갖췄으며 생전에 성공한 초상화가였다. 그녀의 그림 전체 800점 중 600점 이상이 초상화다. 르 브룅은 그림을 꾸밀 줄 알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인 왕비는 유전적으로 턱이 뾰족하고 오므린 입술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브룅은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그녀의 턱을 작고 동글게 처리했다. 일종의 뽀샵 처리다. 이렇게 르 브룅은 앙투아네트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초상화를 30여 점 그렸다.

그런데 왕비의 초상화가 엉뚱한 데서 사달이 났다. 파리 패션을 적용한 ‘모슬린 드레스’는 왕비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초상화를 본 궁중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모슬린은 서민들이 입는 옷감으로,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악의를 가진 이는 “오스트리아 여인이 속옷만 입고 나타났다”라고 비난했다. 부지런히 청회색 실크 드레스를 갈아입고 다시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초상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탄생했고, 복제품이 만들어져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걸어 놓았다. 이 일화는 그녀가 검소했다는 점을 강조코자 함이 아니다. 그녀의 사치가 허례적인 궁중 문화와 절대 격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미술 역시 교회와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여 드러내는 바로코 양식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1774년, 루이 15세가 59년의 치세를 다하고 갑자기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러자 앙투아네트가 세자빈에서 왕비로 격상되었다. 남편 루이 16세는 천성이 착하기만 했다. '착하다'는 칭찬은 어떤 사람의 장점이 발견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미사여구다. 그는 뚱뚱한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며, 특히 열쇠 만드는 취미를 지닌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제부터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유럽 정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친정 오스트리아를 겁박해 오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왕비는 세계사적 사명감도, 높은 지위에 따른 책임감도 없었다. 하루하루 삶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머리 위 50센티미터까지 올리는 ‘푸프(pouf)’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만큼 그녀의 사치를 난국의 근원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밀어붙여 성사된 정략결혼이었다. 열다섯 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데리고 있던 하인과 심지어 반려견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옷은 물론 이름도 바꾸어 프랑스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프랑스에 도착해서는 모국어인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만 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의 예의범절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면서 빈의 간소하고 자유스러웠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베르사유 궁 정원에 로코코 양식의 '프티 트리아농’에서 시골 농가를 짓고 가까운 이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이곳은 그녀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공간이다. 여덟 개의 방, 대기실, 식당, 침실, 목욕탕, 작은 서재가 전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외된 많은 궁정 인사들이 그녀의 생활 방식을 헐뜯고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악한 왕비'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1791년 8월 31일, 트리아농 별궁의 마지막 비용 청구서가 혁명 정부에 제출되었다. 청구 금액은 총 1,649,529르브르, 많이 잡아야 200만 리브르다. 물론 당시 평민의 하루 일당 1 리브르에 비해 놀랄만한 고액이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주교 연봉도 40만 리브르였다.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게다가 왕실 재정이 전체 예산의 6% 정도였으니 트리아농이 차지하는 재정 비중은 매우 적었다.


세계 인구의 80~90%가 오로지 땅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먹고살았던 시대였다.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말,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는 분명히 경솔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가 궁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아홉 살 때 이미 루소가 ≪고백록≫에서 풍자적으로 실린 이야기니까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실제 이 결정적인 말은 루이 14세의 후처 마리 테레즈의 입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앙투아네트가 ‘적자 부인’이라 불리며 프랑스 몰락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이 되었을까? 초상화가 완성된 지 2년 후 왕권과 왕비의 추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목걸이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복원된 목걸이 모형(출처; 위키백과)

1785년 보마르셰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의 리허설이 끝난 8월 9일, 앙투아네트는 궁중 보석상 뵈머로부터 고약한 말을 듣는다. 뵈머는 왕비가 사지도, 지급을 약속하지도 않은 160만 리브르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할부금을 독촉했다. 사건의 중심에는 자칭 왕비와 친한 친구라고 속인 라 모트 부인과 루이 드 로앙 추기경이 연루되어 있었다. 현 부르봉 왕가 이전 발루아 왕조의 먼 후손임을 내세워 발루아 드 라 모트 백작 부부를 사칭한 이들은 오만한 허세꾼 로앙 추기경을 속였다. 

부부가 가짜 대역까지 동원하여 왕비와의 친밀감을 과시하자 재상이 되고자 했던 추기경이 연줄을 대려고 돈을 썼다. 그러자 간이 커진 라 모트 부인은 왕비가 사고 싶어 한다며 없는 말을 만들어 추기경에게 목걸이값을 대납게 했다. 이 과정에서 왕비의 가짜 편지와 계약서까지 손에 쥔 추기경은 라 모트를 믿고 목걸이를 그녀에게 넘겼다. 그러나 쌀쌀맞은 왕비의 태도는 여전했다. 뒤늦게 의심이 든 추기경이 지급을 미뤘다. 이때 라 모트 부인의 예상과는 달리 보석상이 추기경이 아니라 곧바로 왕비에게 지급을 독촉함으로써 사기극의 전모가 드러났다.

 

루이 16세는 명예를 훼손당한 왕비를 대신하여 추기경의 구속을 명령했다. 사심에 눈멀어 허무맹랑한 사기극에 놀아난 추기경은 라 모트 부인과 함께 법정에 섰다. 하지만 가재는 게 편이었다. 귀족들은 같은 특권층 사람이 갑자기 모욕적으로 잡혀갔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스캔들이 확산하면서 어느덧 여론의 화살은 추기경에서 벗어나 평소 분별력이 없던 왕비에게로 궤적을 틀었다. 그러면서 왕비와 라 모트 부인이 미리 짠 것이라는 등 각종 유언비어가 횡행했다. 

재판 결과, 라 모트 부인은 만장일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반면 추기경은 22표 대 26표로, 무죄 방면되었다. 왕권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법복 귀족층의 판단이 작용했다. '법복 귀족'은 유서 깊은 혈통 귀족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다. 최고법원인 고등법원의 판사직을 돈으로 사서 귀족이 된 사람들로, 왕의 통제가 잘 먹히질 않았다. 타격을 입은 루이 16세는 고등법원에 맞서지 못하고, 왕비를 달래주는 차원에서 추기경을 국외로 추방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재판 결과에 환호했다. 


따라서 사건은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왕비가 백성으로부터 극도의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앙투아네트가 열다섯 살에 세자빈으로 시집올 때만 해도 시민들은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꿈꾸며 열렬히 환호했다. 3년이 흘러 1773년 6월 8일, 마차로 두 시간 거리에 떨어진 파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자신에 열광하는 대규모 인파를 보고 앙투아네트가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백성의 경외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후 왕비가 되고 왕세자를 낳았음에도 단 한 번 서민의 삶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대중은 실망했고, 궁중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악성 루머에 경사되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궁중의 한 여인에게서 찾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당시 프랑스의 난국은 국가 재정 고갈 및 사회적 변화, 그리고 국제 정세 등 종합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옳다. 그 본격적인 탐사를 위해 이야기의 공간을 잠시 영국으로 옮겨보자.

이전 01화 누가 돌을 던지랴, 마리 앙투아네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