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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un 19. 2024

누가 돌을 던지랴,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1793)>,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선구자 자크 루이 다비드가 종이에 펜으로 그린 드로잉이다. 다비드는 회화가 사진을 대체했던 시대에 혁명에 직접 뛰어든 화가다. 같은 해 '자코뱅 당의 나팔수' 장 폴 마라가 피살되자, 그를 마치 순교자인 양 꾸몄다. 유명한 <마라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정복자’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말을 바꿔 탔을 때는 참석하지 않은 인물까지 포함하여 웅대한 작품 <나폴레옹 대관식>을 완성했다. 한마디로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뛰어난 재능을 서슴없이 캔버스에 투사했던 화가가 바로 다비드였다. 태도가 이랬던 그가 왕정의 종식을 상징하는 이 극적인 순간을 스케치만 한 채 색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반면 이듬해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해밀턴이 그린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제목 그림, 1794)>는 어둠과 밝음을 극명으로 대비하여 유화로 완성했다.


1793년 10월 16일, 대혁명이 발생하고 4년이 지났을 때였다. '유럽의 자존심' 프랑스 왕정을 몰락으로 이끈 사치스러운 왕비 앙투아네트가 초라한 박피공(剝皮工)의 마차에 올랐다. 고작 말 한 필이 끄는 마차였으며, 그나마 의자는 사다리 사이에 놓인 널빤지가 전부였다. 공화국이 된 차제, 프랑스에서는 왕비였다고 해서 단두대로 향하는 길이 시민보다 더 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순순히 의자에 걸터앉았고, 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지금 위험한 정치범이 수감되는 콩시에르주리에서 70일간 머물다가 수만 명이 몰려든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서른여덟 살 앙투아네트는 몰라볼 정도로 늙어버렸다. 혁명 이후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면서 생긴 결과다. 출발하면서 그녀는 평소대로 굽이 높은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상중임에도 검정 상복을 벗고 하얀 드레스로 갈아입여야 했다. 혁명 정부가 9개월 전 먼저 처형한 남편 루이 16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며 검정 옷 착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면직 린네 모자 아래 삐죽 나온 그녀의 머리칼이 인상적이다. 잠시 후 ‘국민의 면도날’ 기요틴에 의해 떨어질 그녀의 목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형리 상송이 대충 손질했다. 하지만 그녀는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입을 꼭 다물었다. 풍문과 달리 의연한 모습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되,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고 작심한 태도가 분명하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쇤부른 궁에서 어린 모차르트에게 청혼을 받았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교육 의지와는 달리 자유분방했다. 어머니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제와 3차에 걸쳐 슐레지엔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위기를 홀로 감내한 위대한 여성 지도자였다. 하지만 티 없이 자란 막내 딸 앙투아네트에게는 어머니의 인내심과 의지를 찾기 어려웠다. 그녀는 진지한 일에 관심을 끄고 살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나 할까? 세습 왕가의 2세들에게서 발견되는 흔한 현상으로, 이 점에 있어서는 그녀의 오빠 요제프 2세나 루이 16세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왕세자빈이였을 때는 물론 왕비가 되어서도 국가나 백성의 삶에 관심을 집중한 적이 없었다. 주변에 꼬인 여인들과 함께 떠들며 단맛 나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도박장에도 갔으며, 특히 오페라 무도회를 즐겼다. 책임감을 외면하고, 권리를 당연시하며 인생을 향유하려고만 했다. 그랬던 그녀가 변했다. 고난을 겪으며 비로소 성장했으니, 역설적으로 혁명이 그녀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1791년 6월, 가족과 함께 국외 탈출을 기도했던 ‘바렌 도주’가 무위로 끝났다. 그리고 1792년 8월 10일 민중 봉기로 탈주가 쉽지 않은 옛 성전기사단의 수도원인 탕플에 감금되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편에 뒤이어 어떻게 품위를 지키며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 하나였다.

 

혁명 재판정은 공화국에서 일방적으로 꾸렸다. 재판장은 로베스피에르와 동향인 에르망이고, 검사는 푸키에 탱빌이었다. 12명의 배심원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했지만, 모두 공화주의자였다. 그리고 국선 변호인 두 명은 앞선 루이 16세 재판 당시 왕에게 경사되었다는 이유로 단두대로 끌려갔던 변호사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여건에서도 그녀는 놀랍도록 신중했으며, 답변은 짧고 명확했다.

재판정에서 앙투아네트의 죄목이 마구 거론되었다. 하지만 크게 한 가지로 귀결된다. 왕비가 외국, 특히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적군의 승리와 내전을 부추겼다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돈을 보내 프랑스를 공격하는데 국고를 낭비했고, 남편을 선동해 거부권을 사용토록 했다는 것이었다. 왕비가 외부와 공모하여 왕정복고를 도모했다는 측면에서 기소는 정당했다. 그러나 이미 국왕을 처형한 차제, 그녀가 남편의 죄를 모두 사주했다는 논리는 무리였다.

비제 르 브룅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1787)>. 그림이 완성될 무렵, 막내 소피 공주가 사망했다.

이때 목걸이 사건을 추궁하던 재판정에서 증거와 함께 뜻밖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덟 살짜리 아들이 서툰 글씨로 삐죽빼죽 쓴 진술서를 내밀며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을 주장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겐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장남 루이 조제프는 일곱 살에, 막내딸 소피 알렌 베아트리스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었다. 장녀 마리 테레즈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왕세자 루이 샤를(루이 17세)이 전부였다. 그런데 모자를 성적으로 연결하다니... 그때서야 말을 아끼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재판 자체를 경멸하듯이 우회적으로 답변했다.


“어머니를 모독하는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은 자연이 거부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묻고자 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순간 청중이 술렁였다. 특히 재판정 내 모든 여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화정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자크 르네 에베르가 신성한 혁명에 먹칠했다고 화를 냈다. 결과적으로 앙투아네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평가였다. 에베르는 국민공회를 주도하는 자코뱅파에서 가장 강경한 인물로, 상퀄로트의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상퀼로트(sans-culotte)란 귀족 남성 반바지 퀼로트와 대비를 이룬 혁명 당원의 긴바지로, 과격 공화파를 상징한다. 

그는 직장과 가정도 없이 쫓기듯 혁명에 뛰어들었다. <페르 뒤셴>지에서 신랄한 글을 쓰면서 돈과 권력을 키웠다. 왕실 가족 감독 책임자가 되면서 앙투아네트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앞뒤가 잘린 폭로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잘린 목이 하늘 높이 치켜올려졌다. 그러자 둘러싼 청중이 외쳤다. "공화국 만세!" 광장에 모인 대중은 공화국이 곧바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리라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앙투아네트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전설이 내밀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위에서 떨어지는 기로틴을 똑바로 바라보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믿을 수 없는 스토리 텔링이 그것이다. 이런 정황을 두루두루 감안해 보면, 다비드가 물감을 칠해 작품을 완성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거나, 훗날 쏟아질 역사의 조롱을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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