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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ul 03. 2024

반면교사, 영국 찰스 1세의 참수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 국왕의 궁전 화이트홀 앞에 대규모 군중이 운집했다. 국왕 찰스 1세의 처형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찰스 1세의 관 곁에 서 있는 크롬웰(1849)>,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폴 들라로슈가 사건이 일어난 지 200년 후 당시의 장면을 캔버스에 담았다. 관례대로라면, 처형인의 잘린 머리는 방치된 채 군중에게 전시되어야 마땅하다. 백성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림 속 왕의 시신은 머리와 몸을 꿰매 봉합해 놓아 온전한 모습이다. 하얀 수의로 인해 뚜렷이 보이는 선혈 자국이 그 사실을 선명하게 증언한다. 전례가 없는 조처로, 사실을 기반으로 했는지는 미지수다. 

검은 관 뚜껑을 열고 찰스 1세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이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이다.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된 토머스 크롬웰과는 다른 인물로,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잉글랜드가 유럽 최강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세운 리슐리외 재상과 비교할 만한 공헌이라고 하여 ‘호국경(護國卿)’으로 불린다. 그림에서 크롬웰은 지금 어떤 한 생각에 빠져 있다. 의회파를 이끌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국왕을 참수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을까?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마치 12년 후 찰스 2세에 의해 자신의 시신이 부관참시된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백년전쟁으로 영주와 기사들이 몰락한 후 16세기가 되자, 전쟁 당사자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절대왕정의 시대로 접어든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가 왕권 강화의 정점에 섰고,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유럽 국가 중 가장 봉건제의 고리가 약한 국가였다. 1215년 존왕이 맹세한 마르나 카르타의 전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후계 국왕들이 귀족과 사전 합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400년 동안 준수해 온 것이다.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특히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천명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는 의회의 기분을 교묘하게 맞춰가며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했다. 그랬던 그녀가 후사 없이 죽었다. 스코틀랜드 국왕으로는 처음으로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가 못 이룬 꿈을 아들 대에 와서 실현한 것이다.


제임스는 즉위와 동시에 영국 국교의 수장이 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면서 복잡한 종교 환경을 맞이했다는 의미다. 같은 개신교이지만, 잉글랜드의 국교 성공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달리 가톨릭적 관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에 이르러 사달이 났다. 1625년, 즉위하자마자 그는 귀를 막은 채 제멋대로 통치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엄격하고 신앙심이 투철한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이 살았다. 청교도라 하며, 그 우두머리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그는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신교를 비롯한 종교적 관용을 확대했다.

플랑드르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초상화(1635)>

그러나 찰스는 선왕의 정책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의회와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무지했으며, 종교와 정치 모두에서 과오를 범했다. 먼저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가톨릭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었다. 그리고 의회와 척을 졌다. 찰스는 1628년에 하원이 제출한 '권리청원서'를 받아 보았다. 국왕이 해서는 많은 사항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자 의회를 해산했다. 하지만 년이 지나지 않아 자금이 궁해지자 하는 없이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해운 조세권을 발전시킨 선박세였다. 


먼저 찰스의 지역적 지지 기반이랄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하원이 국왕에 맞섰다. 교회의 권위와 주교제, 예배 의식을 중시하는 가톨릭적 요소를 강화하는 정책에 불만이 커졌다. 결정적으로 성공회 기도집을 도입하라는 명령에 저항했다. 교회의 모든 주교를 추방하고 그 자리를 장로교 성직자로 채웠다. 이른바 1639년이 발발한 ‘주교 전쟁’이다. 1640년 국왕이 스코틀랜드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했던 의회는 동의를 계속 거부했다. 찰스는 의회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했다. 게다가 가톨릭을 신봉하는 아일랜드 군을 진압에 동원함으로써 혼란을 키웠다. 

1642년 8월 말, 마침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크롬웰이 철기군을 이끌고 1, 2차 내전에서 승리 후 1649년 찰스 1세에게 권력 남용에 대한 죄를 물었다. 그해 5월에 공화정을 선포, 잉글랜드 연방을 출범함으로써 청교도혁명을 완성했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왕권신수설을 비판하며, 사회계약설에 근거해 ≪리바이던(1651)≫을 쓰고 있을 때였다. 

1660년 크롬웰 사후 망명에서 돌아온 찰스 2세와 그의 동생 제임스 2세에 의한 왕정복고가 잠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의회와 국왕의 대립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이어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임스 2세를 퇴위케 함으로써 명예롭게 혁명을 완수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듬해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녀와 결혼한 네덜란드공화국 총독인 오렌지 공 윌리엄 공동 군주가 권리장전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영국에서는 절대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왕은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가 탄생했다. 


한편 영국 역사화를 즐겨 그렸던 들라로슈의 이 작품에서 우린 어쩔 수 없이 1793년에 참수당한 작가의 조국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연상하게 된다. 당시 찰스 1세의 처형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이웃 국가에도 큰 교훈을 남겼다. 민의를 무시할 경우, 국왕의 목숨조차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경고였다. 144년 후 이 경고는 프랑스에서 현실이 되었는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이 그것이다. 루이는 무능했지만, 순진했다는 측면에서 찰스 1세에 비해 동정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찰스의 죽음과 달리 왕정의 완전 폐지를 불러옴으로써 유럽 전체가 요동쳤다. 프랑스의 또 다른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들라로슈가 이 그림에서 구체제(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에 동정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비판했다. 들라크루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던 화가다. 같은 해 그는 들라로슈와 동일한 모티브로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크롬웰과 찰스 1세의 관(제목 그림)>으로, 이때의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시신을 좀 더 차갑게 응시한다.

마지막으로 분위기가 전혀 다른 그림 한 점을 감상할 차례다. 스코틀랜드가 사랑하는 헨리 래번의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1790)>이다. 배경이 흐릿한 빙판 위에서 정장 차림새의 목사가 스케이트를 지친다. 그런데 통상의 남자들이 착용하는 스피드 스케이팅 날이 아니다. 피겨 스케이팅 날이다. 목사가 속도보다 묘기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는 지금 모자를 쓴 채 정면을 응시하면서 두 팔을 모은 채 한 발을 들고 우아하게 빙판 위로 동선을 그린다. 한눈에 보아도 그의 스케이트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주인공은 로버트 워커라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화가 레번과는 동향 친구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워커는 역시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빙상 강국’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장했다. 소위 본토에서 갈고닦은 스케이팅 솜씨다. 목사가 된 뒤로 그는 에든버러 스케이팅 클럽에 가입해 겨울이면 더딩스턴 호수에서 스케이팅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림은 실력보다도 근엄한 성직자가 아니라 대중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보기 좋다.

 

그림 완성 시기가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1년 뒤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혁명이란 구호 아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때였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초상화>는 찰스 처형 후 백 년이 지나지 않은 1738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1775년 루이 16세에게 팔렸다. 이때 찰스의 불행한 운명도 함께 프랑스 왕정으로 옮겨 간 것일까? 20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랑스 땅에서도 참사가 재현되었다. 반면 영국은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가 자리를 잡아 이미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왔다. 그리고 산업혁명에 돌입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고, 국가의 부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따라서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은 영국 사회의 중산층이 여유롭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화가 레번이 중산층 초상화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부르주아 층이 새로운 메세나(후원자)로 등장했기에 가능했다.

 

이즈음 프랑스 사회에서도 계몽주의를 통해 국민 의식이 제법 고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제1(성직자), 제2 계급(귀족)은 물론 제3 계급(평민)마저도 민중(상퀼로트)의 의식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었고 산업혁명이 뒤처지면서 국가 발전이 지체되었다. 아래로부터 시작한 프랑스혁명은 가는 길이 험난했다. 국왕을 비롯하여 지도층이 일찌감치 영국 찰스 1세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삼았더라면, 희생자를 줄이고 좀 더 세상이 평안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꿈꾸었던 세상과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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