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17세기를 '볼테르의 세기'라고도 부른다. (J.네루, <세계사 편력>) 그런데 청년 작가 볼테르는 루이 15세 때 풍자시로 인해 11개월 동안 수감된 바 있었다. 이후 귀족 청년 슈발리에 드 로앙과의 다툼에서 그의 하인에게 구타당했음에도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불가피하게 그는 1726~1729년까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때 볼테르는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뉴턴에 열광했으며, “영국인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통해 천국으로 가고 있다”라고 경탄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영국은 종파가 20개가 넘어 종교적 관용이 존재하고, 자유롭게 이성에 관한 법칙을 규정하며, 과세도 국민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뉴턴은 신의 관점이 아니라 물리 법칙에 의해 작동되는 우주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풀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프린키피아≫는 인류가 그간 쌓아 올린 물리학, 천문학, 역학에 관한 패러다임을 한꺼번에 바꾸어 놓았다. 이제 초기 조건만 안다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할지 모두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양말 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시인이자 화가가 된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성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느꼈다.
해저 또는 동굴 깊숙한 심연에서 오색찬란한 자연을 등진 채 근육질 남자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이작 뉴턴(1795~1805)>이다. 뉴턴은 등을 구부리고 불편한 자세로 긴 두루마기 위에 달랑 컴퍼스 하나로 다이어그램을 그리며 캄캄한 세계를 벗어날 비밀을 찾고 있다. 컴퍼스는 이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풍경을 등진 자세는 인간의 영적 가치를 도외시하고 오직 이성에만 의지하려는 환원주의를 의미한다. 블레이크는 지금 위대한 과학자의 이성을 조롱하면서 이성도 감성과 결합해야 빛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유리즌(1794)>에서 창조주 역시 손에 컴퍼스를 쥐었다. 우주가 수학적 법칙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작품이다.
볼테르는 1727년 4월 4일 뉴턴의 국장(國葬)에서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평민이었던 뉴턴의 관을 두 사람의 공작과 세 사람의 백작 그리고 대법관이 운구했다. 게다가 국왕이 주로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시신이 안치되는 모습을 목도했다. 볼테르는 신분제가 엄격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당시의 감동을 전하면서 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당시 금서가 된 그의 ≪철학 편지≫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된다. 이후 볼테르는 ≪백과전서≫ 집필에 참여하여 왕권신수설을 위협하는 계몽주의의 확산을 도왔다.
계몽주의란 16~18세기에 경험론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유럽 전역에 일어난 혁신적 사상을 말한다. 사유의 중심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온 시대가 르네상스라면, 계몽주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성의 계몽을 일컫는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 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꾀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등(下等)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했다. 개별적인 개인과 성숙한 시민으로서 주체라는 사실을 스스로 성찰하라는 언명이다. 1748년 이후 프랑스에서는 저명한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이 속속 발표됐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볼테르의 ≪여러 민족의 풍속과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 등이다. (제목 그림: 샤를 니콜라 코행의 ≪백과전서≫ 1772년판 권두화(출처: 위키백과))
1751년 7월 1일에 ‘과학, 기술, 직업에 대한 종합 사전’이라고 불리는 ≪백과전서≫ 총 35권 중 첫 권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계몽주의 이론을 보급하는 주요 수단이었던 이 책에는 총 3,123개의 판화로 구성된 도판이 삽입되었다. (다니엘라 바라브라, <바로크와 로코코>) 예술 역시 대중을 사회적으로 교육하는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용성과 기능성이 중시되면서 과도한 장식이나 화려한 치장을 중시했던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은 존재 가치가 희미해졌다. 프랑스에서 제작한 백과사전은 1772년까지 각 권이 출간될 때마다 유럽 전역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모든 지식이 수록된 이 책은 종교적 관용과 사상의 자유가 종국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견했다. (로버트 램, <서양 문화의 역사 Ⅲ>) 신성을 지키려는 교회와 절대 왕정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기에 책이 나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출판 금지되었다.
그러나 선각자로서 일부 군주들은 계몽주의를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흡수했다. 서로 적으로 맞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해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도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히 프리드리히 대제는 베를린에서 백과전서가 간행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보호해 주었다. 반면 당사자 격인 프랑스 왕실은 갈팡질팡했다. ≪백과전서≫ 초판이 간행되었을 때 검열관이 덮쳤으나 곧이어 출간을 허락했다.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부인 등 몇몇 사람의 찬성 의견을 듣고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철학의 빈곤과 함께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세상을 일깨우는 데는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이제 조금 방향을 돌려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레모니에의 <조프랭 부인 자택에서의 저녁(1812)>을 감상해 보자. 레모니에는 대혁명 이전 유명한 역사화가였다. 그는 조프랭 살롱의 멤버였다는 사실로 프랑스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기 위치를 과시했다. 작품 속에서 몽테스키외, 디드로, 마르몽텔 부부 등이 귀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희극인 앙리 루이 카인이 볼테르(작품 속 흉상의 인물)의 희극 <중국 고아>를 처음으로 낭독하는 중이다. 살롱은 루이 13세 때 탄생하여 프랑스어를 국어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궁정이 주목받지 못하는 18세기 중반에 사교계의 중심이 파리의 살롱으로 옮겨갔다. 당시 퐁트넬, 몽테스키외, 마리보가 드나들던 드 랑베르 부인, 뒤 데팡 후작부인 그리고 조프랭 부인의 살롱이 특히 유명했다.
번화가 생 오노레 가에 있었던 마담 조프랭의 살롱은 1730년대 문학 살롱의 형태로 출발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던 조프랭은 드 텐생 부인의 살롱에서 학문을 익혔다. 1749년 부인이 사망하자 그녀의 방문객을 물려받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여성 계몽주의자로 분류되는 그녀는 철학서와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했다. 살롱은 만나서 웃고 잡담이나 하거나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곳이 아니었다. 귀족, 고위 관료, 부유한 부르주아, 고위 성직자 방문객들이 예술가, 문인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을 즐겼다.
이곳은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다. 육군 원수 리슐리외가 공손하고 정중했지만 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외할 정도였다. 스위스의 구스타프 3세, 러시아 황제가 되는 예카테리나 그리고 그녀의 수양아들이자 폴란드의 마지막 왕 스타니슬라스 오귀스트 포니아토프스키 등 외국의 저명한 귀빈들도 살롱의 초청을 영예로 받아들였다. 매주 월, 수요일 2회 포럼 형식으로 개최했는데 월요일은 예술가를 위한 날이었다. 당시 화려하고 장식적인 로코코 시대에 묵묵히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최초의 화가가 있었다. 장 시메옹 샤르댕이다. 조프랭 부인이 후원한 대표적인 미술가 중 한 명이 바로 샤르댕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일상이란 지금이야 흔한 주제이지만, 당시로선 후원자 없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한마디로 '팔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녀 사후 루이 16세 시대의 살롱은 계몽보다 정치적으로 경사되었다. 재무대신 네케르 부인의 살롱이 권력의 자리로 올라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혁명 이후 우파 라파예트파는 네케르의 딸 스탈 부인의 살롱, 좌파 브리소 파는 롤랑 부인의 살롱이 근거지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살롱의 여론 조성 기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신 새로운 조직들과 신문 등 여론 형성 기관들이 등장, 성장했다. 책값이 싸지고 공공 도서관이 늘어나면서 문화가 확산하였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 때문이었을까? 계몽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여성 노동이 증가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지배력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이에 앞장선 인물은 의외로 조프랭 살롱에서 가장 박식하고 재치가 있던 장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다. 심지어 볼테르 및 백과전서파와 대립해 가면서까지 전 인민에게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던(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장 자크 루소 역시 여성에 대한 관점은 전근대적이었다. 그는 “여성은 정치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집에서 아이들 기르는 데 전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대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에 더욱 진전되었다. (콜린 존스,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이런 유형의 문제는 혁명 이후 계몽주의가 반영된 새 헌법에서도 나타난다. 유산계급에 국한한 참정권 부여와 노예제도 폐지 유보 등이 그것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계몽이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서구 계몽주의는 실용적 이성만 강조되었을 뿐, 인류 공동의 절대 선(善)을 추구하는 ‘실천 이성’은 오히려 허약해졌다는 지적(신정현,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결국, 계몽주의는 혁명을 견인했지만, 부르주아 철학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