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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04. 2024

바렌 도주 사건이 던진 파문, 입헌군주제

프랑스 최초의 헌법 '1791년 헌법'

마리 앙투아네트는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조력자를 구했다. 국민회의 의장 미라보 백작이었다. 루이 16세는 빚에 허덕이는 그에게 손수 서명한 25만 리브르의 채무 증서 네 장을 주었다. 그러자 미라보는 왕에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계책을 건의했다. 혁명을 부추겨 무정부 상태, 즉 내란으로 몰아가야 한다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국왕이 국민의회와 직접 맞서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앞장서게 하는 방법이었다. 비도덕적이지만, 정치적으로 통찰력 있는 역발상이었다. 그러나 1791년 4월, 마흔두 살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했다. 국왕과 혁명 세력 간 중재자가 사라진 것이다. 이젠 국왕 홀로 결정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그러나 유약한 왕은 이도 저도 아닌 도망가는 길을 선택했다. 

목표는 몽메디 요새, 도주 준비는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전담했다. 앙투아네트의 연인으로 알려진 그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와 프랑스군 연대장이 되어 있었다. 왕비의 입장에서 페르센은 자신의 명예를 최후까지 지켜주려 했던 마지막 충신이자 진정한 친구였다. 계획은 나름 철저하게 세웠다. 페르센 자신의 이름으로 마차를 예약하고 가짜 여권을 준비했다. 러시아와 스웨덴 귀부인에게서 30만 리브르를 빌렸다. 국외에 있는 영주들 그리고 지휘관 부이예 동부사령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차가 발각될 경우를 대비했다.

한편, 왕실에서는 먼저 도주 명분을 확보하려 했다. 국왕은 국민의회와 시청에 부활절 주일을 파리 도심에서 9.6킬로미터 떨어진 생클루에서 보낼 생각이라고 전했다. 순식간에 자코뱅파 언론은 왕이 선서 거부파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한 후 도주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4월 19일, 2시간 넘는 소란 끝에 출발하려는 국왕 부부를 멈춰 세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실은 자신들이 포로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부각한 영악한 사전 포석이었다.

작가 미상, <바렌에서 잡혀 돌아온 국왕 일가(1791)>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1791년 6월 20일 자정 무렵, 일정을 하루 늦춘 일행의 마차가 드디어 출발했다. 교황 피우스 6세가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비난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겨지자, 계획은 여기저기서 허점이 발견되었다. 일행이 열네 명으로 늘어 마차 두 대를 준비해야 했다. 경마차가 아니라 속력을 내기 위해 말 여덟 마리가 끄는 마차였다. 편의를 위해 개조한 마차에서는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났다. 왕과 왕비의 차림새는 품격을 갖췄다.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대기 병력과 연락 책임자로 왕비의 미용사였던 레오나르를 뽑은 것이다. 

컴컴한 밤이 지나고 대낮이 되자 화려한 마차 행렬을 본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일행을 기다리던 두 명의 장교는 레오나르의 어수선한 말을 듣고 왕이 오지 않는 것으로 착각해 잠이 들었다. 결국, 자코뱅파 일원인 바렌의 우체국장 드루에가 국왕 부부의 도주를 눈치챘다. 부득이 일행은 바렌 시장 소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낮고 초라한 지붕 아래 왕과 왕비, 왕의 막냇동생 엘리자베스 그리고 가정교사와 아이들, 시녀까지 여덟 명이 좁은 방에 앉았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왕은 치즈 조각을 잘랐다. 이때 슈아죌 공작이 민병대를 헤치고 들어와 이곳을 빨리 벗어나자며 왕의 결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왕이 망설이던 사이에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던 국민의회 의원 중 두 명이 마침내 왕을 찾아냈다.  (대문 그림: 듀플레시 베르티랑의 <파리로 되돌아온 국왕 일가(1791)>)

 

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토이의 <루이 카페의 체포(1804)>

혁명과 관련한 동판화로 유명한 피에르 가브리엘 베르토이가 현장을 증언한다. 맨 왼쪽 사내가 손가락으로 국왕을 가리키자, 실내는 순식간에 국민군과 민병대 병력이 에워쌌다. 횃불과 창을 든 그들은 국왕이 프랑스를 버렸다는 사실에 매우 격앙되었기에 분위기는 매우 위압적이었다. 반면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루이 16세는 체념한 듯 놀라는 기색이 없다. 혁명주의자 의원 바이용이 왕에게 의회의 명령서를 전했다. 왕이 국민의회에 복종하여 파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파리에서 바렌까지는 20시간,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3일이나 걸렸다. 왕은 프랑스를 버리려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고 끊임없이 해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국왕이 도주할 때 튈르리궁에 써 놓았던 "자신이 2년 동안 재가한 모든 것을 무효로 간주한다"라는 글로 인해 혁명을 부정하는 본심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영국화가 토마스 팰컨 마샬, <국왕 가족의 체포(1854)>

이 사건은 민심에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사후 처리 문제를 두고 라메트 등 온건파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자코뱅에서 나와 라파예트와 함께 푀양파를 구성했다. 그러자 당통과 마라 등 과격파만 자코뱅에 남아 7월 17일 파리 마르스 광장에서 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장 바이이의 명을 받은 라파예트의 국민방위대가 처음으로 기병과 총격으로 그들을 해산시켰다. 계엄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사전 경고 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약 50명이 쓰러지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바이이와 라파예트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다. 곧이어 8월에는 낭시의 수비대 병사들의 밀린 봉급 지급과 관련 명령 불복종 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라파예트의 사촌인 메스(Metz)군 사령관 부이예 후작이 장교 편을 들어 주모자급 20여 명을 처형하면서 강제 진압했다. 당시에는 귀족 출신만이 장교가 될 수 있는 체제였다. 군의 개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푀양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코뱅 클럽의 법령 반대 청원이 있었음에도 9월 3일,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루이 16세는 9월 14일 헌법 준수에 서명함으로써 직무에 복귀하면서 튈르리 궁 통제가 해제되었다. 헌법은 제한 선거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왕이 없는 권력 구조란 사례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혁명은 왕권 폐지를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헌법은 왕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권과 입법권을 분리했다. 대신 왕에게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했다. 군 통수권이 왕에게 없었으며, 전국 83개 도 밑에 군, 면, 코뮌으로 단일화하여 자치권을 부여했다. 겉으로 보면 헌법은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듯하다. 그러나 국가 재정 기여도에 따라 백성을 능동 집단과 수동 집단으로 갈랐다. 최소 3일 치 노동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지 못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수동 시민이 되었다. 이로써 1791년 프랑스 성인 남자 730만 명 중 약 40퍼센트에 해당하는 300만 명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물론 국민방위대 입대 자격에서 제외되었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파리 꼼뮌까지≫)

더구나 의원을 선출할 2차 선거의 선거인 자격은 보다 많은 세금 납부 능력을 요구했다. 주거지와 직업에 따라 다르지만 100~200일 또는 400일 임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소유해야 했는데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5만 명도 채 되지(구학서,  ≪이야기 세계사 2≫) 않았다. 부르주아 출신이 의회를 장악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구조였다. 1789년 10월 봉기를 주도했던 여성들의 권리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또한 노예제 폐지를 거부하고, 파업과 노동조합 결성을 금지했다. 이후 파업은 1864년까지 범죄가 되었고, 노동조합은 1884년까지 금지되었다.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부르주아가 주도한 혁명의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낸 결과였다.


마리 기요민 브누아가 <마들렌의 초상화(1800)>
안 루이 지로데의 <니그로 남성의 초상화(1798)>

마침, 제한적이나마 당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을 드러낸 그림이 있다. 신고전주의 여성화가 마리 기요민 브누아가 그린 <마들렌의 초상화>다. 프랑스 해외 영토인 과들루프 출신의 마들렌이 오른쪽 가슴을 드러낸 채 고개를 4분의 3쯤 돌렸다. 모나리자의 시선과 비교된다. 머리에 하얀 터번이 그녀의 검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고, 왼팔은 옷을 여민 붉은 끈 허리춤에 놓였다.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는 "거대한 외로움을 표현했다"라고 설명한다. 과장되었다. 당시로선 드물게 흑인 여성 노예를 모델로 했다는 점 외 특별한 매력이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다. 

처음 제목을 <니그로 여인의 초상화>로 정했다. 2년 전 지로데의 살롱 출품작 <니그로 남성의 초상화>를 의식한 듯하다. 하지만 지로데가 흑인후원회의 반발을 수용하여 <전 식민지 대표 시민 벨리의 초상화>로 이름을 찾아준 반면, 브누아는 최초 제목을 그대로 고수했다.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은 다른 나라보다 늦은 1944년에야 보장받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또 다른 소외계층인 흑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자기모순적이었다. 작품명은 2007년에 <검은 여인의 초상화>로, 2019년 봄에야 <마들렌의 초상화>로 바뀌어 전시되었다. 

한편, 1791년 8월 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오늘날 아이티 공화국의 옛 이름)에서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794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한 노예들은 1804년 독립을 선포했다. 국민공회가 1794년 새 헌법에서 제외된 노예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것도 영국과 전쟁이 벌어지자, 흑인 병력의 도움을 받고자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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