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영 Dec 04. 2024

‘마지막 정복자’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터너의 <빅토리호 후면 돛대 우현에서 본 트라팔가르 해전>

나폴레옹이 제1 통령이 되었을 때 국고에 남은 돈은 16만 7천 프랑뿐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1801년이 되자 경제는 완연히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제2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약탈한 자금과 국가가 개입한 경제정책으로 인한 성과였다. 특히 식량 폭동자들과 마주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있던 나폴레옹은 빵값, 즉 식량 부족에 대해서는 강박관념을 갖고 대응했다. 평화와 경제 안정을 도모한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3,568,885표 대 8,374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1802년 8월에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프랑스 은행을 설립했고, 세금 체계를 단순화했다. 

한편 우파와 그들의 전통적 지지층인 교회를 분리했다. 장기간 협상 끝에 1801년 7월 15일 로마 교황청과 정교 협약을 맺었는데, 신앙심이 깊었던 농민층에도 효과가 있었다.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반대파나 잠재적인 적을 무자비하게 대했다. 왕당파가 주도한 암살 기도를 이용해 오히려 공화파를 제거했다. 1804년 2월, 나폴레옹 암살 계획과 관련 카두날과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피슈그루 그리고 이들과 접촉한 모로 장군을 체포했다. 이 사건을 통해 앙기앵 공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를 납치하여 죽이는 등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권력 세습의 당위성을 부각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실망했고, 베토벤이 헌정하려 했던 3번 교향곡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란 이름을 찢어버리고 '에로이카-영웅을 추모하며'라고 고쳐 쓴 것(앤드루 마, ≪세계의 역사≫)이 바로 이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랑스를 완벽하게 장악한 그는 1804년 7월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찬성 357만 2,329표, 반대 2,569표로 황제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해 12월 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정치 선전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였다. 그는 “엉터리 행사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감동적인 사상으로 사람을 복종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확실하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1804)>

다비드가 이에 부응하여 <나폴레옹 대관식>을 완성했다. 따라서 이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이 어떤 인물인지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비드는 1년간 참석한 사람들을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세부 의전 등을 살펴보았다. 1807년 말까지 작업이 계속되었으며 이듬해 황제의 승인이 떨어지자, 살롱에 전시되었다. 10미터 가까운 대작(621×979센티)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최초의 군인 황제 샤를마뉴의 왕관을 준비했다. 건축가 페르시에와 퐁텐이 성당 실내를 로마 신전 식으로 바꾸었다. 장 바티스트 이사베이는 하객들의 옷을 맡았고, 배우 탈마는 나폴레옹에게 제왕다운 걸음걸이를 가르쳤다. 오른쪽에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지휘봉을 든 회계 담당 르브룅, 나폴레옹 민법전을 만든 사람 중 한 명인 사법부 수장 캄바세레, 십자가기 맨 위에 장식된 보주(寶珠)가 얹힌 쿠션을 들고 있는 베르티에 등 명사와 고위 관리들이 16세기말 앙리 4세 시대의 복장을 했다. 그들은 영하 2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6시부터 참석하여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그림 세부, '다비드가 스케치하는 모습'

다비드는 빛과 어둠을 이용했다. 위로부터 빛이 나폴레옹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게 그려 그의 권력을 이상화했다. 관중석 2층에는 다비드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스케치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림의 사실성을 높였다. 나폴레옹의 부탁으로 황후 조제핀과 사이가 나빠 참석하지 않았던 어머니 레티지아와 누이들을 포함해 화목한 가정처럼 꾸몄다. 중앙 귀빈석 중앙에 흰색 드레스를 입은 레티지아는 나폴레옹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 아들 루시앙과 제롬이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로마로 떠나버렸다. 나폴레옹이 일어서면서 생긴 뒷공간에는 고대 로마의 정복자 카이사르로 채워 심상치 않은 의중을 노출했다. 마지막으로 추기경 카파라라를 오른손을 들어 축복해 주는 교황 비오 7세 옆에 배치하여 교회의 승인을 극대화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황제 대관식임에도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이었다. 교황이 로마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왕관을 쓰는 나폴레옹을 상상하면서 이례적으로 파리까지 와서 주재한 대관식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왕관을 제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썼다. 신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오른 황제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태도였다. 교황이 퇴장 후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성공을 통해 왕위에 올랐음을 선포하면서 공화정에 대해 충성 맹세를 했다. 하지만 세습 군주가 된 차제, 대혁명이나 공화정 정신과는 충돌을 일으키는 행동이었다. 

다비드도 처음에는 작품 의도에 맞춰 나폴레옹 스스로 왕관을 쓰는 순간을 담으려 했다. 이때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가 만류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마무리된 일인데, 자초하여 가톨릭 신자의 원성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작품이 완성된 후 다비드는 황제가 고안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두 번째로 받았다.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던 10년간 유럽은 그 이름에 떨었다. 그러나 유독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14개월간 유지되던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1803년 다시 전쟁이 터졌다. 이제부터 전쟁은 방어에서 공격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이름을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라 명명한다. 프랑스가 영국 왕가의 영토인 독일 지역 하노버를 점령했고, 이탈리아 제노아를 합병했다. 그러자 1805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고, 이듬해 프로이센이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과감히 맞섰다. 숫자 열세에도 불구하고 안개 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동맹군을 완파했다. 프라첸 고지를 둘러싼 기만작전(빌 포셋의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과 적을 얼어붙은 못 위로 유인 후 얼음판을 깨트려 수장했다. 그날은 운명처럼 황제 대관식 기념일인 12월 2일이었다. (대문 그림: 프랑수아 제라르, <아우스터리츠 전투(1810)>)

대프랑스 동맹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졌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에서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승인했고,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 영토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예나 전투에서 다시 패한 프로이센은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이때 프랑스는 프로이센 및 러시아 사이 완충지대로써 라인 연방을 구축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두 국가와 장기적인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빅토리호 후면 돛대 우현에서 본 트라팔가르 해전(1806~1808)>

반면 해전의 양상은 확연히 달랐다. 영국 침공이 연이어 무위로 끝난 1805년 10월 21일, 넬슨이 트라팔가르 만에서 빌뇌브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여섯 시간의 교전 끝에 빌뇌브 함대 36척이 전멸했고, 도망한 함선 중 4척이 더 격침되었다. 영국의 대승리였다. (노명식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터너가 조지 4세의 의뢰로 <빅토리호 후면 돛대 우현에서 본 트라팔가르 해전>을 그렸다. 

우지끈 부서지는 돛대, 이로 인해 찢어지는 돛, 포와 소총의 요란한 소리, 자욱한 화약 연기 그리고 단말마 비명과 부상자들의 절규···. 터너는 이 장면을 위해 메드웨이 강에 가서 기함 빅토리호를 걸어 보고, 무기와 제복을 연구하고, 장교와 병사들로부터 현장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 후 돛대 우현에 올라 직접 관망하듯 세부 현장을 서술했다. 따라서 적함에서 날아온 직경 1.75센티 머스킷 소총 탄환이 왼쪽 폐부에 박혀 중상을 입고 갑판 위에 앉아 있는 넬슨의 모습이 작게 처리되었다. 

영국인이 원했던 웅장한 서사나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그림보다 훨씬 처절했다. 굉음과 화약 연기 속에서 장병들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전우가 옆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긁히고 화상 입은 손을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했다. 당시 전투는 포탄을 쏜 후 얼마나 빨리 탄을 재장전, 발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다. 수병 열다섯 명이 2톤 대포를 다시 배 안쪽으로 끌어당겨 포신을 물로 식히고, 포문 안을 닦고, 새로 포탄을 장전했다. 넬슨의 수병들은 프랑스군에 비하면 그 속도가 두, 세 배나 빨랐다. 지독한 훈련 덕분이었다. 배 안 브랜디 통에 운구되던 마흔일곱 살 넬슨이 깨어나 당시 전황이 담긴 그림들을 보게 된다면, 분명 터너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해전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이 물거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제패가 완성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그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에 입성한 그는 전 유럽에 적국 영국과 모든 교역을 금지한다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힘으로 순리를 거스르는 정책이었다. 또한 영국이 바다를 장악한 상황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봉쇄령이었다. 농업 위주의 경제 구조를 지닌 유럽 국가들은 농산품 수출이 차단되고 공산품이 부족해졌다. 그리고 장기적인 경제 침체로 인해 불만이 높아지면서 밀무역이 성행했다. 심지어 영국을 대체할 만큼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프랑스조차 1810년 후반 불황이 찾아오면서 밀수에 동참했다. 그런데 밀무역이란 성격이 오묘했다. 피지배국에게는 애국적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이적 행위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