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5월 3일>, <눈보라>, <프랑스에서 온 불길한 소식>
1807년 2월 8일, 나폴레옹은 아일라우 전투에서 외형상으로 승리한 듯 보였으나 실상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러시아의 기후와 지리적 요소를 무시했고, 군사 조직이 붕괴됐으며, 전술적 오류를 범하는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종군화가 장 그로가 눈 덮인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병사를 보듬는 <아일리우 전투의 나폴레옹>을 그려 황제를 위로했다. 격하게 감동한 나폴레옹은 그에게 훈장을 직접 달아주었고, 전투 당시 입었던 망토와 모자를 하사할 정도였다.
다행히 그해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압승하여 평화와 동맹을 얻었다. 7월에 러시아, 프로이센과 틸지트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러시아가 대륙 봉쇄에 합류하자, 영국은 실제적인 타격을 입었다. 해군이 사용하는 최상급 목재를 수입하는 발트해가 막혔다. 그 밖에도 쇠기름 대부분, 아마 씨와 역청 절반, 타르, 철의 공급이 차단되었다.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영국은 하는 수없이 나폴레옹과 화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나 완벽한 대륙 봉쇄를 의식한 황제는 망설였다. 나폴레옹은 그해 11월,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을 주어 봉쇄령을 어긴 포르투갈을 먼저 침공했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왕실과 함대를 아예 브라질로 옮겼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애인이자 재상인 마누엘 고도이가 국왕 카를로스 4세를 배신하고 영국과 협상을 개시했다. 나폴레옹은 정국이 어수선한 스페인을 가볍게 봤다. 영국의 화해안을 거절한 후 대륙의 마지막 열린 문을 잠그기 위해 1808년 2월 16일 3개 군단을 스페인에 투입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그해 교황령을 병합함으로써 가톨릭 수호국을 자처하는 스페인 국민에게 충격을 던졌다. 그리고 카를로스로부터 받은 왕위를 형 조제프(호세 1세)에게 선물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했다. 모멸감은 죽음 다음의 부정적 감정이다. 스페인인들은 프랑스인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유럽 최초의 민족이 되기로 작심했다. 3월 17일 ‘아란후에스 반란’으로 시작한 봉기는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5월 3일 새벽 4시, 마드리드의 캄캄한 밤하늘을 뚫고 총성이 잇달아 울렸다. 시민 43명이 반란죄로 총살당했다. 하루 전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나폴레옹 친위대에 저항하는 대규모 봉기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1808년 5월 3일>을 그려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시인 보들레르는 이 작품을 보고 고야를 가리켜 '진실 속에 숨겨진 잔인함'을 표출한 화가라며 칭찬했다.
짙은 어둠이 겁박하는 가운데 구원을 빌어줄 교회의 불빛조차 꺼졌다. 경직된 프랑스 병사들이 총구를 눈앞으로 들이댄다. 그러자 전면 흰 셔츠를 입은 남성이 나를 쏘라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려 다른 희생자 앞을 막아섰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덩치가 압도적으로 크다. 사격대 앞 등불의 빛이 그의 셔츠 위로 쏟아지면서 사내는 희생의 그리스도로 환생한다. 옆에서 삭발 성직자가 기도를 올린다. 널브러진 시체에서 흘러내려 응고된 피는 이미 많은 처형이 이루어졌음을 알려 준다. 순서를 기다리는 희생자들은 주먹을 움켜쥐거나 눈을 손으로 가리며 '순수한 공포'를 드러낸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 초기, 스페인 사람은 나폴레옹 혁명군이 압제와 부패로부터 해방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점령군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스페인 독립 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최초의 게릴라전이 탄생했고, 프랑스 군은 6년간 악전고투했다. 그중 10만 명의 시민이 1만 2천 명으로 줄 때까지 싸웠던 동북부 사라고사의 항전이 가장 유명하다. 그들은 전 유럽인에게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영국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위해 3만 명을 빼간 사이 웰링턴 후작이 1811년에 포르투갈 동부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어 상황을 지배했다. 그는 동맹군을 지휘하며 1813년 5월 살라망카, 6월 비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마침내 반도에서 프랑스 군을 몰아냈다.
예순여덟 살 고야는 의회의 주문으로 연작 두 점을 완성했다. <1808년 5월 2일>은 역동성이 뛰어났다. 하지만 시대의 고통을 증언한 ‘5월 3일’이야말로 명작으로 회자된다. 카를로스 4세와 호세 1세의 궁중 화가였던 고야는 국민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 그리고 더는 평화로운 풍경화나 풍속화에 손대지 않았다. 1819년부터 마드리드 근교 라 킨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에 틀어박혀 ‘검은 그림’ 14점을 그렸다.
1809년, 패배감에서 벗어난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켰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무적 황제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나 바그람 전투에서 아깝게 패했다. 프랑스에 영토 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야만 했다. 그러나 바그람 전투는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거둔 마지막 대승이었고, (프랭크 매클린, ≪나폴레옹≫) 프랑스 국민도 아우스터리츠 승전처럼 환호로 일관하지 않았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정복욕을 비로소 실감하는 분위기였다. 나폴레옹은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조제핀과 이혼하고, 1810년 4월 프란츠 2세의 딸 열여덟 살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다독였다. 프랑스 국민에겐 그녀의 고모할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오르는 결혼이었다.
대륙 봉쇄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은 러시아 지주 계급이었다. 1811년 여름, '동맹의 마지막 희망'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미국기를 게양한 영국 배 150여 척의 입항을 받아들였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나폴레옹은 아일라우 전투의 교훈과 스페인에 발목 잡힌 상황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1812년 6월 24일에 네만강을 건넜다. 파멸을 자초한 전쟁이었다. 그랑다르메(Grande Armée, 대육군) 67만 5천 명의 대병력은 병참선이 부실했다. 차제 초기 병력이 겨우 16만 명이었던 러시아 군은 교전을 피해 초토화(청야) 작전으로 임한 것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프랑스 군은 한 달이 넘는 여정 끝에 9월 7일에야 적군과 맞붙었다. 이미 많은 말과 병력이 손실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예순일곱 살 쿠투조프의 선전으로 보로디노 전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었다.
9월 14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로스톱친 백작의 명령에 따라 건물 7할 이상이 화재로 소실된 유령의 도시에서 한 달을 허비했다. 고대하던 차르의 평화 요청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동장군을 앞두고 초조해진 나폴레옹은 10월 19일 퇴각을 결정했고, 12월 14일에 마지막 병사가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혹심한 추위와 아사, 그리고 코사크 기병의 유격전에 시달렸다. 거짓말처럼 그랑다르메 37만 명이 전사했고, 20만 명이 포로가 되거나 버려지면서 러시아 원정은 막을 내렸다. (대문 그림: 독일 화가 아돌프 노텐의 <모스크바로부터 나폴레옹의 후퇴 (1851)>)
러시아의 전쟁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은 <프랑스에서 온 불길한 소식>을 통해 당시의 나폴레옹 내면을 전했다. 조명도, 화려한 의자도 없는 어느 러시아 정교 교회 안 숙소 겸 집무실에서 황제의 오만했던 카리스마가 사라졌다. 손에 든 편지를 읽고 입을 꾹 다문 채 표정이 사뭇 심각하다. 과연 그림 제목에서 말하는 ‘불길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 조심스럽게 스페인에 있던 웰링턴 공작의 프랑스 진군, 혹은 말레 장군의 쿠데타로 추정해 본다. 러시아 원정 실패 후 나폴레옹은 급격히 몰락했다. 오스트리아까지 동참한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고, 이듬해 3월 30일 파리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4월 11일 퇴위 후 코르시카 남방의 작은 섬 엘바로 떠났다. 훗날 나폴레옹은 "나를 몰락시킨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다"라고 술회했다. (J. 네루의 ≪세계사 편력≫)
프랑스혁명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나 명예혁명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인 다수는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을 야만적이라고 깎아내렸다. 특히 1792년 이른바 9월 학살 이후 영국 여론은 보수적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 성찰(1790)≫) 하물며 나폴레옹을 해방자로 반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눈보라-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부대>를 그렸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를 치기 위해 알프스 몽스니 고개(곰브리치 추정)를 넘는 순간이다. 터너는 봉쇄령 이전인 1802년에 다비드의 화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다비드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을 보았다. 그러나 터너는 다비드와 달리 알프스의 대자연 위용에 집중하면서 나폴레옹을 한니발에게 빗대어 조롱했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오른쪽이 깎아지른 절벽이다. 물감을 0.6cm로 겹칠한 태양이 높이 떠 광대한 빛을 지상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나 거대한 눈보라가 몰려오자, 알프스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인다. 매복한 살라씨 부족이 카르타고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힘을 다한 코끼리가 쓰러져 보일 듯 말 듯하다. 하물며 한니발의 존재는 발견하기 어렵다. 오른쪽 병사가 회오리치는 하늘로 횃불을 들고 길을 밝힌다. 하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의미 없는 몸부림이며, 영웅의 야망에 의해 차용된 연약한 생명일 뿐이다.
한니발은 "길을 찾지 못하면 만들겠다"라며,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무위(無爲)가 최고의 지혜인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나폴레옹의 욕망도 다름 아니다. 이 그림 도록에 첨부된 터너의 시 <희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보면 그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전히 장군은 앞장서, 희망을 품은 채 낮고 희미한 태양을 바라보는데 / 그것은 사양(斜陽)의 강렬한 작열 / 이탈리아의 폭풍으로 표백된 장막에 묻은 한 점 얼룩에 지나지 않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