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13~1715) 이후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메노르카를 양도받는 한편, 노예 수송의 특권을 빼앗았다. 이후 의회에서 노예 제도를 금하는 법률을 가결했음에도 불법은 지속되었다. 1790년 69만 7,000명이던 미국의 노예가 1861년에는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2>) 이 와중인 1781년 9월 초, 노예선 '종(Zong)'은 아프리카 연안을 출발해 자메이카로 향하고 있었다. 배에는 400여 명의 노예를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다리에 쇠못을 박아 둘씩 조여 놓았다. 노예들은 빽빽하게 실렸기에 모로 누워 지내야만 했다. 11월 말 목적지 근처에 왔을 때 콜링우드 선장의 명령 하에 병든 노예 132명이 사슬도 풀지 않은 채 카리브해에 던져졌다. 물건엔 권리가 없다. 병사, 자연사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기에 ‘유실된 짐’, 즉 '해상 손실'로 처리하려 한 것이다. 사건은 1783년 법정에 섰고, 1833년에야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윌리엄 터너는 <노예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바다에 던지다-폭풍이 다가온다>를 통해 사흘간에 걸쳐 식인상어가 들끓는 바다에서 저질러진 잔인한 사건을 고발했다.
빛나는 태양과 거센 파도, 붉은 화염에 휩싸인 배, 그리고 떠다니는 시신들에 대한 과감한 묘사가 돋보인다. 낭만주의는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자연이 결코 죽은 사물이 아니며, 정복의 대상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숭고’의 자연은 압도적인 존재로, 낭만주의 운동의 초석이 된 개념이다. 이에 비하면, 인간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터너는 대자연을 직접 체험하고 싶어 돛에 몸을 묶고 폭풍우 속에서 바다를 4시간 넘게 관찰했다. 햇빛 아래 수시 변하는 강렬한 원색의 바다를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표현한 자연스러운 붓놀림은 이런 경험을 통해 탄생했다. 그 누구도 터너만큼 바다를 제대로 표현하는 화가가 없었다.
이 색채 처리 기법은 <눈보라 속의 증기선>에서도 반복된다. 배 위로 몰아치는 빗줄기 속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가운데 칠하다 만 것처럼 돛대와 깃발이 희미하다. 이를 위해 물감을 두껍게 덧칠하고(임파스토 기법), 불투명한 물감을 얇게 덧바르며(글레이즈 기법), 짧은 붓과 엄지손톱을 사용하여 물감을 긁어냈다. 그러나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호(1839)>에 비해 터너의 시도는 환영받지 못했다. 한 비평가가 이 작품을 두고 “비누 거품과 흰 물감이 가득하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터너는 “그럼, 바다 풍경에 뭐가 더 있다는 말이냐? 직접 가보면 알 텐데”라며 반발했다.
그는 평생 폭풍우, 대형 화재와 같이 인간이 손쓸 도리가 없는 드라마틱한 주제를 다루어 왔다. 인간 이성의 부정이며, 대자연의 외경이다. 그러나 후기작 <비, 증기 그리고 속도감-위대한 서부행 철도>에서 그의 예찬은 대자연을 극복한 인간 이성으로 향했다. 20세기 초 미래주의 화가 이전 터너에게서 발견되는 기계 문명에 대한 긍정이자 역사 해석의 융통성이다.
영국 수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모직물은 식민지 인도의 ‘면포(캘리코)’ 수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18세기 초 면직물 산업으로 대체하면서 인도로부터 수입을 금지하고, 원료인 목화를 수탈했다. 부드럽고 흡습성이 뛰어난 면포가 큰 인기를 끌자 방적기 개발이 이루어졌고, 동력 확보를 위해 석탄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석탄을 가공해서 만든 코크스와 증기기관으로 인해 18세기 새로운 제철 시대를 맞이했다. 1765년 드디어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뉴커먼식 증기기관을 고쳐 제대로 된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1769년 특허를 받았음에도 제품화할 돈이 없었다. 이때 금전적으로 와트를 도운 인물이 버밍엄의 ‘철의 족장’ 매슈 볼턴이다. 자본주의가 형성되었기에 산업혁명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그 볼턴이 영국의 문필가 제임스 보즈웰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 나는 이곳에서 온 세상이 손에 넣기를 원하는 것을 팝니다. 바로 힘이지요.”
1775년부터 18세기 말까지 볼턴의 공장에서는 약 450대의 증기기관을 제작했다. 처음에는 광산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곧 제분소, 양조장 등 다른 공장으로 퍼졌다. 그 결과, 면직물은 1785년부터 1860년 사이 영국 총생산액의 60%를 차지하는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했다. 1814년, 스티븐슨에 의해 최초의 기관차가 제작되었다. 1830년에는 항구도시 리버플과 최대 면포 생산도시 맨체스터를 잇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철도가 개통되었다. 인간이나 동물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면서 자연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 부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까닭이기도 하다.
동양은 서양보다 사회발전지수에서 1,200년을 앞서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월당했다. 이언 모리스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그 전환점을 영국의 산업혁명이라고 주장했다. 1700년만 해도 방적공이 450g의 실을 잣는 데 200시간이 걸렸던 것이 1800년이 되자 같은 작업이 3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농촌은 피폐해졌고, 노동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사라졌다. 자본가들이 그 잉여를 나눠 가질 의향이 모기 눈물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장을 세우고 기계를 설치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며, 부족한 원료를 벌충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제시했다. 대규모 노동력 착취가 이루어져 인권과 ‘삶의 질’ 문제가 발생했다. 정체불명의 지도자 N. 러드 주도하에 1811년~1817년간 공장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 1830년에는 게트의 농장 노동자들이 기계화된 탈곡기를 공격하는 ‘스윙 폭동’을 일어났다.
한편 기계에 야만성을 결합한 영국은 바이킹의 현신을 자처했다. 대포를 장착한 증기선을 앞세워 세계 곳곳의 얕은 여울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식민지가 확산했다. 다음으로 미국과 독일이 중공업 산업을 성공적으로 일으켰다. 이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로 무장한 파괴적인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빠른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다. 전쟁이 변화의 동력으로 작동한 것이다. 금속 가공과 바퀴, 승마술과 항해술, 수학과 셈법, 건축과 종교에서 이루어진 발전은 무력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1, 2차 대전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과학기술은 전후 폭발적인 지원을 받아 다시 놀라운 비약을 거듭했다.
그러나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던 대중은 문득 깨닫는다. 과학기술에도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불편할지 모른다. 가치중립적인 과학을 선악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과학기술은 이미 양날을 가진 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꼭짓점에 핵무기 개발이 있다. 따라서 이제라도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문학이 상대적으로 중요해지는 이유다.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전 친구 발터의 어머니가 전공을 고민하던 젊은 하이젠베르크에게 충고했다. 그는 훗날 양자역학 관련 노벨 물리학상 받았으며, 전시 독일 원자탄 개발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 세상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면 아름다운 것이 더 많아질 테고,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면 실용적인 것들이 더 많아질 테지. 그래서 각 개인의 결정은 자신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중요한 거란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다시 작품에 집중하자. 하늘이 찌푸렸고 비는 45도 각도로 몰아친다. 템즈강 위에는 조그만 나룻배가 보이고, 다리 아래 아이들은 오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색조는 황금색과 푸른색이다. 심지어 다리까지도 같은 계열로 어슴푸레하게 칠하여 비와 수증기가 대기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나 바탕색을 뚫고 나오는 다리와 그 위를 지나는 증기기관차의 검은색이 뚜렷하다. 특히 기차의 선두 부분은 선명하고 뒤로 갈수록 엷어져서 속도감을 실감한다. (1840년대 초, 시간당 150km의 속도를 내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 니콜 튀펠리, <19세기 미술>) 기관차의 모습을 담은 최초의 그림이다. 그러나 당시 대중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다. 비평가들은 완성도와 현실감이 모자란다며 조소를 퍼부었다. 심지어 영국 낭만주의를 함께 이끌면서 터너를 향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준다’고 칭찬했던 컨스터블까지도 그랬다. (제목 그림, <국회의사당의 화재(1835)>
“그는 엷은 증기를 그리려고 하는 모양인데, 너무나 덧없고 공허한 짓이다.”
터너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10분 동안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의 추상화 형태로 현장을 담았다. 자연의 위대함을 직접 체험해 본 그만이 빗속을 뚫고 나오는 기관차의 힘에 경탄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에 머무르다가 보불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프랑스 청년 클로드 모네가 기차를 화폭에 담았다. 인상주의 작품 <아르장퇴유의 철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기차의 얌전한 모습이 터너의 것보다 더 낭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