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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28. 2022

윌리엄 터너가 바라본 나폴레옹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는 1810년 절친이자 후원자였던 월터 포크스 의원의 아들 호크에게 역사화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호키, 너는 2년 뒤 이걸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땐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이라고 불리게 될 거다.”


<눈보라-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부대(1812)>

바로 <눈보라-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부대>를 말한다. 로마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는 기원전 241년부터 100여 년에 걸쳐 지중해의 제해권을 놓고 전쟁을 했다. 포에니 전쟁이다. 모두 세 차례 전면전을 치렀는데, 한니발 장군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이끌었던 카르타고의 명장이다. 로마 입장에서는 본토에서 벌인 유일한 전쟁으로, 항복 직전까지 갔던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당시 한니발 바르카는 "인간이 정복하기에 너무 높은 산이란 없다"며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곰브리치는 이곳을 오늘날 '몽스니'라 불리는 고개로 추정한다)를 넘었다. 상상치 못한 사태에 로마 시민들을 혼비백산했다.

다비드, <알프스 생 베르나르 관문을 넘는 나폴레옹(1800~1801)>

다비드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릴 때 그를 이 위대한 영웅 한니발에게 빗대 가공했다. 작품 속 바위 위에 보나파르트 이름과 함께 한니발의 이름도 새겼다. 그러나 터너는 한니발을 다른 시각에서 보았다. 그림에서 지평선 위 코끼리 위에 보일 듯 말 듯 묘사되었는데, 그나마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처리했다. 어쩐 일일까? 인물에 대한 화가의 평가는 작품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 터너는 한니발을 영웅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채물감으로 지도를 그려 출판사에 납품하는 일로 돈도 벌고 적잖은 인기도 얻었다. 그러나 회화 장르 간 계급을 부여한 기존 관습에 도전하여 풍경화에 전념하기로 했다. 프랑스 ‘대륙 봉쇄령’ 이전인 1802년 터너는 후원자들의 공동 부담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 다비드의 화실에서 1800년 5월 20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염세적인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오만을 풍자하며, 대자연 '눈보라'의 위용에 집중했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보인다. 물감을 0.6cm로 겹칠한 태양이 높이 떠 이탈리아 광대한 계곡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거대한 눈보라가 몰려오자 화면은 광대한 온통 어둡게 뒤덮인다. 이 눈보라는 터너가 요크셔의 험한 날씨를 참고로 했다.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스케치했다. 전경에 매복한 알프스의 살라씨 부족이 칼을 치켜들고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다른 병사가 이를 말리고. 그 옆에는 쇠약해진 코끼리가 땅에 쓰러졌다. 오른편 병사는 하늘을 향해 횃불을 들고 길을 밝힌다. 모두 용맹과는 동떨어진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의 야망에 의해 차용된 연약한 생명일 뿐이다. 

당시 터너가 생각했던 나폴레옹의 욕망도 한니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니발은 "길을 찾지 못하면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공격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종종 무위(無爲)가 최고의 지혜인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이 그림 도록에 첨부된 터너의 시 <희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그 이해를 돕는다. 


“여전히 장군은 앞장서, 희망을 품은 채 낮고 희미한 태양을 바라보는데 / 그것은 사양(斜陽)의 강렬한 작열 / 이탈리아의 폭풍으로 표백된 장막에 묻은 한 점 얼룩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림은 동시대의 독일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처럼 애국적 메시지가 담겼다. 그러나 내용의 서사와는 무관하게 기법상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2년 이후 터너는 다양한 방향을 추구했지만, 자연의 변화와 빛에 대한 탐구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데이비드 블레이니 브라운, <낭만주의>) 이 작품에서도 태양과 대기에 관심을 기울이며 색채에 공을 들은 흔적이 역력하다. 젊은 시절, 후원자 윌리엄 벡퍼드의 집에서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Gellée)의 작품을 보고 좌절감에 눈물을 흘렸던 터너는 이렇게 독창성을 완성해갔다. (제목 그림 : 터너의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 되는 전함 테메레르호(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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