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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21. 2022

다비드의 제자 장 그로와 앵그르

그로의 <야파의 역병 환자를 위문하는 보나파르트(1804)>

다비드가 아낀 제자로는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 1771∼1835)와 앵그르가 있다. 장 그로는 열네 살에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다. 초상화가로 유명했는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 몸을 피해 1793년 이탈리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조세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다. 그녀를 통해 훗날 그녀의 남편이자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을 알게 되어 <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 장군(1796)>을 그렸다. 이후 그로는 나폴레옹의 종군 화가로 활동했으며, 1804년 <야파(Jaffa, 텔아비브)의 역병 환자를 위문하는 보나파르트>로 유명해졌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구성을 도입하여 나폴레옹이 부하 장교들과 함께 성 니콜라스 수도원을 찾은 모습이다. 베르티에 원수는 페스트를 앓고 있는 병사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에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대담하게 병사의 몸을 만지며 위로한다. 울림이 크다. 그러나 실제 있었던 치욕스러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작품이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영국의 대(對)인도 통상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이루어졌다. 병사들에게 “4,000년의 역사가 굽어보고 있다”고 전의를 부추긴 전쟁이다. 이듬해에는 오스만 제국을 치기 위해 야파를 점령했다. 그러나 전쟁을 포기한 그는 8월 22일 프리깃 두 척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본국으로 귀환했다. 나폴레옹이 1799년 3월 11일 이곳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해 1월 페스트가 창궐했고후퇴하는 과정에서 희생자 50명에게 치명적인 양의 아편을 먹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에게 주문한 그림이다. 결과적으로 원정은 실패했다.

<아일리우 전투의 나폴레옹(1807)>은 고통과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다. 1808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경쟁자 스물다섯 명을 제치고 대상에 선정된 대작이다. 아일리우 전투는 나폴레옹이 이룬 많은 지상전의 승리 가운데 하나이다. 장 그로의 작품은 웅대한 전장 분위기를 담아낸 대서사시로 평가받는다. 1807년 2월 동 프로이센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눈 덮인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병사들을 위로하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 처참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고전했다. 나폴레옹으로선 따뜻한 감성을 전달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에서 도덕적 우위와 민심 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작품을 본 나폴레옹은 격하게 감동했다. 

그는 아일라우 전쟁에서 입었던 망토와 모자를 하사하였으며, 기꺼이 그로의 가슴에 직접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그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그림을 통해 전쟁의 비극과 나폴레옹의 야심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전쟁의 피로가 가중되던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불(對佛) 동맹군에게 패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기울었다. 1816년, 실각한 다비드도 벨기에로 떠나면서 장 그로에게 뒤처리를 부탁했다. 그는 낭만주의라는 시대의 변화에도 스승 다비드의 화실을 계속 지켰다. 만년에 낭만주의로 경사되었으나 그의 결말은 다비드처럼 비극적이었다. 스승의 엄격한 비판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으로 우울해하다가 끝내 센 강에 투신했다고 한다.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

바로크를 끝으로 한 시대를 국제적으로 지배하던 미술 사조(思潮)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19세기 미술의 중심지는 여전히 파리였다. 이곳 신고전주의 지도자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로, 그는 선(線)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의 7/8이 데생이라 했으며, 이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지배적인 입장이 되었다. 라파엘로를 최고로 생각했으며, 푸생과 다비드의 화풍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화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과장한 대작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제목 그림, 1806)>이 비난을 받았다. 로마 유학 중에 소식을 접한 그는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기까지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18년이나 걸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앵그르의 로마 시기에 완성한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그랑드 오달리스크>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황제(술탄)의 여자 노예 시종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탄 처첩들의 시중을 들었다. 하렘의 최고 권력인 술탄의 어머니(발리데 술탄)에 의해 그녀들의 생활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에로티즘을 멋대로 과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 벨벳 쿠션, 보석 및 실크 커튼, 심지어 헤어스타일이나 머리 장식조차 터키를 배경으로 하는 데 불필요했다. 따라서 앵그르의 그림은 당시 서구 사회에서 만연하던 오리엔트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을 담았다고 보아야 한다. 살아 있는 윤곽선과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여인의 피부와 천에서는 촉감이 느껴진다.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앵그르의 완벽한 표현력 덕분이다. 1830년대에 등장한 사진을 능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1819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또다시 매우 부정적인 반응에 직면했다. 신체의 해부학적 왜곡으로 빚어진 일이다. 허리가 정상인보다 척추뼈가 2개 정도 더 길었고, 유방 하나가 팔 아래 잘못 놓였다는 결점이 비아냥의 대상이 된 것이다. 마니에리스모적 표현이었다. 나른한 관능을 표현하기 위해 해부학적 진실을 버린 앵그르의 의도적인 변형이다. 그러나 리듬감 있는 부드러운 긴 곡선을 선택함으로써 대중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당시 학자와 군인을 제외하면 동양을 다녀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따라서 많은 화가가 이슬람 문화에 무지했다. 장 그로와 도미니크 비방 드농의 컬렉션에서 본 동양의 공예품이나 세밀화에서 모티브를 찾아내는 정도였다. 드농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동행했던 외교관이었다. 특히 화가들은 모든 여성이 한곳에 모여 사는 하렘, 공동목욕탕, 일부다처제 등에 관해 일방적으로 상상력을 확대했다. 이런 무지가 누드와 연결되자, 그림은 관음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왜곡 문제는 6개월간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에게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당시 서구 미술의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서구의 제국주의적 탐욕을 숨기기 위해 동양은 야만적이거나 관능적이어야 했다. <오달리스크>에서 시종인 그녀에게서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다. 그녀를 고급 창녀로 묘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터키의 욕탕(1863)>과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오른편)>

말년의 작품 <터키의 욕탕>도 여전히 시대적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여성 피부의 미묘한 색채 처리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 바닥에 다리를 꼬고 전면에 등을 지고 앉아 루트를 켜는 여인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그대로다. 빨간 줄무늬 터번이 도드라진 여인의 등은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완벽하다. 붓 자국 하나 없고, 만졌을 때 감촉이 전달되는 듯하다. 윤곽선이 상대적으로 흐릿한 '발팽송의 여인'의 복숭아뼈는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당시에는 ‘뼈가 없는 인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렇듯 전작의 여인 누드를 한 데 모아 놓은 <터키의 욕탕>은 터키산 카펫 등 일부 장식품을 이용하여 이국적인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1825년에 읽은 영국 외교관 남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여행했던 <마리 볼트레이 몽테규 부인의 편지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책은 1763년에서 185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만 8번 인쇄될 정도로 인기였다. 이 책에서는 하렘의 목욕탕을 이렇게 왜곡했다.


“나는 그곳에 모두 200명 정도의 여성이 있었다. 아름다운 그들은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벗은 몸으로 대화하고, 커피, 혹은 셔벗(sherbet, 과즙에 물, 우유, 설탕 따위를 섞어 얼린 얼음과자)을 맛보고 있었다. 그동안 매혹적으로 생긴 17, 18세 노예들이 시중을 들었다.”


앵그르는 잠시 귀국했지만, 혹평에 실망하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1824년 <루이 13세의 서약>이 살롱전에서 찬사를 받고 나서야 파리로 돌아와 레지용 도뇌르 훈장을 받고 화실을 열어 제자를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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