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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17. 2022

‘마지막 정복자’ 나폴레옹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1789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다시 세습 군주가 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겐 혁명으로 인한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었다. 사실 혁명을 주도한 제3 신분의 대표는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지배계급에 불과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죽기까지 겨우 16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혁명이라는 구호로 약 1만 7,000명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공포정치가 끝났음에도 지배계층 간 권력 다툼은 여전했다. 계속되는 전쟁과 치솟는 물가, 그 사이에서 민중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사람들은 차라리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지배자가 나타나기를 소망했다. 이에 부응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Donaparte, 1769~1821)였다.

그는 1769년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제노바가 프랑스에 섬을 팔았던 해였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로 섬을 내버려 두었더라면, 나폴레옹이 과연 이탈리아 통일을 앞당겼을까? 그리고 강대국의 면모를 갖춰 고대 로마제국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을까? 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을 꿈꾸었던 고향 코르시카를 떠나 파리에 입성했다. 권력을 향한 본능이 이끌었다. 일찍이 그는 말했다.


“권력이야말로 나의 애인이다.”


열일곱 살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스물네 살에 장군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포병술은 대위 시절 백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서 처음 빛을 발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총력전 체제로 14군단 75만 2,000명이 동원되어 있었다. 1793년 그는 혁명정부 소속으로 지방 도시 툴롱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루이 16세 처형 이후 발생한 반란 진압과 함께 그곳 귀족이 불러들인 영국군을 격퇴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당에 몸담았던 사실이 문제가 되어 잠시 군대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곧바로 복귀했다.

1795년 10월 5일 이번에는 왕당파의 무장봉기를 진압했다. 바라스 백작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매력적이고 대담한 조세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다. 마침 새로 집권한 총재정부의 일원이 된 바라스 추천으로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탈환했다. 프랑스의 영광을 잊고 지내던 국민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피가 섞인 그의 내력이 승리를 도왔다. 이탈리아인은 그를 해방군으로 맞이했다.

 

1797년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 후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한 그는 1798년 이집트로 향했다. 최대 적국 영국 함대를 우회하여 1798년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일강의 전투’에서 함대가 궤멸당했다. 이때부터 넬슨은 해군 전술을 모르는 나폴레옹의 천적으로 등장했다. 

그 사이 본국에서는 전염병이 돌고 정부 내 불화와 반목이 심해졌다. 또한 피점령국에서는 해방군인 줄 알았던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봉기를 일으켰다.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비밀리에 혼자 귀국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공회를 강제 해산하고, 헌법을 사실상 폐기했다. 쿠데타(coup d’État )였다. 1799년 10년 임기의 수석 집정관(통령)이 되자 그는 ‘혁명이 완성되었다’라고 선언했다. 나폴레옹은 3년 뒤 종신 집정관을 거쳐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마침내 황제에 올랐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폴레옹 대관식(1807)>

그 역사적 현장이 담겨 있는 10m 가까운 대작(621×979cm)이 바로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1804)>이다. 800년 샤를마뉴로부터 출발한 교황 주관의 대관식은 신권과 왕권을 동일 선상에 둔다는 의미다. 교황 비오 7세가 온 김에 교회 의식으로 결혼식을 다시 올린 나폴레옹은 이튿날인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세심하게 준비했다. 건축가 페르시에와 퐁텐이 맡아 성당 실내를 로마 신전 식으로 바꾸었다. 장 바티스트 이사베이는 하객들의 옷을 맡았고, 배우 탈마는 나폴레옹에게 제왕다운 걸음걸이를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충격적인 일은 대관식 당일에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교황이 갖고 있던 왕관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썼다. 곧이어 나폴레옹이 직접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비오 7세가 물러나자 대혁명의 성공을 통해 왕위에 올랐음을 선포하면서 공화정에 대해 충성맹세를 했다.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신이 아니라 국민 투표에 의해 인정받은 정권의 정당성을 대내외 천명한 것이다.


다비드는 1년간 참석한 사람들을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세부 의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1807년 말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1808년, 드디어 작품은 황제의 인정을 받아 살롱에 전시되었다. 마치 다비드가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묘사했다. 오른쪽에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지휘봉을 든 회계 담당 르브룅, 나폴레옹 민법전을 만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법부 수장 캄바세레, 십자가가 달린 보주(寶珠) '글로부스 크루키게르(라틴어 Globus cruciger)가 얹힌 쿠션을 들고 있는 원수 베르티에 등 명사와 고위 관리들이 16세기 말 앙리 4세 시대의 복장을 했다. 그들은 영하 2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6시부터 참석하여 추위에 떨었다고 한다.

그림 세부

그러나 다비드는 전반적으로 빛과 어둠을 이용하여 사실성과 함께 권력을 이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작품에는 현장에 없던 인물이 몇 명 포함되었다. 중앙 귀빈석 중앙에 흰색 드레스를 입은 나폴레옹 어머니 레티지아 보나파르트가 앉아 있다. 조세핀과 관계가 나빴던 누이들은 화목한 가정을 연출하고 싶어 하여 나폴레옹의 요구를 반영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뒤에 교황 비오 7세가 오른손을 들어 축복해준다. 뭐가 좋아 그랬겠는가? 꾸민 거다. 그 옆에는 역시 불참했던 추기경 카파라라, 마지막으로 다비드 자신을 그려 넣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두 번째 열의 중산계급 사이에서 마치 증인이라도 되는 양 현장을 스케치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작품명은 <나폴레옹 대관식>인데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이다. 다비드는 처음에 작품 의도에 맞게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쓰는 순간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 1770~1837)가 “불필요하게 국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만류하면서 대신 황제의 권위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영리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잘 마무리된 일인데, 굳이 자초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원성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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