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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14. 2022

신고전주의의 선구자 다비드와 혁명

1738년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와 인근 헤르쿨라네움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750년을 조금 지나서 로마에서 두 사람의 독일인, 멩스와 빙켈만에 의해 신고전주의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멩스는 평범한 화가였고, 빙켈만은 탁월한 고고학자였다. 그들은 저서를 통해 고대 양식의 맹목적인 모방(고전주의)이 아니라, 당시 영웅적 시대의 도덕 및 정치적 이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806년에는 엘진 경이 돈을 주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파르테논에서 떼어온 대리석 부조 등 100여 개를 모아 런던에 진열(엘진 마블스)했다. 그러자 유럽에서는 고고학의 열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그랜드 투어가 호황을 이루면서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굳혔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에 피로를 느끼면서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동에서 출발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이 질서와 고귀함이라는 미덕을 제공한다는 계몽주의의 교훈을 담았다. 조각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가, 회화에서는 조셉 마리 비엥(Joseph Marie Vien, 1716~1822)의 제자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앞장섰다. 


다비드는 영웅의 이야기를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으로 표현했다. 그는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서 프랑스혁명의 시각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1774년 스물여섯 살 느지막한 나이에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살롱전에서 ‘로마상(賞)’을 받았다. 5년간 로마에서 유학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에 심취했다. 특히 폼페이 유적에서 고대 미술을 접하고 "그것은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것 같았다"라는 말로 당시의 감동을 전했다. 1785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로마에서 처음 공개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기존의 역사화와 달리 현실 세계와 엮어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크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를 기반으로 한 일화로, 기원전 669년 로마와 알바 가(家), 두 가문(도시국가)의 전쟁을 다루었다. 남성들의 호기로운 모습과는 달리 양쪽 가문의 집안 여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닥쳐올 운명에 절망한다. 역사적 담론과 신파조의 가정사를 버무린 다비드의 전매특허가 잘 드러났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 작품인데 그 해석을 둘러싸고 보수-진보 양 진영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보수 진영은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진보 진영에서는 모든 계층의 합의에 따라서 작동되는 공화정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림은 혁명을 대변하는 위치까지 격상되었다. 명성을 얻은 다비드는 결국,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의 우상이었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와 의사 출신 장 폴 마라와 더불어 자코뱅당을 이끌었다. 대표작 <마라의 죽음>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1793년 1월 16일 루이 16세의 처형과 관련 투표자 721명 중 무죄는 334표였으나 다비드가 표를 보탠 387명이 찬성했다. (이원복의 <새 먼 나라 이웃 나라 프랑스 편>) 그러나 루이의 처형 이후 유럽 절대왕정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직을 강화했고, 방데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강경파 산악당은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창설했다. “인제 그만 자비와 연민을 베풀자”고 주장하며 지롱드당은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포의 해’인 그해 4월 5일, 당의 영도자 서른다섯 살 조루주 당통이 ‘독직(瀆職)’ 혐의로 목이 잘렸다. 

7월 13일, 이번엔 거꾸로 공포정치에 앞장선 마라가 암살당했다. 지롱드당 소속 스물다섯 살 여인 샬롯트 코르도네의 칼에 찔렸다. 자코뱅당은 다비드를 통해 ‘민중의 친구’ 마라의 죽음을 혁명에 이용하려 했다. 마라는 광신적인 비관론자인 병약한 의사였다. 그는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빈민을 전선으로 동원하여 베르사유로 진격했으며, 루이 16세의 기요틴 처형에 앞장섰다. 공화국을 위해서라면, 인민의 적 10만 명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과격한 말을 서슴지 않았던 유명한 급진주의 논객이었다.

 

<마라의 죽음(1793)>

욕실을 검소하고 단순한 배치로 바꿔 놓았다. 오른손에 쥔 깃펜이 그의 무기이다. 피부병 치료차 유황을 넣은 욕조 속에 있던 마라의 모습은 예상외로 깔끔하다. 칼에 찔린 주변의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마라는 샬롯트가 보낸 위장 청원서를 왼손에 꼭 쥐고 있다. 그녀가 암살자라는 암시다. 사실은 샬롯트가 배신자들의 거짓 이름을 적은 목록이었다.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편지의 ‘자비(Bienveillance)’란 단어는 자선을 베풀려다 희생된 인물로 승화하려 함이다. 푸줏간 칼의 손잡이를 흑단 나무에서 상아로 바꾸어 놓았다. 핏빛과 선명한 대비를 노렸다. 탁자 위 잉크병과 또 다른 깃펜, 프랑스 제1공화국 지폐. 그것은 건선을 치료하면서 욕실에서 공무를 보는 습관을 강조하고자 함이며, 민중을 위한 배려를 상징한다. 벽면에는 원래 프랑스 공화국 지도가 핀으로 꽂혔고, 그 옆에는 두 자루의 권총이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예언하듯 큼직하게 '죽음(LA MORT)'이라고 쓰여 있었다. 

작품 속 마라는 불의의 기습을 당한 사람이 아니다. 순교자와 같은 모습이다. 이를 위해 벽면을 검은색으로 단순화하여 식초를 먹인 흰색 터번과 대비시켰다. 그리고 축 늘어진 팔, 빛을 받은 창백한 피부, 그리고 실제와 다른 상처 자국은 피에타의 예수를 닮았다. 나무 탁자 하단에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서명이 정자체(正字體)로 쓰여 있다. 글은 모두 세 가지 버전이다. 모두 동지애적 고별사이자 역사의 비석이었다. 3개월이 걸린 작품은 혁명의 축제에 맞춰 10월 14일 루브르 안뜰에서 공개되었다. 시민들은 "우리 친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다비드가 연설했다. 


“나는 인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따랐습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1788)>

이렇게 흥분과 공포를 담아낸 최고의 선동화는 1천 부가 인쇄되어 프랑스 전역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등에 올라탄 다비드는 스스로 내려올 재간이 없었다. 당통을 처형한 혁명재판소는 잇달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주교, 왕당파, 공화주의자 그리고 특이하게도 징세 청부인이 포함되었다. 자신의 작품 활동을 후원한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그중 한 명이었다. 라부아지에는 구체제에서 세금 징수 회사 지분을 갖고 있었다. 회사는 왕과 계약을 맺고 징수액 목표를 정했으며, 그 이상은 이익으로 챙길 수 있었다. 다비드는 그의 처형에도 찬성표를 던졌고, 그해 5월 8일 단행됐다. 

왕당파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의 급진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 대한 배반이라며 남편을 이중적이라고 여겼다. 그가 그린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가 그 증거가 되는 그림이다. 죽은 마라 역시 ‘현대 화학의 아버지’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1779년경 라부아지에가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었을 때, 당시 의사였던 장 폴 마라는 자신이 훌륭한 과학자라는 생각에 회원 신청했다. 그는 일종의 초기 적외선 탐지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한 것을 증오하던 라부아지에가 그의 논리와 실험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마라는 수치심을 느꼈고, 앙심으로 전이했다. 결국, 라부아지에가 혁명 정권 재판에 회부되자 불리하도록 배후 작용을 했다. 라부아지에는 남은 생을 연구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재판정에 요청했다. 그러나 판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리 공화국은 과학자도, 화학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의는 연기될 수 없다.”


로베스피에르에게는 이제 타협은 없었다. 정직하고 검소한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는 모두 프랑스의 적이었다. 라부아지에 사후 두 달이 지나 친구이자 수학자 라그랑주가 한탄했다. “그의 머리를 베어버리는 데에는 순간으로 족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어내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뒤 정말로 프랑스는 100년 동안 라부아지에처럼 뛰어난 화학자를 갖지 못했다. 그의 친구 뒤퐁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1802년 화학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이 바로 ‘뒤퐁’이다.


다비드의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이혼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면서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 섰다. 자신에 대한 적개심을 누그러트리려고 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를 숙청하려 한 연설이 결정적이었다. 숙청하는 사람을 숙청하겠다는 그의 말은 많은 혼란을 초래하면서 같은 편의 저항을 불러왔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7월 28일 서른여섯의 나이로 단두대에 오를 때 그의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통이 죽으면서 “단두대가 너를 부르고 있다. 다음에는 네 차례다”라고 외쳤던 단말마가 현실이 되었다. 

<사비니의 여인들(1799)>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함께 혁명에 참여했던 다비드가 룩셈부르크 궁전에서 옥살이했다. 막상 남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그녀는 다비드의 안위를 걱정했다. 사랑이었을까, 질긴 정이었을까? 부유한 그녀는 요로에 탄원서를 보내고 구명운동을 벌여 5개월 만에 다비드가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때 그린 그림이 <사비니의 여인들>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화해’라는 메시지를 던졌으나, 그가 살아남기 위해 ‘정국의 중재자’를 자임한 그림이라는 오해를 산 작품이다. 혁명이 종결되고 총재 정부가 구성된이듬해인 1796년, 아내가 그를 감옥으로 면회를 온 이후 시작하여 4년 만에 완성했다. 

소설가 스탕달은 고지식하게 "전쟁터에 발가벗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냐"라고 조소를 보냈다. 그러나 유료 입장으로 전시한 그의 그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796년 부부는 재결합했으니 결국, 그림은 아내를 위한 헌시(獻詩)가 되었다. 반면 다비드의 정치적 행보의 결말은 그림과 달리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제1 화가로 변신했으나 그의 몰락과 함께 1816년, 나이 예순여덟 살에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서 초상화와 신화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한편 1977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다비드의 그림 속 헤르실리아의 얼굴로 우표를 발행했다. 관용과 화해의 정신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유용한 정치적 메시지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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