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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10. 2022

프랑스 대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혁명은 최초의 '국민 국가'을 낳았다

30년전쟁 이후 유럽 최강국 프랑스를 견제할 국가는 없었다. 유럽 전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계몽주의의 중심에도 프랑스가 존재했다. 1748년 이후 저명한 계몽사상가들이 저작을 속속 발표했는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볼테르의 <여러 민족의 풍속과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드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사전>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교육과 문화 환경은 우수했다. 

문제는 프랑스 정부 자신, 즉 내정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서 인구 1/10이 1693년~1694년의 기근과 이에 따라 일어난 전염병으로 죽었다. (강유원, <책과 세계>) 그리고 루이 15세와 16세는 정치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그들은 영국 찰스 1세의 사례에서 교훈을 도출하지 못하면서 결국, 예지력 부족으로 혁명을 자초했다. 루이 16세는 7년 전쟁 패배 이후 국가 재건에 힘썼어야 했다. 그러나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며, 열쇠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 좋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특히 1777년 12월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지원하기로 한 결정은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7년 전쟁을 통해 대(大) 식민제국으로 올라선 영국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에만 급급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돈이 하는 시대였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프랑스의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도 신임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는 1781년 프랑스 최초로 공개한 <국가재정에 관한 공식문서>에서 적자를 1,000만 리브르로 기재했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로, 실제 적자는 5,000만 리브르에 달했다. 경고가 필요한 시점에 반대로 안도감을 주는 행위였다. 한편 1787년에 이르러 예산 절반을 전쟁 빚의 이자로 내는 데 사용했다. (로버트 B. 쥘릭, <세계 속의 미국>) 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 빚은 무려 45억 리브르에 이르렀다. 루이가 즉위한 1774년 약 15억 대비 3배나 늘어난 수치였다. (노명식, <프랑스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이제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특권만을 주장하는 1%, 약 27만 명의 성직자와 귀족들이 양보할 차례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관직과 국토의 40%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1789년 1월 1일 네케르는 나머지 99%의 백성을 독려하기 위해 예고 없이 삼부회를 소집했다. 혁명은 사실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삼부회는 루이 13세 이후 175년 동안 잠자고 있던 제도였다. 

 

헬만과 찰스 모네의 <베르사유 궁전의 삼부회 개회식(1789년 5월 5일)>

1789년 5월 제3부 시민계급 대표자 등이 모여 재정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았다. 1, 2부 대표들은 제3부가 거수기 역할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특권계급이 2 대 1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네케르는 제3 신분의 정원을 두 배로 늘렸다. 의원 수는 귀족이 188명, 성직자가 247명이었으며, 제3 신분이 500명이었다. 그러나 제3 신분은 진정한 의미의 민중 대표가 아니었다. 교묘하게 상류 부르주아 계급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성원 절반 정도가 변호사고, 나머지는 귀족, 실업가, 교구의 주임 사제였다. 갈등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으며 제3 신분 대표 수가 많아도 신분별 투표 시 2:1로 뒤지는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성안 사람(부르주아 bourgeois)’을 비롯해 상당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장 자크 루소의 주장에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은 투표가 신분별인지, 개인별인지 모호하다고 여겨 토의 형식과 투표 방식의 공정성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6월 17일에는 부별 심의에 반대한 미라보 등이 별도의 국민의회(國民議會)를 구성한 후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혁명 당시 구호의 판박이였다. 

루이가 회의장 문을 걸어 잠갔다. 입장하지 못한 국민의회는 테니스 코트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선언했고, 다시 무력으로 해산하려 들자 대표들은 파리 시민들을 선동했다. 시민들은 절대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7월 14일 마침내 바스티유를 점령하고, 수비대 사령관 드 로네이와 파리 사장 플레제이유의 머리를 창끝에 꽂고 거리를 누볐다. 상퀼로트(Sans-culotte, ‘퀼로트(반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층시민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능력에 놀라워했다. 혁명으로 종결된 삼부회는 왕권 약화를 각인시켜 주는 한편, 결과적으로 새로운 ‘국민 국가’라는 시스템의 탄생을 도왔다. 

 

루이스 엘리자베스 비제르 르 브룅,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 격랑의 한가운데 있었던 불행한 여인이 바로 루이 16세의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다. 궁정 전속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Elizabeth Louise Vigée-Le Brun, 1744~1842)이 그린 그녀의 초상화 두 점을 만나 보자.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1783년 작품이다. 왕비와 동갑인 여성화가 르 브룅은 실력과 미모를 갖춰 생전에 성공한 초상화가였다. 전체 800점 중 600점 이상이 초상화였다. 그녀는 소위 그림을 꾸밀 줄 알았다. 앙투아네트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초상화도 30여 점을 그렸다. 왕비는 유전적으로 턱이 뾰족하고 오므린 입술을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브룅은 각별히 신경을 써서 그녀의 턱을 작고 동글게 처리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사달이 났다. 파리 패션을 적용한 ‘모슬린 드레스’는 왕비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초상화를 본 궁정의 보수 사회는 깜짝 놀랐다. 직책에 맞지 않는 복장이라는 지적이 뒤따랐다. 악의를 가진 이는 “오스트리아 여인이 속옷만 입고 나타났다”라고 비난했다. 부지런히 청회색 실크 드레스를 입히고 같은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여러 복제품을 만들어 베르사유 궁전을 포함하여 전국 곳곳에 걸어 놓았다. 지금 앙투아네트가 잘못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을 하려 함이 아니다. 요점은 이것이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이미지는 실제와 상관없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적자를 만드는 부인’이라고 비난했지만, 프랑스의 부채는 루이 14세부터 누적된 문제였고 궁정 경비는 전체 예산의 6%에 불과했다. 160만 리브르 상당 ‘목걸이 사건’의 구설수(루이 드 로앙 추기경과의 관계)도 그녀의 이름을 판 라 모트 백작 부인의 짓이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


세계 인구의 80~90%가 오로지 땅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먹고 살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킨 결정적인 이 말은 원래 루이 14세의 부인 마리 테레즈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루소가 풍자적으로 인용했으니까 설득력 있는 얘기다.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그녀는 열다섯 살에 프랑스로 시집왔다.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데리고 있던 하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모국어인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만 써야 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예의범절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면서 비엔나의 간소하고 자유스러웠던 생활을 그리워했다. 루이 16세가 1774년에 선물한 ‘프티 트리아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골 농가를 짓고 가까운 이들과 어울리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많은 궁정 인사들은 그녀의 생활 방식을 헐뜯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사악한 왕비'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1788년에는 큰 흉작과 혹한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를 가라앉히는데 만만한 희생양이 필요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이를 갖진 못한 그녀에게 음란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대혁명 후 파리로 끌려온 루이 16세는 라파예트를 비롯한 중도파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1791년 발효된 헌법에 따라 새로운 입헌군주국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기도 전인 6월에 ‘바렌 도주 사건’이 발생했다. 파리 튀를리 궁 안에 갇혀 있던 국왕 부부가 비밀리에 마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다 발각된 것이다. 일부에서 국왕 폐위를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 ‘입법의회’는 좌파인 지롱드 파가 있었으나 의회 외부의 극좌파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주도했다.

다비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스케치(1793)>

프랑스혁명의 폭발력에 주변 왕정국가들이 긴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가 재위 2년 만에 급사하자 조카 프란츠 2세가 다스리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반 프랑스혁명 동맹이 형성되었다. 1792년 전쟁이 개시되었고, 전력에서 열세를 보인 프랑스는 패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의용군이 가담하면서 전황은 역전되었다. ‘군인은 사기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맞았다. 훈련도 제대로 안 된 혁명군이 그해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연합군을 꺾었다. 마침 발미에 있었던 괴테는 이 모습을 보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무렵 왕당파에 의한 반혁명 음모가 발각되었다. 탕플 탑에 유폐되었던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 외국의 힘을 끌어들여 자국민을 해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어 ‘국왕의 단 한 명의 신하’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할 명분을 찾았다. 아들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이었다. 정치적 흑색선징이 분명했다. 재판 내내 품격을 지키며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왕비는 고발자 에베르가 묻자, 그 순간만큼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나무위키>)


남편을 보낸 9개월 뒤 10월 16일, 그녀는 참수되었다. 다비드가 짐마차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펜으로 종이에 스케치했다. 풍문과 다비드의 의도와는 달리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의 태도는 의연하기만 하다. 심신미약 상태로 끝내 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고 증언한 루이 17세는 왕비가 죽고 불과 2년 뒤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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