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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03. 2022

프리드리히 대제와 슐레지엔 전쟁

아돌프 멘첼, <산수치에서 플루트를 여주하는 프리드리히(1852)>

세상을 일깨우는 데는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계몽주의와 함께 근대화를 이끈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절대주의였다. 1740년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가 스물여덟 살 나이로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볼테르와 철학적 교류를 할 정도로 당대의 가장 교양이 높은 인물로, 자신이 국민의 공복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그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계몽주의를 관철해 프로이센을 최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마침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향력이 크게 상실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1740년에 사망했다. 자치권이 커진 독일 연방의 프리드리히가 이를 기회로 받아들였다. 선전포고도 없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북동쪽에 위치한 슐레지엔을 침범했다. 슐레지엔은 철과 석탄이 풍부한 지역으로 전쟁 직전에는 오스트리아 세금 수입의 22%를 책임지는 요충지였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명분이 되었던 지역이며, 1969년 취임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영구 포기 선언으로 폴란드와 체코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의 발발은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과 관련 있다. 카를 6세 사후 모든 영토가 장녀인 테레지아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였다. 카를이 죽기 전 법령을 고쳐 ‘남자 상속자가 없으면, 장녀에게 넘겨준다’는 ‘국사 조칙’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가문과 친족 관계에 있던 주변 제후들이 반발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와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합스부르크의 분할을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때 프리드리히가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슐레지엔의 할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테레지아가 거부하자 1742년 결국, 힘으로 슐레이젠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전쟁은 1748년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전쟁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열강들도 자기 몫을 챙기려 출병했다. 1742년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되어 카를 7세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테레지아 여제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롤 모델은 역설적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였다.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는 한편 국민 교육에 각별히 힘썼다. 외교적으로 그녀는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는 영국과 이탈리아반도 서쪽 사르데냐와 동맹을 맺고 왕위 계승 문제에 전념했다. 1745년 카를 7세가 죽고,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가 왕위에 올랐다.

 

Carl Röchling의 <호헨프리트베르크 전투>. 1745년 6월 4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안긴 전투이다

오스트리아가 명분을 확보하고 전력이 강력해지자 프리드리히가 취약해진 슐레지엔의 방어를 걱정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영토는 약 1/6, 인구는 약 1/3 정도로 열세였다. 프리드리히는 1744년 보헤미아 지방을 선제공격했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다. 프리드리히는 전쟁 초기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군을 격파했다. 보헤미아의 프라하를 점령한 데 이어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마저 차지했다. 1745년 성탄절, 드레스덴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을 공식 인정했다. 프로이센 국민은 열광했고, 계몽 군주인 그를 ‘프리드리히 대제’라 불렀다.

프로이센의 성장(1600~1795)

그러나 전통의 오스트리아였다. 프로이센은 다시 한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제3차 슐레지엔 전쟁으로, 7년 전쟁(1756~1763)이라고도 불린다. 훗날 윈스턴 처칠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일컬었다. 물론 전쟁 당사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나 동맹국을 바꾼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이 해외 식민지 싸움과 병행함으로써 남북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까지 전쟁이 벌어졌다. 프리드리히가 그간 준비했던 무기체계의 발전과 용병술이 빛을 발했다. 사면초가에 몰렸던 프로이센군은 1757년 두 차례의 대전투에서 승리했다. 11월 로스바흐 전투와 특히 12월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했다. 절대 열세를 뒤집은 기적과 같은 결과였으며, 이로써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을 최종 확정 지었다. 이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1871년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해외에서는 프로이센의 동맹국인 영국 해군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르면서 대(大) 식민제국으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1763년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파리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에 특히 가혹한 조약이었다.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부 지역을 비롯해 인도, 세네갈, 그라나다 제도를 잃었다.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얻었고, 에스파냐는 대신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편 루이지애나를 얻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유럽 유일의 최강국 지위가 흔들렸고, 성마른 복수심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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