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가 1558년 11월 7일 즉위했다. 자신의 어머니인 앤 불린을 참수한 아버지 헨리 8세,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 그리고 ‘피에 굶주린’ 이복언니 메리라는 극단적 인물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극심했고, 또 허약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가 매우 위태롭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정치에 임했다. 겸손하고 섬세했으며, 먼저 인내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점을 뼛속 깊숙이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일 땐 고집스러울 정도로 단호했다.
그러자 주위 대신들이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에식스의 백작 로버트 데버루는 참수를 당하면서까지 여왕의 안녕을 기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첩보 시스템을 구축하여 1588년 ‘가톨릭 수호국’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44년간 후진국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조성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기에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으나 후대의 영국인으로부터 지난 천 년간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해상 강국으로 부상한 영국의 바로크 시대를 풍미한 화가는 의외로 플랑드르의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이다. 안트베르펜에서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32년 찰스 1세의 궁중 화가로 임명되면서 런던에 정착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미술품을 수집했던 찰스는 사실 루벤스를 초빙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루벤스의 완곡한 거절로 안타까워하던 차제 반 다이크가 런던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청했다. 그는 영국 회화의 중심인물이 되는 조슈아 레이놀즈와 토머스 로렌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반 다이크는 루벤스 작업실에서 재능을 다졌고,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상화는 18세기까지 영국 화단의 전범이 되었는데, 루벤스와 달리 차분한 색채와 절제된 표현으로 차갑고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그가 그린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초상화>가 그중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대 티치아노 이래 통치자를 표현하는 데 주로 쓰였던 전신상을 택해 등신대 크기로 완성했다. (토마스 R. 호프만, <바로크>) 왼팔의 단축법 처리가 뛰어나고, 빛이 반사되는 평상복 윗도리는 마치 진짜 천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찰스가 왼손으로 벗은 장갑을 들고 있는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는 자세가 무척 자연스럽다. 표정이 온화하여 대중과 친화적이다.
그러나 승마는 군주의 덕과 용맹을 나타낸다. 굳이 <기마 초상화(1637~1638)>가 아니더라도 강렬한 시선과 오른손으로 짚고 있는 지휘봉에서 그가 군주라는 사실을 깨닫기 충분하다. 게다가 마부와 시동, 복종하는 듯 땅바닥을 긁고 있는 말의 시선까지 모두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감상자와 일정 거리를 느끼게 하여 군주의 위엄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구름이 잔뜩 드리워진 하늘은 앞으로 그의 통치가 순조롭지 않음을 예감케 한다. 반 다이크는 작품 가격으로 200파운드를 원했지만, 찰스는 1638년 100파운드를 지불했다. (<위키피디아> 참조) 예술 후원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그를 믿고 영국에 정착하기로 한 화가로서는 적이 당황했으리라 짐작된다.
1649년 1월 30일, 영국 국왕의 궁전 화이트홀 앞에 많은 군중이 운집했다. 찰스 1세의 처형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200년이 지나 처형 직후의 현장을 담은 <찰스 1세의 관 곁에 서 있는 크롬웰>이 등장했다. 그러나 작가는 영국이 아니라, 이웃 나라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폴 들라로슈이다. 하긴 자국의 화가가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위험스러운 주제였다. 관례대로라면 처형인의 잘린 머리는 방치된 채 군중에게 전시되어야 한다. 경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림 속 왕의 시신은 온전한 상태이다. 머리와 몸을 꿰매어 붙어 놓았다. 전례가 없는 조처였다. 그러나 하얀 수의(壽衣)로 인해 뚜렷이 보이는 선혈 자국이 처형 사실을 선명하게 증언한다. 검은 관 뚜껑을 열고 왕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oll, 1599-1658)의 배려였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호국경(護國卿)’으로 불렸다. 헨리 8세에 의해 참수당한 토머스 크롬웰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영국 왕당파와 아일랜드 가톨릭가 연합 전선을 형성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아일랜드를 잔혹하게 토벌한 후 전비를 확보할 목적으로 그곳 농지의 2/3을 징수했다. 항해조례를 발포(1651)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면서 최강 네덜란드의 세기를 무너뜨렸다.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신교를 비롯한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는 한편, 공화국 건설을 위해 국왕 찰스 1세의 처형을 지지했던 이중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실제 상황인지, 또는 크롬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의 상상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들라로슈는 내전 당시 반대편 의회파를 지휘했던 크롬웰의 표정을 어둡게 그렸다. 좋게 생각하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정치 행보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 그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에 의해 부관참시되었다.
찰스 1세의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후사 없이 죽은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졸지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했다. 제임스 1세가 그랬듯이 아들 찰스 역시 잉글랜드 종교와 의회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배우지 못했다. 유럽은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정이 무르익을 때라 그는 선왕의 정책을 비판 없이 이어받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1628년 그는 하원이 제출한 ‘권리청원서’를 받아 보았다. 국왕이 해서는 안 될 많은 사항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금이 궁해진 찰스는 할 수 없이 특별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와 국민과 척을 진 가운데 찰스는 의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선박세’였다.
영국은 종교적으로는 이질적이고 복잡했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로, 자칭 프로테스탄트라 했다. 하지만, 국왕을 종교의 수장으로 받드는 형식이며 가톨릭적 색채가 강했다. 제임스가 개종하여 국왕이 되었기에 찰스에겐 성공회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칼뱅파 장로교 국가였다. 찰스가 교회의 권위와 주교(主敎)제, 예배 의식을 중시하는 가톨릭적 요소를 강화했다. 결정적으로 국교회의 새로운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여 반발을 샀다. 1640년 찰스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는 동의를 계속 거부했다. 찰스는 의회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했다.
당시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청교도’로 불리는 ‘퓨리턴(Puritans)’이었다. 결국, 1642년 8월 말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크롬웰은 ‘철기대(鐵騎隊)를 앞세워 1, 2차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찰스 1세의 처형으로 끝난 이 내전을 '청교도 혁명(1642~1649)'이라 부른다. 1660년 크롬웰이 죽은 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의회에 맞서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인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의회와 국민은 메리(Mary, 메리 2세)와 함께 남편인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를 공동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권리장전이 승인되면서 ‘왕은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찰스 1세의 처형은 영국의 절대왕정 종식으로 이어졌으며, 유럽 이웃 국가에 큰 교훈을 남겼다. (제목의 그림은 흉상 제작을 위한 반 다이크의 <찰스 1세의 3중 초상>이다) 민의를 무시할 경우 국왕의 목숨조차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경고였다. 144년 후 이 경고는 프랑스에서 현실이 되었는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이 그것이다. 앞서 소개한 <사냥복 차림의 찰스 1세 초상화>는 찰스 처형 후 1738년 프랑스로 건너갔고, 1775년 루이 14세에게 팔렸다. 이때 찰스의 불행한 운명도 함께 프랑스 왕정으로 옮겨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