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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24. 2022

대륙봉쇄령과 나폴레옹의 몰락

윌리엄 터너, <트라팔가르 해전(1806~1808)>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10년간 전 유럽은 그 이름에 떨었다. 그러나 유독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프랑스군은 영국 넬슨 제독에게 패했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야심인 영국 상륙이 물거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제패가 완성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분한 마음에 그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이듬해인 1806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대륙 국가들에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금지한다는 칙령,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다. 그는 영국이 대륙의 시장을 상실함으로써 받는 타격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영국과 같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공업과 정치 및 전쟁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통찰했으며, 영국의 건재는 프랑스의 대륙 지배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와 경제 구조를 달리했다. 특히 러시아, 프로이센(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농업 국가들은 이로 인해 불만이 높아갔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공산품 제조업자는 유리했지만, 무역상에게는 큰 타격을 입혔다. 포르투갈이 대륙봉쇄령을 어김으로써 1807년 11월에 프랑스군이 침공했다.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1811년 여름 미국기를 게양한 영국 배 150여 척의 입항을 받아들였다. 1812년 5월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총과 칼이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곳곳에서 봉쇄의 틈이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역 봉쇄로 맞섰다.


나폴레옹에게 첫 타격을 입힌 것은 스페인 독립 전쟁이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를 시작으로 스페인의 저항은 열화와 같이 번졌다. 혁명군인 줄 알고 반겼던 나폴레옹 군이 정복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복한 나라를 친인척에게 떡 돌리듯 나눠주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형 조제프에게 선물한 데 분개했다. 이런 극렬한 저항에는 의외로 나폴레옹의 교황령 병합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스페인인의 신앙적 자부심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고, 곳곳에서 게릴라전이라는 비정규전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10만 명의 시민이 1만 2천 명으로 줄 때까지 싸웠던 사라고사의 항전은 세계를 감동케 했다. 스페인은 1814년까지 나폴레옹 군이 물러가기까지 끈질기게 투쟁했다. 1809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하고 프란츠 2세의 딸 열여덟 살 마리 루이즈와 1810년 재혼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달랬다. 그러나 동맹국이 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자 형편을 보아 프랑스를 등지겠다고 미리 통보했다. 마리 루이즈는 훗날 나폴레옹의 후계자(로마 왕 나폴레옹 2세)를 낳았으나 국가를 위한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이후 결과는 잘 알다시피 1812년 6월 4일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 60만 대군이 러시아의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보급 체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러시아 영토 내로 진군했다. 9월 14일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도시,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스스로 불태운 도시의 화염을 발견하고 나폴레옹은 맥이 풀렸다. 혹심한 추위와 아사, 그리고 코사크 기병에게 수많은 장병(그랑드 아르메, Grande Armée)이 목숨을 빼앗겼다. 12월 5일 황제는 부대를 남긴 채 측근만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폴레옹은 급격히 몰락했다. 1813년에는 프로이센이 선전 포고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30일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동맹군이 파리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퇴위 후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재위 1814~1824)가 돌아와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아돌프 노르텐, <모스크바로부터 철수하는 나폴레옹(1851)>

프랑스 국민들은 처음에 나폴레옹이 국가의 위신과 권위를 떨쳤다고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이웃 나라와 프랑스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특히 리슐리외가 분리해 놓았던 독일 지역 영주국들이 서로가 ‘운명공동체’ 임을 인식하고 통일을 서두르도록 자극했다. 결국, 통일을 이룬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이 지은 업보를 프랑스에 되돌려주었다. 모두 만족할 줄 모르는 그의 정복욕이 자초한 일이다. 이후 섬을 나와 1815년 6월 18일에 치른 워털루 전투 얘기는 이 시점에서 굳이 꺼낼 필요가 없겠다. 다만 52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프랑스", "군대", 그리고 "조세핀"이었다는 말을 전한다. (미아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는 로마의 카이사르보다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를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엠마뉴엘 라스 카즈는 <세인트 헬레나 회상록>에서 유배된 나폴레옹이 두 영웅을 비교하면서 “카이사르야말로 역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의 <비교 영웅전> 본문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알렉산드로스에 관한 책을 읽던 카이사르는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부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그토록 수많은 민족을 정복했던 나이에 나는 눈부신 승리 하나 거두지 못했는데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의 영토 확장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의 철학, 가치관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삶의 방향이 야망 쪽으로 빗나갔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면, 견유학파(犬儒學派)의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어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자유인과 노예가 하나 되는 세상을 꿈꿨다. 헬레니즘 제국을 완성하고 페르시아 원주민 소년 3만 명을 선발해 그리스 문명을 전수했다. 박트리아의 공주 록사네와 결혼해서 현지 문화와 동화하는 그리스 문명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진정한 영웅은 탐욕의 결말을 인식하고, 먼저 인류 보편적인 세계관을 확고히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폴레옹은 정복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뒷날 본인도 “나를 몰락시킨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나 스스로가 내 최대의 적이었으며, 내 불행한 운명의 원인이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2>) 그러나 당대에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일찌감치 예견한 화가가 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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